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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 스님의 茶담法담] 90. 내기

기자명 법보신문

좋고 나쁨은 스스로 부연한 가치일 뿐

한참 전 일이다. 학생들 몇 명의 태우고 수련회 행사에 참석하는 중이었다. 서울에서 차를 몰아 경주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나름대로 일찍 출발한다고 하긴 했는데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조금씩 차의 속도는 느려지고 있었다. 아이들이라 그런지 신나는 음악도 틀고, 출발하자마자 간식이 연신 입에서 떠나 있지 않았다.

오산을 지나자 차의 속도는 조금 회복되긴 했어도 아직 제 속도로 달리지는 못했다. 차의 속도가 느려지자 차안의 손님들의 몸과 마음도 같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쌩쌩 달릴 때는 몰랐는데 차가 더디 움직이니까 처음 출발했을 때의 생생함은 사라지고 이리 저리 몸을 뒤틀고 멍하니 지나치는 옆의 다른 차들을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뒤에 타고 있던 학생 중 한명이 갑자기 옆의 친구에게 내기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어떤 내긴가 하면 0부터 9까지 숫자 중에서 하나를 택하고 지나가는 자동차 번호의 끝자리가 자신이 선택한 번호와 일치하면 1점씩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그래서 도착했을 때 가장 점수가 높은 사람이 내기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심심한데 그냥 한 번 해보자고 분위기를 더 뛰어주었다. 각자 자신이 좋아 하는 번호를 정한다고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누군가 서로 똑같은 번호를 선택을 했고, 양보하지 않아서 잠시 실랑이를 벌인 후에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지금부터다”라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무섭게 시끄러웠던 차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들 창밖의 지나가는 다른 차들을 눈이 빠지게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순간 탄식과 함성이 여기저기서 연달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선택한 번호의 차가 지나가는 학생은 신나하고, 아쉽게 한끝 차이로 번호가 다른 친구들은 아쉬움을 토해내었다. 방금 전까지 초점 없이 그냥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눈에 힘을 주고 열심히 지나가는 차의 꽁무니를 살피기 바빴다. 우리 옆을 지나가고 있는 차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지나가는 차들이 아니었다.

그 게임은 휴게소에 들를 때까지 생각 외로 진지하게 진행되었는데 덕분에 지루함도 잊고 나름 재미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운전을 하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상황인데 어떻게 저렇게 마음 상태가 변할 수 있을까? 내기를 했을 뿐인데. 우리의 마음 상태라는 것이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 같아도 결국 그 상황이나 대상에 부여하고 있는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구나. 그럼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야 잘 사는 길일까?’

우리는 무엇을 보거나 듣는 순간 곧바로 반응과 의도가 일어난다. 그냥 그렇게 주욱 살아왔고, 또 그렇게 일어나는 반응과 의도가 결국 우리 인생의 내용이 된다. 일어나는 반응과 의도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대상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느냐에 따라 즉,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대상에 대한 반응과 의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러면서 더욱 유익한 반응과 의도를 일으키려면 우선 그 대상을 올바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대상을 올바로 잘 보고 아는 길, 그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이다. 

지장 스님 초의명상선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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