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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특강 〈1〉

기자명 법보신문

붓다 재세시 스님 법답지 못하면 공양 끊었다

『유마경』은 초기대승불교의 경전으로 기원전후 재가보살운동의 역할과 위상을 풍부한 문학적 상징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이념을 표방하는 한국불교계에서는 재가불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마경』을 홀대하는 듯한 인상이 적지 않다. 이에 사단법인 우리는선우가 성태용 교수의 강의로 9월 29일부터 11월 24일까지 매주 수요일 진행하고 있는 유마경 특강을 지상 중계한다.  편집자


『유마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꼈던 문제 중 하나는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불자로서 『유마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해갈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도록 강의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저는 재가불교운동의 현장에 몸담고 있으면서 ‘내가 하는 일이 올바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춰 제대로 가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그런데 대중들과 함께 세 번쯤 『유마경』을 공부하면서 내가 하는 일이, 우리가 하는 일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재가자들이 스님들에게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콤플렉스가 있다면 극복해야 합니다. 『유마경』은 그것을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재가불자로 사는 일이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경전입니다. 공부가 끝날 무렵에 이르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재가불자로서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에 돌아가는 자세에 한걸음 다가가는 상황이 되길 바랍니다.

『유마경』은 어떤 경전일까요. 산스크리트어로 ‘비말라키르티(vimalakirti)’라고 하며, 이는 유마거사의 원래 범어 이름이기도 합니다. 한역하면 무구칭(無垢稱) 또는 정명(淨名)이고, 이를 음역하면 유마힐(維摩詰)이 됩니다. 그래서 유마거사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구마라집은 『유마힐소설경』으로 번역하고, 현장은 『설무구칭경』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현장 번역이 산스크리트어에 더 가깝고, 구마라집 번역은 압축적이어서 더 생동감이 있기도 합니다. 강의는 현장삼장역의 『설무구칭경』을 저본으로 해서 번역한 교재를 이용할 것입니다.

경전의 구성과 내용을 보면, 전체 13품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를 압축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전 내용의 무대는 바이샬리입니다. 유마힐이라는 거사가 있고, 그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유마거사가 중생들을 위해 마음을 낸 다음 거짓으로 병을 앓아 자리에 눕자, 부처님은 그 마음을 알아채고 제자들에게 문병을 보내려 합니다. 그런데 십대제자들 모두가 이번 문병이 단순히 문병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사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문수사리보살이 문병을 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문수사리보살이 유마거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방에 들어서고 조그만 방에 수천대중이 들어가는데도 방이 넉넉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듯 어떠한 불교경전도 『유마경』처럼 드라마틱하고 재미있지는 않을 것이고, 현대의 희곡도 이러한 희곡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전의 내용 중 절정은 둘이 아닌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보살들이 이야기를 하던 중 문수사리가 “둘이 아닌 진리는 말로 할 수 없다”고 하자, 유마가 침묵으로 답변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마일묵’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침묵만 하고 있으면 유마거사가 바보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문수사리가 곧바로 “대단하시다”면서 띄워줍니다. 그 뒤로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차례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승단은 외호하되 개인 잘못은 비판

그리고 중간에 나온 이야기 중에 굉장히 충격적으로 읽었던 대목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라한을 부처님과 동격으로 보는 시각이 강한데, 여기서는 가차 없이 아라한을 ‘성불 못할 썩은 종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통곡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합니다. 가감 없이 소승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용서가 없습니다. 당시의 불교 문제를 조금도 용서 없이 가리지 않고 드러낸 경전입니다.

