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읽고 다른 이에게 설하는 것이 최상의 공덕
금강경 읽고 다른 이에게 설하는 것이 최상의 공덕
  • 법보신문
  • 승인 2010.11.02 16: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을 칠보로 가득 채워도 끝내는 공덕 소멸
이익 위해 경 설하면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져
육근으로 바라밀을 닦는 것이 32상의 바른 뜻

 

 

인도 바라나시 갠지스강의 일몰. 경전 속 항하가 바로 이 곳이다.

 

 

11. 무위법의 뛰어난 복덕(無爲福勝分)

 

“수보리여! 항하의 모래 수만큼 항하가 있다면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모든 항하의 모래 수는 진정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항하들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물며 그것이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여! 내가 지금 진실한 말로 그대에게 말한다. 선남자 선여인이 그 항하의 모래 수만큼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많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준다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뛰어나다.”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得福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佛告須菩提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우리가 부처님을 공양하고 예배하는 까닭에는 개인적인 기원이나 염원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이웃이나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더 큰 복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항하는 갠지스강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죽으면 이곳에서 화장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곳에서는 우리처럼 나무를 많이 쌓아놓고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적은 양의 나무를 쌓아 놓고 하다 보니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가면 물위에 타다 남은 시신들이 떠다닙니다.

이 강은 인도 사람들에게 어머니 강으로 불릴 만큼 소중한 곳입니다. 특히 강기슭에는 엄청난 양의 모래들이 펼쳐져 있는데, 이것을 경전에서는 항하의 모래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삼천대천세계가 있는데 그런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한 것보다 금강경을 잘 공부해서 이해하고 실천해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 더 큰 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칠보로 보시한다는 의미는 삼계에 걸쳐 부귀의 과보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부귀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운다하더라도 결국은 다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루(有漏)의 복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승경전을 강설하면 듣는 이들로 하여금 큰 지혜를 내게 해 무상의 도를 성취하게 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고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전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서 부처님의 뜻대로 살게 한다면 칠보를 보시하는 복덕보다 훨씬 뛰어난 복덕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어떤 것을 요구해서 이것을 이루거나 성취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말고 내 스스로 눈을 맑히고 밝게 깨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2. 올바른 가르침의 존중(尊重正敎分)

“또한 수보리여!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설해지는 곳곳마다 어디든지 모든 세상의 천신, 인간,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할 부처님의 탑묘임을 알아야 한다. 하물며 이 경 전체를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 사람이랴!
수보리여! 이 사람은 가장 높고 가장 경이로운 법을 성취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과 존경받는 제자가 계시는 곳이다.”

(復次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是人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 卽爲有佛若尊重弟子)

앞에서는 금강경을 읽고 잘 이해하라고 말씀하신데 이어 여기서는 금강경을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과 같이 공경하라고 일러주고 계십니다. 이 경전이 있는 곳에 만약 사람이 있거든 곧 이 경을 말하고 또 생각과 생각 항상 무념(無念)의 마음과 무소득(無所得)의 마음을 실천해서 능소(能所)의 마음을 갖지 말고 설법을 해야 합니다.

너와 나라는 구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라는 분별이 없이 설법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갖가지 다양한 마음을 모두 여의고 무소득심에 의지를 한다고 하면은 몸속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남으로 해서 육식(六識)을 발생시킵니다. 눈으로 봄으로써 좋다 나쁘다는 구별이 생기고 귀로 들음으로써 분별이 생깁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에 전혀 얻는 바가 없는 무소득심을 유지한다고 하면 이 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말하기를 부처님의 탑묘(塔墓)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무소득심으로 이 경을 설하는 자는 있다면 천룡팔부가 감득해서 와서 듣게 됩니다. 모든 생명들이 와서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뭇 생명이라고 하니, 저 뒷산에 있는 노루까지 와서 듣는다는 식의 그런 외부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내 마음의 분별이 다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청정치 못하여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이 경을 설하는 사람은 반드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경전을 설한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청정한 마음으로 이 경을 설하면 모든 사람들이 미망을 제거함으로써 본래의 불성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항상 진실을 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천신, 아수라, 사람, 사람 같으면서도 사람이 아닌 존재까지 모두 와서 이 경을 수지한 사람을 공양하게 될 것입니다.

13. 이 경을 수지하는 방법(如法受持分)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제목으로 너희들은 받들어 지녀야 한다. 그것은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까닭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법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천대천세계를 이루고 있는 티끌이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여래는 티끌들을 티끌이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티끌이라 말한다. 여래는 세계를 세계가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세계라고 말한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고 볼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은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고 설하셨으므로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목숨을 보시한다고 하자.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 많으리라.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不也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 설하신 이유는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로 생멸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니 생멸의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곧 피안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마음에 무언가를 얻으려는 소득심이 있다고 한다면 피안에 이르지 못할 것이고 마음에 한 가지 법도 얻을 것이 없다면 곧 피안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이 피안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입으로 금강경을 읽고 마음으로 행하고 몸으로는 봉사를 하는 것이 바로 무소득심을 실천해 피안에 이르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여래가 설법한 것이 마음에 얻을 것이 있느냐 없느냐하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여래의 설법이 마음에 얻는 것이 없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소득, 즉 얻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의 설법이, 설법이 아니기 때문에 설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철저하게 깨져야만 실체를 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을 설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생멸의 이치를 깨달아 최상의 도를 성취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 서른두 가지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서른두 가지 맑고 깨끗한 행위입니다. 안이비설신을 오근(五根)이라 합니다. 이 오근 하나하나가 육바라밀을 닦고, 의근(意根)으로 무상(無相), 무위(無爲)를 닦으면 더해서 서른두 가지의 청정한 행이 됩니다. 눈으로 보시하고 지계하고 인욕하고, 귀로 보시하고 지계하고 인욕하고 이런 식입니다.

서른두 가지의 이런 청정한 행을 닦으면 성불하게 됩니다. 반대로 서른두 가지의 청정한 행을 닦지 않으면 결코 성불치 못하겠지요. 여래의 서른두 가지 거룩한 모습만을 좋아하고 스스로 서른두 가지의 청정한 행을 닦지 않으면 끝내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의 모습을 32상 80종호라 표현하는데, 모습이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가 없음은 이미 밝혔습니다.

우리가 가진 감각기관들을 잘 사용하는 것이 32상, 즉 서른두 가지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화엄경에 웃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으로는 항상 웃어 남들을 편안하게 하고, 좋은 말로 상대편을 즐겁게 하고,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들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보시입니다. 청정한 실천입니다. 성불을 위해서는 육바라밀을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이외에 결코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

종광 스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