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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지혜 성취는 모든 법 사라진 자리 보는 것

기자명 법보신문

알음알이 사라지고 지혜가 드러나면
그 자리서 부처님 지혜와 하나가 돼

중생이 부처 지혜 본디 갖추고 있어
마음 떠나 부처 찾으면 이것이 집착

39.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니

 
김정희 作. 불이선란. 개인 소장.

淸涼華嚴疏 曰. 經云 了知境界 如幻如夢 如影如響 亦如變化. 若諸菩薩 能與如是觀行相應 於諸法中 不生二解 一切佛法疾得現前 初發心時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知一切法卽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者 夫初心爲始 正覺爲終 何以初心便成正覺. 故云 知一切法 卽心自性故 覺法自性 卽名爲佛故. 經頌云 佛心豈有他 正覺覺世間 斯良證也. 斯則 發者 是開發之發 非發起之發也.

『화엄경』을 풀이한 『청량소淸涼疏』에서 말하였다.
경에서 “온갖 경계가 허깨비나 꿈같고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으며 또한 변하는 것인 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약 보살이 이처럼 볼 수 있다면 온갖 법에 집착하지를 않아 모든 불법이 바로 눈앞에 드러난다. ‘처음 발심’할 때 곧 ‘깨달음’을 얻어, 모든 법이 마음의 자성인 줄 알아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니 이는 다른 사람이 깨닫게 해주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다.

무릇 ‘처음 발심’은 시작이요 ‘깨달음’은 끝인데, 어찌하여 ‘처음 발심’에서 바로 ‘깨달음’을 이루는 것인가? 그러므로 “모든 법이 마음의 자성인 줄 알고, 법의 자성을 깨친 것 이를 일러 부처님이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의 게송에서도 “부처님의 마음이 어찌 다른 곳에 있겠는가. 올바른 깨달음으로 세간의 도리를 안다.” 하니, 이것이 좋은 증거이다. 이와 같이 ‘초발심(初發心)’의 ‘발(發)’은 ‘열어 드러내는 발(發)’을 뜻하지, ‘시작한다는 발기(發起)’의 ‘발(發)’이 아니다.

何謂現前之相. 夫佛智非深 情迷謂遠 情亡智現則 一體非遙. 旣言 知一切法 卽心自性 則知 此心卽一切法性. 今理現自心 卽心之性 已備無邊之德矣. 成就慧身者 上觀法盡也. 正法當興 今諸見亡也. 佛智爰起 覺心則理現 理現則智圓. 若鏡淨明生 非前非後 非新非故 寂照湛然. 不由他悟者 成上慧身 卽無師自然智也.

무엇을 눈앞에 드러나는 모습이라 하는가? 무릇 부처님의 지혜는 어딘가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데, 중생은 어리석은 알음알이에서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지혜가 드러나면,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지혜와 하나가 되니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모든 법이 마음의 자성인 줄 안다.[知一切法 卽心自性]”고 하는 것은, 곧 이 마음이 모든 법의 성품인 줄 아는 것이다. 지금 이치로 자신의 마음에 드러나는 것이 곧 마음의 성품이니, 여기에 이미 끝이 없는 공덕을 다 갖추었다.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한다.[成就慧身]’는 것은 모든 법이 다 사라진 자리를 보는 것이다. 올바른 법이 일어난 자리에서 지금 온갖 삿된 견해가 사라진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가 일어나 마음을 깨달으니 이치가 드러나고, 이치가 드러나니 지혜가 오롯하다. 만약 거울처럼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드러나면, 이는 앞 마음도 아니고 뒤 마음도 아니며 새로운 마음도 아니고 옛 마음도 아니며, 고요한 자리에서 환하게 비추며 맑고 깨끗하다.

‘다른 사람이 깨닫게 해주는 게 아니다.[不由他悟]’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 곧 ‘스승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아는 자연스런 지혜[無師自然智]’라는 것을 말한다.

又 不由他悟是自覺也 知一切法是覺他也 成就慧身爲覺滿也. 成就慧身 必資理發 見夫心性 豈更有他. 若見有他 安稱爲悟. 旣曰心性 自亦不存 寂而能知 名爲正覺.

또 ‘다른 사람이 깨닫게 해주는 게 아니다.[不由他悟]’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깨달음[自覺]’이고, ‘모든 법을 안다[知一切法]’는 것은 ‘모든 법의 실체를 깨닫는 것[覺他]’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한다.[成就慧身]’는 것은 ‘깨달음이 오롯해진 것[覺滿]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한다.’는 것은 반드시 이치로 드러나는 것이니 마음의 성품을 보는 게 어찌 다른 곳에 있겠는가. 만약 부처님의 지혜가 다른 곳에 있다면 어찌 이를 깨달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성품’이라는 말을 해도 본디 이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텅 비어 고요하면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 이를 일러 ‘올바른 깨달음[正覺]’이라 한다.