『유마경』이 드라마틱한 경전이라고 했는데, 무대가 꾸며진 이후 부처님의 근본정신에서 멀어진 불교를 대신해서 두드려 맞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로 10대 제자를 비롯한 아라한입니다. 10대 제자가 대표로 혼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유마경』을 재가불자가 설한 경전이라고 해서 재가불자와 승단의 대립구조로 보는 것은 안 됩니다. 유마거사가 사리불을 야단치기도 하지만, 처음에 나오는 장면이 유마거사가 스님들의 발 아래 절하는 장면입니다. 스님들에 대한 존경과 예경은 한 치도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 법의 근본정신이 어디에 있느냐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부대중이라고 할 때의 승단, 스님들에 대해서는 절대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유마경』이라는 무대는 이처럼 불교가 흘러오면서 부처님 근본정신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때 부처님의 근본정신에서 가장 멀어진 곳이 바로 기존의 승단입니다. 때문에 승단을 비판하지 않으면 부처님 정신을 드러내기 어려웠고, 승단의 대표로 부처님의 십대제자가 와서 질책을 받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승운동은 왜 일어났을까요. 부처님 재세시에는 재가자와 출가자가 늘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탁발하러 마을에 들어갔고, 마주치는 재가자들에게 삶의 바른길을 설명하고 축복도 내려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출가승단과 재가승단의 관계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님들은 무조건 떠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그건 아닙니다. 불법승 삼보에서 말하는 승은 개별적인 스님이 아니라 출가수행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삼귀의를 하면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하는 것이 마치 개별 스님들에게 귀의한다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재세시에만 해도 스님들이 법답지 않은 짓을 하면 재가자들이 공양을 끊었습니다. 그렇게 스님들은 엄한 비판의 대상이 됐습니다. 스님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엄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법답지 않은 일을 하면 공양을 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출가승단을 훼방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 재세시 가장 큰 사건은 파승가(破僧家)입니다. 데바닷다가 승단을 쪼개서 나갔는데, 이건 엄청난 사건이고 큰 악행입니다. 출가공동체를 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별 스님들을 비판하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재가자보다 더 엄한 비판을 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승단이 그렇게 내려오다가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됩니다. 왕과 부호들의 후원에 힘입어서 굉장히 큰 힘과 재산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재가자와 출가승단이 밀접하게 만나지 못하고, 스님들은 현실적인 삶을 이끌어주지 못한 채 전문적인 연구자가 됩니다. 그러면서 재가자들이 불교에서 소외되고, 자연스럽게 재가자는 한 단계 낮은 계급으로 스님들에게 공양하고 다음에 좋은 세상에 태어나 공부해서 성불한다는 식의 의식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재가자들이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원리를 불교에서 얻지 못하면서 우리의 삶 자체를 바꾸는 불교에서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대승운동의 중심은 바로 재가불자

그런가하면 출가승단은 굉장히 치밀하게 교리를 다루고 아비달마 불교를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는 의심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고 했음에도 아비달마 불교가 세밀하게 논으로 정리함으로써 뗏목이 아니라 그 자체가 법이고 불교인 것처럼 고정됐을 때 한편으론 타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삶 자체를 행복하게 하는 불교가 아니라 대중들을 소외시키는 불교가 됐을 때 그것을 근본으로 돌이켜서 삶 자체를 바꾸고 삶을 이끌어 가는 불교가 되게 하자는 운동, 방편을 잊고 교판의 다툼을 타파하고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바로 대승입니다.

그렇다면 그 대승의 중심에 누가 있었을까요. 불교사 연구자들은 진보적 스님과 깨어있는 재가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재가자 중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던 분들이 보살로 칭해졌습니다. 따라서 보살의 원형은 재가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불교가 일어나는 비판의 중심은 출가승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가승단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불교운동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려면 기존의 잘못된 양상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유마거사가 경전의 중심이 되어 출가승단을 비판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거사가 십대제자를 야단치는 경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대승운동 초창기에 재가불자 역할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성태용 교수는

서울대학교 총불교학생회장, 한국고등교육재단 한학자양성 장학생, 유가철학 및 고전연구를 전공했으며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사)우리는선우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EBS에서 ‘주역과 21세기’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오늘에 풀어보는 동양사상』, 『주역과 21세기』, 『마음바구니에 담긴 행복』등이 있고, 「다산의 인성론」외 다수의 논문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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