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법문 명강의] 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특강 〈2〉

기자명 법보신문

불자들 ‘마음병’ 걸려 세상으로 나가지 않는다

삶의 현장에서 ‘나’ 찾지 않는 건
세상과 마음을 둘로 나눠 보는 것
적극적 행동이 활발발한 삶 동력

『유마경』은 “어느 때 부처님이 바이샬리 성내 암라팔리 숲에서 큰 비구 8천인과 함께 계셨는데 모두 아라한 이었다.(…) 또 보살이 3만 2천명으로(…).”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장자의 아들 보적이 500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일곱 가지 보배로 된 일산을 공양하자 부처님이 이를 합쳐서 하나의 일산을 만드니 일산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었다. 이에 보적이 찬탄하고, 부처님 국토의 청정함을 얻는 것을 듣기를 청했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우선 3만 2천의 보살이 함께 했다고 하는데 숫자에 얽매여 웬 보살이 이렇게 많을까 하고 의심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시대상을 반영해 경전을 편집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불자라면 정말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알게 됨으로써 이렇게 달라졌구나,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에 감사함을 느껴야 하고 그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살이 많은 이유는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이 많이 모인데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경전의 「불국품」에서 그 자리에 참석한 여러 보살들은 재가불자들의 독특한 장점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천왕이나 신중들도 많이 모였는데 이는 인도 전통문화가 불교에 들어온 것으로 보면 됩니다. 한국불교에 칠성, 산신이 다 들어오듯이 당시 인도 전통문화가 불교에 들어온 것이고 부처님은 애써서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보적 일행이 오백 일산을 바치니까 부처님이 그것을 하나의 일산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갖 세계의 모습이 장엄하게 보였습니다. 이것은 각각의 마음으로 바친 오백 일산을 하나로 모아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큰 일산 속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경전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대목마다 감동이 다릅니다. 그래서 경전은 주체적으로 읽어야지 신비화해서는 안 됩니다. 신비화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적입니다. 또 대승경전에서 찬탄하는 내용이 많다고 했는데 찬탄하는 만큼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을 담아 찬탄함으로써 찬탄의 대상을 나에게 옮겨오게 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찬탄하면서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국품」은 이어서 “또 보적아,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무상보리심을 일으키는 그 터전이 바로 보살의 청정한 국토이니, 보살이 대보리를 증득할 때 처음으로 대승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모든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날 것이다.(…)선행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그 터전이 바로 보살의 청정한 불국토이니,(…)”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마경』을 읽을 때 그저 유마거사의 이야기이고 보살의 이야기로만 읽지 말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자기를 놓고 봐야 합니다. 내 국토, 내 중생국토가 어떠한가. 즉 내 주변 중생들은 어떤 인연으로 내 국토에 와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봐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기 주변에 어떤 중생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와서 살고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바로 거기에 드러납니다. 일부에서 불교를 현실에서 보는 불교와 다른 방법으로 보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현장을 떠나 ‘나’ 찾기를 하는데, 저는 내 주변을 보면서 ‘나’를 찾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내 중생국토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는지 보면 됩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의 국토에 들어가 사는 서로의 중생입니다. 여러분들의 국토에 제가 중생이고, 제 국토에서는 여러분이 중생입니다. 내가 살아온 자취가 내 국토에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면의 또 다른 알맹이를 찾는 방식으로 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불교를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내 속에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처럼 찾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아설(無我說)’입니다. 그러한 알맹이를 부정했을 때, 나는 내 국토로 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나를 중심으로 내가 소유하고 있고 나의 부속물로 생각했던 것들, 사실은 이것이 ‘나’입니다. 그 속에 알맹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내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증명되지도 경험되지도 않은 존재를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괴로움만 낳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방식으로 나 찾기를 하는 것은 불교답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에 대한 집착과 관념을 부정하고 나면 처음에는 나를 도둑맞은 것 같기도 할 수 있으나, 사실은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홀대하고 개체화하고 소외시켰던 모든 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활동하는 내가 있고 존재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나인 것이기에 그 속에 불견(不見)의 나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 더 활발발한 삶이 됩니다.