故 法華經云 爲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開示悟入 佛之知見. 夫一者 卽古今不易之一道 大者 是凡聖之心體. 故 十方諸佛 爲此一大事 出現於世 皆令衆生 於自心中 開此知見. 若立種種差別 是衆生知見 若融歸一道 是二乘知見 若一亦非一 是菩薩知見.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일대사인연을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여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을 열어 보여 주고 그것을 깨달아 들어가게 한다.[開示悟入]”라고 하였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에서 ‘일(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도(道)’를 말하고, ‘대(大)’는 범부와 성인이 갖고 있는 ‘마음의 바탕’이다. 그러므로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 세상에 출현하신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서 이 부처님의 지견을 열게 한다. 온갖 차별을 일으키면 중생의 지견이요, 하나의 도에 집착하여 귀의한다면 이승의 지견이며, 차별이 없는 데서 또한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보살의 지견이다.

若佛知見者 當一念心開之時 如千日並照 不俟更言 卽是祖師西來 卽是諸佛普現. 故云 念念釋迦出世 步步彌勒下生 何處 於自心外 別求祖佛. 則知 衆生佛智本自具足. 若欲起心別求 卽成遍計之性 故六祖云 本性自有般若之智 自用智慧觀照 不假文字. 若如是者 何用更立文字. 今爲未知者 假以文字指歸 令見自性. 若發明時 卽是豁然 還得本心 於本心中 無法不了.

그대의 불지견이 한 생각에서 열릴 때 천 개의 태양이 비추는 것과 같으니, 더 말할 필요 없이 이 자리에 곧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오며 모든 부처님이 두루 나타난다. 그러므로 “생각생각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시고 걸음걸음에 미륵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니, 자신의 마음 밖에 달리 어느 곳에서 조사 스님과 부처님을 찾을 것인가.”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를 본디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을 떠난 다른 곳에서 조사 스님과 부처님을 찾으려 한다면 곧 집착이 된다. 그러므로 육조 스님은 “본디 성품에 반야지혜가 있어, 저절로 이 지혜를 비추어 볼 뿐 문자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라면 어찌 다시 문자를 쓸 것인가. 지금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임시 문자로 돌아갈 곳을 가리켜 자신의 자성을 보게 한다. 마음이 툭 트여 본디 마음에 돌아간다면 본디 마음에서 어떠한 법도 알지 못할 것이 없다.

강설)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이 세상에 나오신 뜻은 중생이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있으니, 이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한다. 일대사인연을 위하여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을 열어 보여 주고 그것을 깨달아 들어가게 한다.[開示悟入]”고 하니, 이 내용을 법화경에서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님께서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느냐?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얻게 하려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며,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려고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며,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려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며,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에 들게 하려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40. 이치로 드러나는 부처님

寶篋經云 佛界衆生界 一界無別界. 此是圓智 圓覺諸法 遍一切處 無不明了. 雖五無間 皆生解脫想 雖惛盲倒惑 其理存焉. 斯理灼然 世間常住 有佛不能益 無佛不能損 得之不爲高 失之不爲下. 故言 衆生卽佛 此理佛.

『보협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는 똑같은 하나의 세계이니 서로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이 오롯한 지혜로서 온갖 법을 오롯하게 깨달아 모든 곳에 두루 하니 분명하고 뚜렷하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오역죄를 지어 무간(無間)지옥에 있더라도 모두 해탈하려는 생각을 내니, 어리석고 눈이 멀어 미혹하더라도 그 이치는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치가 분명하여 세간에 언제나 있으니, 부처님이 있더라도 이 도리를 더 늘릴 수 없고 부처님이 없더라도 이 도리를 더 줄일 수 없다. 이 도리를 얻더라도 더 높아질 수 없고 이 도리를 잃더라도 더 낮아질 수 없다. 그러므로 ‘중생이 곧 부처님’이라 말하니 이는 ‘이치로 드러나는 부처님’이다.

강설) 오역죄는 아버지를 죽인 죄, 어머니를 죽인 죄, 아라한을 죽인 죄,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죄,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낸 죄를 말한다. 이런 죄를 지어 무간지옥에 들어갈 중생도 성불할 수 있다고 하니 이는 ‘생멸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법의 실체는 사실 텅 빈 성품이기에 존재할 게 없으니 생멸하여 변화할 것이 없다. 성인들은 이 ‘이치로 드러나는 부처님’을 알고서는 인과를 뛰어 넘어 바로 열반에 들지만, 이 도리를 모르는 범부들은 죄에 집착하여 과보를 받을까 크게 두려워한다.

원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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