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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특강 〈4〉

기자명 법보신문

자비없이 깨달음만 좇는 건 ‘깨달음 병’

우리의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달려나가는 철학이나 종교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내려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세계로 이끌어주는 측면이 함께 있는 조화와 균형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승불교 출현 이전의 소승불교는 승단 중심으로만 운영돼 초세간적인, 그래서 일상을 포기하는 냄새가 너무 진하게 났습니다.

이에 반해 대승은 범과 성을 함께 돌아보며 세간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일상적인 것을 살려서 그것을 열반으로 향하게 하는 구조, 이것이 『유마경』의 불이(不二)의 틀에서는 아주 소중합니다. 어떠한 대상이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나쁘게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보는 눈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어 그렇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눈으로 보면 나쁘게 보이던 사람도 착한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놈 나쁜 놈이라고 보는 순간 내가 그 존재 대상을 그만큼 규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규정에 따라 나에게 반응해 옵니다. 그렇게 되면 또 내 반응이 증폭되고, 이렇게 끊임없이 둘이 되어서 갈등하는 구조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재가자들에게는 커다란 긍정의 눈, 열반을 지향하지만 세간사를 버리지 않는 눈이 필요합니다.

불교는 정신적인 두뇌 회로구조를 바꾸는 것이고, 그것을 바꾸지 못하면 영원히 고통의 증폭이 있을 뿐입니다. 십대제자가 유마거사에게 두들겨 맞는 대목을 보면 범과 성, 출세간과 세간, 생사와 열반 이런 것들을 모두 둘로 보기 때문입니다. 불이의 눈은 금 긋기를 허문 것입니다. 내가 긍정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긍정적으로 나에게 규정이 되고 또 그렇게 반응이 옵니다. 커다란 긍정이 전제가 되느냐 부정이 전제가 되느냐에 따라 세상은 180도 달라집니다.

세상이 객관적이라는 믿음은 불교에 입문하면서부터 버려야 합니다. 세계는 나와의 상호의존 관계에서 그렇게 드러날 뿐입니다.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믿으면서 번뇌가 시작됩니다. 그때는 어떠한 재료를 집어넣어도 나쁜 것만 나오게 됩니다.

유마거사는 출가자에게 ‘당신에게 공양한 사람이 천상에 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출가자의 그 생각은 큰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둘로 나누는 상, 그것을 깨지 않으면, 즉 그런 상을 갖고 있는 한 공양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 유마거사의 가르침입니다. 오늘날의 스님들은 안 그렇습니까. 요즘 스님들은 스님에 대해 불리한 이야기만 나와도 발끈해서 공격을 합니다. 스님들이 자신들을 특권계층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적 삶에서 보리 구해야

그러면 『유마경』은 불이라고 하면서 스님들을 왜 그렇게 무섭게 비판할까요. 그것은 사이비(似而非)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라고 표방하면서 엉뚱한 짓 하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불교라고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하게 되면 근본에 문제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엄하게 비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불교 내에서 부처님이 지향한 바를 올바르게 회복하자는 것이 『유마경』의 대승입니다.

우리가 흔히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말하면서 보리를 구한 이후에 중생교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둘로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 보리를 구해야 합니다.