‘나’라는 것을 중심으로 전부 개체화했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 존재 속에 고갱이처럼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소외됩니다. 반대로 그것을 놓으면 세상 모든 것이 그만큼 내가 됩니다. 그러면서 삶 자체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국토는 바로 여러분의 삶 자체입니다. 따라서 내 삶의 가까운 주변에서부터 깨달음을 구해나가야 합니다. 그동안은 보리를 구하고 중생교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을텐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바로 깨달음을 구하는 현장이어야 합니다.

‘보리를 구하지 못하고 어떻게 중생을 구하나’라고 생각하면 불교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바로 내가 이 중생들과 함께 주변 중생들을 모시고 가는 과정이 내 보리를 구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처럼 받들고 가는 과정이 바로 보살의 삶입니다. 보살정신의 근본이념은 우리의 보살행 속에서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수레의 두 바퀴라고 하지만 이 둘이 일치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유마경』 강의는 국토이야기를 할 때면 ‘내 국토는 어떠한가’, ‘유마거사와 같은 입장에 처한다면 나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나를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로 나눠서 그분들은 거룩한 분들이고 나는 중생이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둘로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들 따로 나 따로라면 불교는 결국 두 쪽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중생 모습 속에 들어 있는 부처입니다. 부처의 모습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유마거사의 자리에 내가 서봐야 하고, 보살의 자리에 내가 서봐야 하는 것입니다. 불국토, 내 국토는 어떠한가를 보고 내 국토를 맑히는 내 입장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심정국토정(心淨國土淨)’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심정국토정을 설하고 나니 사리불은 “만약 보살들 마음이 청정해지는데 따라서 불국토가 청정해진다면, 우리 세존께서 보살 수행을 하실 때 얼마나 마음이 청정치 못했기에 이 불국토가 이토록 더러움으로 오염됐을까?”하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 세계는 나의 국토, 나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관념으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각기 다른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터무니없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불교는 연기설이라고 했습니다. 연기는 상호 의존적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고 서로 의존적입니다. 내 앞에 드러나는 존재는 나와의 의존적인 관계에서 드러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사물을 대하면서도 서로 의미를 부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담장에 덩굴장미가 핀 것을 보고 시인은 아름답다고 할 것이고, 도둑은 저거 넘어가려면 긁히고 말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유마거사가 설법하는 장면에
자신 입장 대비하며 고민하고
주체적 경전 읽을 때 참 불자

 
수강생들이 올바른 삶을 강조하는 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

이처럼 나의 주관에는 어떤 관심과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 욕계 중생들은 대개 욕심을 중심으로 세계를 엮고 욕망에 따라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중심으로 엮고 있고, 어떤 의미의 연관성 속에서 세계를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감각하는 세계는 객관적인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인간은 대개 공업(共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대상을 비슷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존재를 생각하면 바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개는 색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개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릅니다. 그 대신 개라는 중생류는 가청력이 좋아서 우리가 못 듣는 것까지 잘 듣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감각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만을 보고 듣습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객관적 모습으로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릇된 이야기입니다. 세계는 나의 감각 기관에 따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면 업에 따라 같은 사물을 전혀 반대로 여기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아귀 중생은 물을 불로 본다고 합니다.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사람이 싫어하는 구린내 나는 것을 파리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객관적 세계가 있습니까. 연기설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세계는 나와 별개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인식기관에 상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업에 의해서 기세간에서 함께 사는 중생들이 함께 짓는 업이 있고, 같은 기세간에 있어도 그 중생의 업에 따라 같은 것을 다르게 느끼게 됩니다. 이 세계 중생들은 이처럼 업과 의존적으로 있습니다. 그것이 기세관이고 의미로서의 세계가 있는 것인데, 그것도 또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게 바로 나의 국토이고 불국토입니다. 그건 나의 업과 연관성 속에서 존재합니다. 내가 보는 세계는 나의 업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렇게 드러나고, 나의 주관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렇게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깨끗하고, 마음이 더러우면 국토가 더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인식주관, 내 주관과의 연관성 속에서 세계가 그렇게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심정국토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심정국토정 때문에 마음병 걸린 불자가 많습니다. 세계가 아무리 더러워도 내 마음 잘 닦고 나면 국토는 깨끗해 질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으면서 세상의 모든 일을 마음에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세상으로 나가질 않습니다. 마음을 고치기 위해 마음만 잡고 있다면 그 마음은 세상과 둘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과 세상이 둘이 아닌데 왜 마음만 고친다고 합니까. 그렇다면 주변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내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일과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당연히 하나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과 세상이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들 마음에서만 해결하려고 합니까. 불교가 마음 중심으로만 가면 전체성이 훼손됩니다.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세상을 고치는데 나서야 합니다. 심정국토정은 ‘내가 어떤 의미연관성에서 세상을 엮어내고 있는가’, ‘나는 어떤 욕망과 관심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대개 모든 것을 마음에 갖다 놓으려고 하다 보니 세상일에 대처를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저 마음에 달린 것이다’ 하고 맙니다. 이것은 사실을 사실로 보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입니다. ‘놓는다’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에 전생의 업을 끌어들이면서 포기하지 말고, 어떤 업을 지어서 이것을 바꿔나갈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국토의 모습, 내가 느끼는 국토가 이렇다고 하면 그게 바로 내 마음의 투영입니다. 어떤 의미연관으로, 또는 어떤 업식과의 연관성 속에서 내 세계가 이렇게 드러나는가를 거꾸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부처님이 발가락으로 누르시니 장엄한 세계가 드러났다”고 했는데, 우리가 위대한 인격을 만나면 이러한 체험이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가끔 위대한 인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열리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볼 수 있고, 한 순간일지라도 환희심이 나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마음에 동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큰 복 가운데 하나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인격을 가진 스승을 만나면 잠시라도 그 세계에 동참할 수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잊을 수는 있어도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불국품」에 이어 「방편품」이 설해집니다. 「방편품」은 유마거사가 오묘한 방편의 힘으로 자기 몸에 병을 보이고, 병을 통해 몸의 무상함과 덧없음 그리고 집착할 바 없음을 말한 대목입니다.

