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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삼계의 모든 마음이 꿈과 같아 분별할 수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깨달음 자체는 돈과 점 모두 떠나
분별 끊어진 곳에서 지혜는 드러나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법계에 충만해
기댈 것도 머무를 것도 올 것도 없다

41. 제석천에 올라가는 것

 
유숙 作. 오수삼매도.

華嚴經云 不離覺樹 而昇釋天者 疏釋 云. 佛得菩提 智無不周 體無不在 無依無住 無去無來. 然以自在卽體之應 應隨體變. 緣感前後 有住有昇 閻浮有感 見在道樹 天宮有感 見昇天上 非移覺樹之佛而昇天宮. 故云 不離覺樹 而昇釋殿.

『화엄경』에서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않고 제석천에 올라간다.”고 말하는 내용을 『화엄경소』에서 풀이하여 말하였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지혜와 그 바탕은 법계에 두루 하여 기댈 것도 머무를 것도 없으며 가고 올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바탕에서 자유자재로 인연에 감응하여 그 인연의 변화에 따라간다. 인연에 감응하여 앞뒤에 머물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니, 사바세계의 인연에 감응하면 보리수 밑에 있는 부처님을 보고 천궁의 인연에 감응하면 천상에 올라가는 부처님을 보게 되지만, 보리수 밑에 계시는 부처님이 자리를 바꾸어 천궁에 올라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않고 제석천의 궁전에 올라간다.”라고 한다.

法慧 偈云 佛子汝應觀 如來自在力 一切閻浮提 皆言佛在中 此不離也 我等今見佛 住於須彌頂 此而昇也.
不思議經 云. 若我分別 佛卽現前 若無分別 都無所見. 想能作佛 離想無有. 如是三界 一切諸法 皆不離心.

법혜 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불자여 그대들은 보아야 한다
여래께서 갖고 있는 자재한 힘을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 모든 세상
그 가운데 부처님이 계신다 하네.”
이는 부처님이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않은 이치를 말한 것이다.
또 “저희들이 이제 부처님을 뵙게 되니 수미산의 꼭대기에 머물러 계신다.”고 말한 것은 부처님이 제석천에 올라갔다는 이치를 말한 것이다.
『부사의경』에서는 “만약 내가 분별하면 부처님이 앞에 있고 분별이 없으면 볼 수 있는 어떤 부처님도 없다. 생각이 부처님을 만드는 것이지 생각을 떠난 자리에 부처님은 없다. 이와 같이 삼계의 모든 법은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강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지니 온갖 분별이 자신의 생각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니 어떤 관념이나 허상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그 근본 바탕을 보아야 한다. 그 근본 바탕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근본과 하나가 되어 ‘나’가 사라질 때 주객이 사라지고 온갖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다. 모든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 곳에서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드러나고 팔만 사천 법문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된다.
보리수(菩提樹)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인연으로 이 보리수를 ‘깨달음과 인연이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각수(覺樹)’라 부르기도 하고, 또 깨달음을 얻어 ‘도를 통한 인연이 있는 나무’라는 의미로 ‘도수(道樹)’라 부르기도 한다.

43. 어떤 설이든 모두 다 방편

但悟本體五現量識 一切萬行皆悉具足 卽是菩提. 如涅槃經云 一切衆生 本來成佛 無漏智性 本自具足. 又 頓從漸得名 俱稱方便. 古釋云 若據說頓 亦是方便 若云 漸頓俱是 亦謗於佛 俱不是 亦謗於佛 是以本覺體上 離頓漸離言說 何處有頓漸名字. 第六識動有分別 不動卽等周法界. 五現量識等 一一根皆遍法界 眼見色時 色不可得 元來等法界.

다만 본바탕에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다섯 가지 현량식(現量識)을 깨달으면 온갖 만행이 다 구족하니 곧 깨달음이다. 이는 『열반경』에서 “모든 중생은 본래 성불이어 무루지(無漏智)의 성품을 본디 다 갖추고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또 돈(頓)이라는 명칭도 점(漸)을 상대해 붙여진 이름이니 모두 다 방편이다. 옛날에 이를 풀이하여 “돈(頓)을 설한 것도 방편이다. 만약 돈(頓)과 점(漸)이 ‘모두 옳다’ 주장하여도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요, ‘모두 옳지 않다’ 주장하여도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본디 깨달음 그 자체는 돈(頓)과 점(漸)을 떠나 온갖 언설을 벗어나 있는 것이니 어느 곳에 돈(頓)과 점(漸)이란 명칭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제육식이 움직이면 분별이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곧 법계에 평등이어 두루 하다. 다섯 가지 현량식도 평등이어 하나하나의 근(根)이 모두 법계에 두루 하니, 눈으로 색을 볼 때 눈 그 자체가 색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는 법계가 본래 평등하기 때문이다.