사리불이 조용한 곳에서 참선을 하다가 유마에게 한방 맞은 것은 시끄러운 것과 조용한 것을 나누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마음이 시끄러운데 어디 가서 조용한 것을 찾는가 하는 것이지요. 「제자품」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보살품」에서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이제 「문수사리문질품」으로 넘어가면 유마거사가 문수사리보살이 온다는 것을 알고 병실을 비우고 홀로 앉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병이 왜 생겼는가’를 묻습니다. 이때 유마거사가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고 합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중생이 아프기에 보살도 아프다”는 말입니다. 느낌이 오십니까. 중생이 아픈데 왜 내가 아프다고 했을까. 이때 유마가 동체대비를 말하면서 “장자가 자기의 외아들이 아프면 자기도 아픈 것과 같다”고 합니다. 자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식이 아파서 부모가 아픈 것이나, 중생이 아파서 보살이 아픈 것이나 같은 차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장애가 생겨서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내 자식만 있는 것입니다. 아집, 아상, 아소, 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자아에 엮인 것만 한정해서 봅니다. 그것은 애견입니다. 대비는 대비인데 애견에 묶인 대비이고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애견대비와 보살의 자비는 뿌리가 둘일까요. 마음이 따로 있을까요. 아닙니다. 둘로 보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 회로구조가 잘못돼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나를 넘어서는 것은 남이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하고 남이 좋아할 때 같이 좋아할 수 있을 때 입니다. 나라는 자아관념을 중심으로 해서 자비가 발현되기 때문에 장애도 드러나고 번뇌도 드러나고 괴로움이라는 결과도 창출되지만, 근원적 사랑의 마음 자체가 보살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출발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자아관념이라는 회로를 통해 나오면서 비뚤어진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장 비뚤어진 구조를 낳게 하는 것이 자아관념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구조를 통과했다면 그 마음은 왜곡되고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자식에 대한 마음에서 나의 보살됨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발현되도록 회로를 고쳐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긍정적 시각으로 보면 번뇌의 모든 상을 되돌려서 보살의 마음으로 회향시킬 수 있습니다. 저것을 없애야 할 것, 나쁜 것이라고 하는 순간 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일상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한번 금을 긋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작업이 불교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하면 불교를 아무리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불이를 바탕으로 하는 구조를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보살이 아픈 원인은 보살의 대비심에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병은 개인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해결도 개인으로만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물이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데 그것은 회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집을 중심으로 회로를 작동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오게 됩니다. 여기서 불교적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진여회로가 나오는 것입니다. 부사의업이라는 회로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둘이 아님을 바탕으로 해서 일으키는 업을 짓는 구조를 스스로 몸에 익히는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부처와 보살들은 진여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을 마시고 독을 양산하는 구조를 바꿔서 온전하게 그 자신이 계속 세상을 바꿔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구조를 가져야 하고, 이것이 곧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적 해탈은 깨달아서 냉랭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손등과 손바닥이 있는 것처럼 깨달음의 이면이 바로 자비입니다. 생명이라는 모든 존재에 근본적으로 있는 것이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을 통해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한량없는 자비가 충만해집니다. 자비의 완성이 지혜의 완성이기 때문에 깨달은 분들은 그 순간에 바로 충만한 자비와 하나가 됩니다. 제한되지 않은 자비, 이것이 바로 불교적 깨달음 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픈 것입니다.

자식 생각한 마음서 보살됨 찾길

그런데 한국불교에는 자비와 지혜의 종교에서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깨달음만 강조되어 깨달음 병에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목석같은 깨달음만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법력이니 도력이니 하고 말하는데, 수행자는 자비심과 지혜의 눈이 얼마나 드러나는가에 따라 달리 보여지는 것입니다. 법력과 도력을 찾으며 신통력 욕심을 내는 것은 재물 욕심과 근원구조가 같습니다.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문수사리보살은 또 유마거사에게 ‘어떤 방에 누워있고, 누가 병 수발을 드는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유마거사는 ‘세상이 공(空)하기 때문에 방이 비었고, 외도와 마구니들까지 모두 내 시종’이라고 합니다. 유마거사는 여기서 내편과 네 편으로 가르는 것을 지적하고, 외도와 마구니가 다 내 시종이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스스로 ‘나의 삶은 친한 자와 나를 돕는 자를 어디서 뽑아내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문수사리보살은 이어 ‘아픈 보살은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아픈 이들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를 물어야 합니다.

주변에서 보면 아프고 난 이후 한 단계 성장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더욱 움츠러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장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위로를 해야 하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달래야 합니다. 아프면서 오히려 더욱 대범해지고 그러면서도 몸을 넘어서는 관점을 갖고 건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몸의 덧없음을 알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마거사가 하는 말을 나에게 적용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근본적인 병이니 그것을 고치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는 병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이 앓고 있는 병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고, 나와 나의 것이라는 데서 벗어나는 것이 「문수사리문질품」의 결론입니다. 그 구조를 혁파해서 정상적인 구조로 되돌리는 것이 바로 나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요, 남의 병을 위로하는 길이고, 또한 내 병을 조복 받는 길이며 남의 병을 낫게 해 주는 길입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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