“마을의 모든 집회에 나가서도 늘 최고의 설법자로 존경받았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이든 사람과도 중년층과도 젊은이들과도 교류했지만 늘 법과의 조화 속에서 설법했다. 세간의 재물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세속의 이익에 대해 익힌 바가 있었다.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저자에 나가 노닐었으며,(…) 욕망의 사악함을 보여주기 위해 음란한 곳에도 들어갔다. 술을 마셔도 정념정지를 잃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흥가에서 노닐었다.”

“유마힐은 이같은 자유자재한 방편으로 몸에 병을 나타내었다. 그러자 국왕, 대신, 장자, 거사, 브라흐마나와 왕자들과 나머지 관속들 수천 명이 모두 가서 문병을 하였다. 유마힐은 그들이 도착하자 병을 이유로 널리 법을 설하였다.(…)”

여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는 계율이라는 방편, 승단 중심의 계율에 매여서 그것을 어기면 큰일 나는 불교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마를 찬탄하면서 술도 마시고 환락가도 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에 대해서는 일자일구도 고칠 수 없다는 스님들 중심의 불교에 엄청난 폭탄이었습니다. 요즘에는 계율 지키는 스님이 별로 없어서 잘 지키는 스님이 유명해진다고 하는데, 스님들이 계율을 가볍게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마거사의 방편은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부처님은 “내 설법도 뗏목과 같다”고 했습니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 자체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입니다. 그러니 손가락에 매달려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방편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대로 따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방편설과 붙어 다니는 것이 대기설(對機說)입니다. 여기서 기(機)는 조건적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는 장소와 대중 등 조건이 있습니다. 즉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달랐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방편이 지향하는 것을 파악하고 우리 현실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요즘들어 대승불교가 엉망이 되니까 초기불교를 갖다가 쓰자고 하는데, 부처님 말씀에서 일자일구도 고치지 않고 전해져 온 경전은 없습니다. 남방이건 북방이건 그 방편이 가르치는 진리를 고민하고, 우리의 처지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와서 보라고 했지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점은 그 방편을 현실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유마거사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불교가 대기설이라면 입장과 처지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온통 수행에 쏟아야 한다는 것은 모든 에너지를 수행에만 집중해야할 특수집단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출가승단 중심으로 흘러가면 그것만이 불교처럼 됩니다. 그렇게 되니 재가자들이 이생에서는 스님 공양하고 다음 생에나 수행자가 되어서 성불한다고 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포기하면 영원히 포기는 것입니다.

업은 버릇입니다. 업을 지으면 다음에 이게 온다가 아니라, 내가 하는 순간에 그게 업이고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내생에 성불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이 업이 됩니다. 불교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부터 내가 부처되는 길로 가야하고 그것을 통해 삶이 행복해지고 나날이 복돼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