法華經云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卽知 世間一切諸相 本來常住 何行位能知. 唯佛於道場知已 導師方便說 爲衆生迷不知故說. 若知不俟更說 方知有說皆屬方便.

『법화경』에서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르니 세간의 모습이 상주한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곧 세간의 모든 모습이 본래 상주하고 있음을 알 것이니, 수행의 어떤 위치에서 이 도리를 알 수 있겠는가. 오직 도량에 계신 부처님만 알고 이 도리를 방편으로 설하니, 중생이 미혹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하는 것이다. 만약 방편설을 기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바야흐로 어떤 설이든 모두 다 방편에 속함을 알 것이다.

강설) 육체에 붙어 있는 눈 귀 코 혀 몸 다섯 가지 기관에 의지하여 일으키는 마음작용을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한다. 제육식은 의근으로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및 모든 대상을 판단하는 중생의 마음 작용을 말한다. 제육식은 자신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헤아려 판단할 수 있다 하여 의식(意識)이라 한다. 이를 또 눈앞의 경계를 분별할 수 있다는 의미로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 말하기도 하고, 죽을 때 이 식은 몸과 분리되어 떠난다고 하여 분단사식(分段死識)이라 하기도 한다. 수행을 통하여 이런 알음알이 식識은 부처님의 지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전오식(前五識)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제육식(第六識)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제칠식(第七識)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 그리고 제팔식(第八識)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환된다.
부처님의 지혜로 드러나는 현량(現量)은 추론이나 분별이 없이 직관으로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말한다.

44. 꿈속에서 정사를 치르게 되어

佛在時 三人爲伯仲 聞毘耶離國婬女人 名菴羅婆利 舍衛國有婬女人 名須曼那 王舍城婬女人 名憂鉢羅槃那. 此三人各各聞 人讚三女人 端正無比 晝夜專念 心著不捨 便於夢中 夢與從事. 覺已心念 彼女不來 我亦不往 而婬事得辦 因是而悟 一切諸法 皆如是耶. 於是 往到跋陀婆羅菩薩所 問是事. 跋陀婆羅答言 諸法實爾 皆從念生. 如是種種 爲此三人 方便巧說諸法空 是時 三人卽得阿鞞跋致. 是知 人不來往 而樂事宛然. 當如是念佛.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엇비슷한 사내 세 사람이 비야리국의 ‘암라파리’ 사위국의 ‘수만나’ 왕사성의 ‘우발라반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사내들은 저마다 세상 사람들이 ‘세 나라의 여인들이 비할 데 없이 예쁘며 단정하다’고 찬탄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 가득 밤낮으로 그리워하다가 꿈속에서 정사(情事)를 치르게 되었다. 잠을 깨자 ‘그녀들이 온 것도 아니요 내가 간 것도 아닌데 정사가 이루어졌음’을 생각하고, 이로 인하여 모든 법이 다 이와 같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발타파라 보살을 찾아가 이 일을 물으니, 그 분께서는 “모든 법이 실로 그와 같아 모든 것이 생각에서 생겨난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온갖 사례를 들어 세 사람을 위하여 ‘모든 법이 공(空)’이라는 것을 방편으로 잘 설명하였다. 이때 세 사람은 곧 부처님 공부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경계를 얻었다. 이것으로 사람들이 오고 가지 않았지만 꿈속에서는 즐거운 일이 분명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이 공임을 알고 염불(念佛)해야 할 것이다.

강설) 꿈속에서 보이는 모든 일처럼 이와 같이 보이는 것이 실제 있다면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의 두 가지 모습이 있게 되지만 그 꿈속에는 실로 나눌 두 가지 법이 없다. 삼계의 모든 마음이 다 이 꿈과 같이 마음을 떠나 따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다.”고 한다. 자기 마음에서 스스로를 볼 수 없는 것이 마치 칼이나 손가락이 칼과 손가락 자기 자신을 스스로 베지 못하고 가리키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미 볼 수 있는 다른 대상이 없으며 또한 스스로를 볼 수도 없어 소견(所見)이 없는 까닭에 능견(能見)이 성립하지 않는다. 능(能)·소(所) 두 가지 모습이 모두 얻을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얻을 수 있는 어떤 모습도 없다.”고 한다. 이것이 공(空)이다.

아비발치(阿跋致)는 범어 avinivartanīa의 음역이고 뜻을 번역하면 불퇴전(不退轉)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견고하여 이 길에서 절대 물러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원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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