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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포체와 함께 떠난 인도 순례] ⑨ 불교가 전부인 사람들

기자명 법보신문

도량 참배로 하루 시작 돌판 곳곳엔 경구 새겨

 
‘욕섬’(Yuksum)에 있는 성지다. 이곳은 시킴 왕국의 첫 국왕이 즉위한 곳이자 최초로 법을 설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나니 새로운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출발해야 한단다. 일정 담당인 ‘소남’의 출발 신호에 따라 순례 일행을 태운 차량 두 대가 제법 익숙해진 엔진 굉음을 내며 출발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섰던 터라 말끔하게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푸릇푸릇하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시킴은 숲도 우거지고 물도 많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고 여름에도 덥지 않다. 이런 모든 면을 종합해 볼 때 시킴은 히말라야가 안겨준 축복의 땅이라는 확신이 든다. 간간이 길가에 흘러내리는 산비탈의 물줄기는 이곳에 에너지를 불어 넣는 생명의 젖줄이 된다. 물이 풍부하기에 평지가 없어도 농작물을 기를 수 있고 농작물은 시킴의 생명수를 머금고 더 많은 열매를 생산하는 순환이 수천, 수만 년 동안 이어져온 것이다. ‘시킴 사람들은 어떤 인연으로 이 땅에 태어났을까, 그리고 나는 무슨 인연으로 이곳에 왔을까?’ 끝없이 이어져 온 생명의 순환을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다 왔습니다.”
새로운 성지에 도착했다. 신비롭고 맑은 영성(靈性, spirituality)의 땅이니 성지가 아닌 곳이 있겠는가. 주차장을 조성하고 있는 공간의 주변엔 상점도 몇 개가 들어서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방문한다는 반증이다. 순례자들이 도착한 곳은 ‘케초팔리’(Khechopalri), 구루린포체인 파드마삼바바의 발바닥 모양을 닮은 호수가 이채롭게 느껴진다.

전설에 의하면 구루린포체가 이곳을 지날 때 발을 내디뎠던 곳이 움푹 파여서 호수가 생겼다고 한다. 주변 안내도를 보니 정말 호수의 모양이 발자국을 꼭 닮았다. 시킴 사람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호수이며 소원을 들어주는 호수로도 이름나 있다. 힌두교도와 불교도의 순례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호수 주변엔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길에서 호수까지는 나무로 만든 길이 잘 조성돼 있었고 길 초입에는 자그마한 건물이 있었는데 ‘버터 등’을 공양 올리는 곳이다. 신발을 벗고 나뭇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니 끝에는 길보다 너른 공간이 있다. 순례 일행인 ‘소남’과 ‘제니’는 미리 준비해온 ‘카다’를 난간에 건 다음 호수를 향해 절을 한 뒤 앉아 있었다.

구루린포체 발자국서 생긴 호수

 
‘케초팔리’(Khechopalri)에 있는 호수.

난간에는 사람들의 소원이 깃든 수 없이 많은 ‘카다’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고 이제 갓 유아 티를 벗은 듯한 꼬마 아이가 할아버지 같은 노인을 따라 호수의 물을 입구에 있는 건물로 퍼 나르고 있었다. 옷이나 모든 것이 얼마나 꼬질꼬질 하던지 짠한 마음마저 든다. 두 사람의 사연을 들어보니 짜한 마음이 더한다. 그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고 노부부가 아이를 거두어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소남’은 나와 같이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소남’은 가능하다면 자신이 입양을 해서 호주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적극 찬성했다. 순례 중 확인하는 자비의 마음, 나 역시 그러하고 다른 이 역시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이리라.

