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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생각에 얻는 바가 없는 마음을 내라

기자명 법보신문

마음 청정히 하는 것이 참된 佛土 장엄
진리라도 집착하면 깨달음에서 멀어져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중생을 공경해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이후 첫 설법을 했던 인도 사르나트 녹야원.

 

10. 불국토의 장엄(莊嚴淨土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적에 연등불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 처소에서 실제로 법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미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은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므로 아름답게 꾸민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색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집착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수보리여! 어떤 사람의 몸이 산들의 왕 수미산만큼 크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님을 설하셨으므로 큰 몸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於法有所得不 不也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實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적에 연등불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 처소에서 실제로 법을 얻은 것이 없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무엇을 알았다는 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공부에 큰 걸림돌입니다. 어떤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게을러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수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가 교리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혹시라도 수보리가 법을 얻었다는 마음이 남아 있을까 두려워해서 그 의심을 없애기 위해 여래가 연등불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수보리 존자는 진리에는 얻을 것이 없음을 알았기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연등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수기사(授記師)입니다.『법화경』에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이 있는데 여기에 영산당시수불부촉 십대제자십육성오백성 (靈山當時受佛付囑 十大弟子十六聖五百聖)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영산당시(靈山當時)’는 부처님이『법화경』을 설하시던 영상회상 당시를 말하고 ‘수불부촉(受佛付囑)’은 부처님의 부촉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뒤의 ‘십대제자십육성오백성’은 부처님의 십대 제자와 열여섯 분의 아라한, 오백 명의 성인을 말합니다. 여기서 부촉은 수기와 같은 뜻이니 ‘오백제자수기품’은 부처님이 오백제자에게 부처가 될 것을 수기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과거에 연등 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을 들었으되 그 진리를 가히 얻은 것이 있겠느냐. 과연 내가 스승의 가르침을 진리를 얻었겠느냐고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수보리 존자는 법이나 진리라고 하는 것은 스승을 통해서 배우고 이해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실재로는 얻는 것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자, 이 말은 어떤 뜻일까요. 진리는 남이나 혹은 스승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내재돼 있는 것이 스스로 열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던 불성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스승이 손에 가지고 있다가 물건을 주듯이 선뜻 건네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밥을 이야기 하더라도 직접 밥을 해서 먹어야 배가 부른 것처럼 진리나 깨달음은 건네주거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밥에 대한 설명을 많이 들어도 내가 직접 먹어야 배고픔이 사라집니다. 스승이 진리다 법이다 가르쳐도 내가 체득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리를 얻을 수 있을까요.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스스로의 성품에 본래 진로(塵勞), 즉 번뇌가 없어서 고요하고 항상 비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곧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내재돼 있는 부처가 현현되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는 연등 부처님의 처소에서 실로 얻은 것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햇빛이 밝게 비추는 것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또한 취할 수도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미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은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므로 아름답게 꾸민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은 불토장엄(佛土莊嚴)에 대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장엄을 합니다. 목욕하고 화장하고 하는 것도 장엄입니다.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이 장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불토, 즉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하면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고 공양 올리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묻고 계십니다. 이런 것만이 꼭 장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부처님의 세계는 깨끗해서 모습도 없고 형체도 없습니다. 그러니 무엇으로 장엄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세계는 원래 맑고 깨끗한데 무슨 장엄이 필요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오직 선정과 지혜의 보배로 장엄하더라도 이는 가짜일 뿐입니다. 부연하면 부처님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을 선정과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정과 지혜는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버려야 하는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장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간의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으로 절을 짓고 경을 쓰며 보시하고 공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절에 와서 하는 모든 행동들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내 몸으로 부처님의 땅을 장엄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을 널리 공경해야 합니다. 내 몸이 곧 부처님의 땅이라고 한다면 상대의 몸도 부처님의 땅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중생을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이 있습니다.

‘상불경(常不輕)’이라는 말은 항상 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성이 내재돼 있는 이상 부처가 될 가능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하는 것처럼 앞으로 부처님이 될 우리도 공경을 해야 합니다. 일체의 중생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상불경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능히 공경하는 것이 바로 내 몸을 부처님의 땅으로 장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니, 마음이 깨끗하면 곧 불국토가 청정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득심(無得心)을 행해야 합니다. 생각 생각에 항상 얻은 바 없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가졌다, 갖고 싶다. 혹은 빼앗아야 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색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집착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이 단락의 의미는 육진(六塵)에 빠지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뜻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잘 알고 이해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을 가벼이 여긴다면 이는 청정한 마음이 아닙니다. 자성으로부터 항상 지혜를 발현해서 평등한 자비를 실천하고 마음을 낮추어 중생을 공경하는 것이 수행인의 청정심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돼야 합니다. 만약 마음을 스스로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청정한 곳에 집착하는 바가 있으면 이것은 또한 법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런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이 기도만이 최고야. 이렇게 어느 하나에 마음을 두고 다른 것은 무시하면 안 됩니다. 불교를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경전을 읽는 것이 최고다. 참선을 하는 것이 최고다. 이렇게 취사해서 어느 하나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는 순간 진리와는 멀어지는 것이며 또한 비록 진리라 하더라도 집착하면 곧 법상에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색에 집착해서 대상을 보고 대상에 집착해서 마음을 낸다면 미혹한 사람이고, 대상을 보고도 대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면 깨달은 사람입니다.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은 마치 구름이 하늘을 가린 것과 같음이요. 대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구름이 없는 하늘에 해와 달이 밝게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현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을 망심(妄心), 망념(妄念)이라고 합니다.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는 그것이야 말로 참다운 지혜라고 하는 것이니 망념이 발생하면 곧 어두움이요, 참된 지혜가 비추는 것은 밝음입니다. 밝으면 번뇌가 생기지 않고 어두우면 육진이 다투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까닭으로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합니다.

수보리여! 어떤 사람의 몸이 산들의 왕 수미산만큼 크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님을 설하셨으므로 큰 몸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크지만 마음이 작으면 큰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허공같이 커야 비로소 큰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경계가 있습니다. 몸이 비록 수미산만하다 하더라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광대무변합니다. 허공과도 같습니다. 다만 마음에 분별이 없고 육진에 걸림이 없으면 되는 것입니다.〈계속〉

종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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