입구에 있는 건물에 가니 미리 이야기를 해둔 모양인지 우리가 공양 올릴 ‘버터 등’이 1000개가량 준비되어 있었다. 린포체는 늘 도량에 공양을 올리더라도 ‘버터 등’을 보시하든가 아니면 법회를 청하도록 권선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는 린포체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린포체의 권유대로 할 것 같으면 불자들에게 공양을 받는 수행자들이 시주의 빚을 덜 지게 될듯하다. 우리는 각자의 발원을 담아 빛을 밝힌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게 뭐예요?”
다음 장소로 가는 도중에 ‘소남’은 아이들하고 흥얼흥얼 거리며 노래를 했다. 그런데 그들의 소리가 무척이나 귀에 익은 것이었다. 노래는 한 구절이 여러 번 반복 되었는데 내 생각엔 아이들에게 그것을 외우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잠시 노래가 끝나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시킴말의 자음과 모음이에요.”
그랬다. 그것은 시킴 말의 자음과 모음인데 첫 자음이 ‘가’였다. 신비롭다. 물론 자신들의 글자가 없어서 알파벳으로 표시하기는 했지만 자음의 음가는 확실히 ‘가’였다. 그리고 모음도 비슷했다. 우리말은 자음과 모음을 구분해서 쓰는데 그들의 문자는 섞여 있었다. 그것을 알았을 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찼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소남’의 지극한 모성애가 담긴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어느덧 시킴의 첫 번째 수도 ‘욕섬’(Yuksum)에 도착했다. ‘욕섬’의 분위기는 여느 도시와는 확연히 달랐다. 산에 둘러싸인 분지와 같은 느낌의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안온했다.

시킴 최초의 설법지엔 카다가 수북

 
벨링의 도량을 장엄하고 있는 돌에 새긴 발원문.

“여기가 어디인가요?”
린포체께 여쭈었다. 포장도 제대로 안된 밭둑길 같은 곳에 멈춘 차량의 앞에는 녹슨 철문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건물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곳은 시킴 불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야.”

한 마디의 말씀에 뭔가 신이하고 아주 특별한 성보가 있을 것 같아 한달음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커다란 하연색의 스투파가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주변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검은색 이끼와 풀이 닥지닥지 자라고 있는 스투파도 있다. ‘마니 콜로’(Mani Khorlo)라고 하는 법기가 있는 건물도 있다. ‘마니 콜로’는 영어로는 ‘Player Wheel’로 표현하는데 순례자들의 수레바퀴이다. 손으로 돌릴 수 있는 것에서부터 크기가 매우 다양하며 우리나라의 윤장대와 같은 용도의 불구(佛具)이다. 순례 일행은 우선 그곳에 들어가 손잡이를 잡고 돌면서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를 닮아가기를 서원하면서 염송했다.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저기 올라가서 사진 찍을까요?”
아직도 철이 덜든 나의 마음엔 어디서 사진을 찍을까 하는 욕심에 불경스러운 말이 툭 튀어 나왔다. 도량의 한 가운데에 조성된 스투파의 앞에 서 있는, 몇 백 년은 넘었을법한 커다란 나무 아래의 돌에 앉아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사람들이 앉기 좋은 그 돌을 보면서 여쭈었더니 린포체의 한마디가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했다.

“저기는 신성한 곳일세.”
내가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사진기가 귀했다. 시골마을의 학교인지라 수학여행을 갔을 때 한 학급에 사진기를 가져온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강원도 낙산사를 도착해 일주문 쪽으로 가는데 같은 반 친구가 경내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는데 린포체의 한 마디 경책을 듣고 있으니 당시 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절 안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어린 마음에 부처님을 모신 사찰이라는 생각에 친구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을 했었는데 시킴에 와서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에만 사로 잡혀 있었다니, 두 가지 장면이 교차하면서 지혜롭지 못한 나의 몸과 말과 마음을 관(觀)하게 되었다.

“이곳은 시킴에서 불법(佛法)을 처음으로 설한 장소일세.”
그랬다. 린포체께서 신성하다고 한 그곳은 1642년 시킴의 첫 번째 국왕인 ‘쵸갈 펀쇽 남걀’(Chogyal Phunstok Namgyal)이 즉위한 장소로, 즉위식에 티베트의 고승 네 분을 초청하여 법석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 즉위식 직후 고승들은 지혜의 법석을 펼쳐 시킴 왕국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번창할 것을 축원했을 것이다. 나무 아래 돌로 쌓아 만든 좌석을 보니 왕의 자리가 고승들의 자리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 시킴 사람들과 불교와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가늠하게 한다.

커다란 스투파 위에 순례자들이 공양을 올린 ‘카다’가 수북하다. 우리 일행들도 각자 ‘카다’를 좀 더 위쪽에 올리기 위해 힘껏 던졌지만 마음먹은 곳에 공양을 올리지는 못했다. 근처에서 점심 공양을 하고 ‘벨링’(Belling)에 있는 절로 발길을 돌렸다.

벨링의 사찰도 아주 오래된 도량 가운데 하나인데 승려는 한명도 살고 있지 않았다. 그 절은 주차장에서부터 도량에 이르는 길이 유난히도 멀었다. 한국의 대가람처럼 먼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대부분 절들이 일주문 가까이에 주차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절만은 예외였다. 주차장 주위 가게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를 아주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절로 오르는 계단 주위에는 일반인들이 사는 집들도 있었다. 계단을 한참 오르다보니 검은 돌 판을 깎아 벽처럼 만든 곳에 티베트 언어로 뭔가가 쓰여 있다. ‘옴 마니 반메 훔’ 이외에 다른 말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옆에는 돌을 그냥 투박하게 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스투파 두기가 이곳의 유서 깊은 역사를 말해주듯 서 있다.

기둥이 넷 달린 문을 통과하여 법당이 보이는 장소에 들어서니 한 귀퉁이의 건물에 구멍가게가 있었다. 감싸 안듯 도량을 보듬은 주변의 산들은 마치 꽃잎 같았고 절은 그 중앙에 올라앉은 형세다. 한 참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고즈넉한 고찰의 분위기에 좋았기 때문일까, 사람이 없는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첫 번째 건물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을 모신 법당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원을 담아 ‘버터 등’을 켰던지 벽과 천정이 시커멓게 그을려져 있다. 다음 건물에는 커다란 ‘마니 콜로’가 있다. ‘마니 콜로’의 겉표면을 보니 최근에 조성된 빛이 역력하다. 시드니에서 온 한 노 보살과 함께 한국식으로 ‘옴 마니 반메 훔’을 염송했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과 한국식 염불을 하니 감동과 재미가 더하다. 형식이나 음률 그리고 발음은 다를지라도 염불을 하는 불자들의 부처님을 향한 믿음은 하나이리라.

석공의 미소에서 부처의 얼굴이

 
벨링의 도량에서 돌에 글 새기는 노인.

하루를 회향하려는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로 향하고 있다. 벨링에 있는 도량의 가장 큰 특징은 셀 수 없이 많은 스투파가 무리지어 모여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티베트 언어로 경전을 새긴 돌무더기가 스투파 무리 사이사이에 있다는 것 역시 아주 특별하게 다가왔다. 조금만 빨리 이곳에 도착했어도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하루해가 질 즈음에 도착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스투파 무리를 한 바퀴 돌면서 잔잔한 감동에 젖어 있는데 거의 한 바퀴를 돌았을까, 한 노인이 눈에 들어온다. 좁은 공간에서 한 노인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돌에 글씨를 새기고 있었다.

‘소남’이 돈을 건네면서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글씨를 새겨 달라고 청했다. 함께 간 다른 사람들도 ‘소남’을 통해서 그 노인에게 부탁을 했다. ‘소남’의 말로는 그 노인은 오래 전부터 돌에 글씨를 새기며 살아 왔는데 승려인지 재가자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삶 속에서 출가자인 나보다도 더 행복한 미소를 띠며 중생의 소원을 새기는 노인은 내 마음에 영원한 스승으로 각인된 듯 마음이 잔잔하다.
“우주에 부처님 아니 계신 곳 없으며 일체 생명이 나의 스승이어라.”

보안 스님 boansun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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