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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특강 〈5〉

기자명 법보신문

선입견 벗으려는 태도로 사는 게 불자의 삶

『유마경』은 출가중심주의 또는 초세간주의에 의해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우리의 일상적 삶을 복권시키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졌던 삶의 세계를 복권시키는 것이기에 이것을 ‘복권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성(空性)을 관찰하기를 즐기면서도 온갖 공덕을 구하니, 이를 보살행이라 합니다. 무작(無作)의 영역에 노닐기를 즐기면서도 늘 모든 선근이 끊이지 않는 영역을 지어가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온갖 법이 생멸상(生滅相)이 없다는 것을 관찰하기를 즐기면서도 상호로써 그 몸을 장엄하고 갖가지 불사를 성취하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마경』의 대승불교 선언입니다. 우리 삶의 세계를 다시 복권시키는 이 선언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그 이전까지 출가중심의 불교에서 얼마나 우리들 삶의 세계를 덧없는 것으로 말하고, 싫어해야 하는 것으로 말했습니까. 이것을 바꾼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여성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생멸상 나타내기를 꺼리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생멸상 속에서 진여성을 지켜나가고, 진여성을 바탕으로 해서 생멸의 세계를 일으켜 나가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출세간적 정신을 바탕으로 세간사를 끊임없이 일으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얽매여서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구하지 못하고 어떻게 중생을 제도하느냐는 생각이 결국은 두 쪽이 나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이제 거꾸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구보리 상화중생’하자는 말입니다. 우리들 삶에서 보리를 구하고 중생과 함께 가자는 것이지요. 보리를 구하여 그것으로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평생 보리만 구하다가 끝이 납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장이 수행의 장이 되지 않으면 이런 불교는 이원적인 종교가 되기에 딱 좋습니다.

그렇다면 유마거사가 말한 대승불교 정신이 한국불교에 얼마나 드러나고 있는지 한번 봅시다. 여러분은 삶을 얼마나 불교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삶과 불교가 둘이 아니라고 했는데, 여전히 불자 대부분은 삶과 불교가 둘입니다. 수행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수행병에 걸려서 모조리 다 걷어치우고 수행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깨닫지 못한 문에서 무엇을 지어나가면 다 잘못될지 모르기 때문에 깨닫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깨달은 것과 깨닫지 않은 것을 두 쪽으로 구분해놓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눠놓으면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깨닫지 못한 속에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사고가 바탕이 되어야 깨달음이 오는 것이지, 깨달음의 세계와 깨닫지 못한 세계를 둘로 나눠 놓으면 우리가 거기를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그곳으로 가서 살 것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 삶에서 불교가 나를 이끌어야 합니다. 유마거사의 설법에 의해 많은 대중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 큰 지혜를 맛보는 것으로 「문수사리문질품」이 끝나고, 그 다음에 이제 「부사의품」으로 들어갑니다.

사리불이 유마거사의 방에 들어와서는 어디에 앉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앉을 자리를 구하러 왔는가, 법을 구하러 왔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자리를 마련해 수많은 대중이 앉도록 하고는 불가사의한 해탈의 세계를 이야기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법을 구하는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유마경』에서는 『반야심경』에서 압축적으로 말한 내용을 풀어서 이야기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승은 부처님 정신 회복하자는 운동

“사리불이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오온을 구하지 않으며 십팔계를 구하지 않으며…”하는 대목은,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계 내지무의식계…”와 다른 각도에서 말했을 뿐 같은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고통을 알기를 구하지 않고, 고통의 원인을 끊기를 구하지 않고, 고통의 소멸을 성취하기를 구하지 않고, 고통이 소멸하는 길을 닦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쓸데없는 논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고통을 알고, 그 고통의 원인을 끊고 고통의 소멸을 성취하고 고통을 소멸하는 길을 닦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희론이지 법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하는 대목은, 『반야심경』의 “무고집멸도”에 대한 부연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을 구하는 자들은 생에서 구하지도 않고 멸에서 구하지도 않습니다.…”하는 대목은, “불생불멸 불구부정”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없다’고 한 것을, 여기서는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법을 구하고 싶다면 어떤 법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반야심경』의 ‘앎도 없고 얻음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반야심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이것을 보면서 이해하면 됩니다. 『반야심경』을 너무 어렵게 읽으려고 하는데, 『반야심경』은 법집에 대한 부정입니다. 법집을 깨뜨리고 반야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집을 깨뜨리라고 하는 것은 소승에서 말한 법의 체계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리고 ‘공’은 선입견이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선입견 없는 마음에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을 공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법을 부정할까요. 경전은 부처님이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설한 대기설입니다. 그것을 일률적으로 체계화하고 정리하면서 몇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무상, 무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등의 물음인데, 그것을 체계화 하다 보니 희한한 학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상세계가 있고 진리의 세계가 따로 있게 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법을 규명하기 위해 부파불교가 매진을 하게 되고, 엄청난 논서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 진리라고 하면 왜 그렇게 많은 부파가 나와야 합니까. 그것은 모두 다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통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처님은 ‘방편’이라고 했습니다. 방편이라고 한 것을 그대로 진리라고 하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어긋나게 됩니다.

‘법’이라는 색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세상의 실상을 왜곡하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없다’는 것은 바로 법집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마경』에서도 법집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반야는 초능력적 지혜가 아니라, 선입견을 벗어버린 그 마음의 눈에 드러나는 지혜입니다.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틀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것을 깨고 마음에 드러나는 지혜가 바로 반야입니다.

‘나’ 중심으로 대상화하면 괴로울 뿐

『유마경』에서 ‘법을 구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법이라는 것이 그대로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영원히 그대는 법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마음의 선입견을 없애라고 한 『반야심경』의 근본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안주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안주하기를 구하는 마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끊임없이 근본을 돌아보고 선입견을 벗으려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불자입니다. 깨달음이나 완성된 존재가 되는 것은 지혜와 자비가 완전할 때입니다. 우리는 지혜에 너무 치우쳐 있는데, 모든 중생에 대한 온전한 사랑으로 완성된 것이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즉 지혜의 완성이자 자비의 완성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깨달은 존재는 충만한 자비와 온전한 지혜를 함께 갖춘 존재여야 합니다. 근본 종지에 맞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는 것, 여기까지가 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좁은 방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간다는 말을 했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인데, 불가사의란 생각할 수도 따질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해탈을 불가사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부사의업을 말했는데, 불가사의한 업과 해탈은 같은 틀 속에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여의 본성은 차별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그러한 진여를 바탕으로 업을 지을 때 부사의 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해탈은 무엇일까요.

진여문은 겨자씨보다 더 작아서 풀 한포기 가꿀 땅이 없고, 송곳조차 꽂을 자리가 없습니다. 불가사의 한 해탈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해탈을 말합니다. 절대 진여의 세계에서 보면 모든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법석이 마련된 유마거사의 방은 둘이 아닌 법문에 도달하는 방이고, 진여의 방입니다. 진여청정의 방이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도 넉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진여성을 바탕으로 하면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는 소식에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어떠한 세계를 창출하고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을 수 있습니다.

불교의 정신은 늘 깨어있음입니다. 부처님 수행법의 특징은 그 이전의 요가적 삼매수행과는 다릅니다. 지관겸수(止觀兼修)입니다. 삼매와 깨어있음이 함께 있는 수행입니다. 십리 밖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완전히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수행이 불교수행입니다. 관념과, 대상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는 소식이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도 그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괴롭다, 괴롭지 않다는 것도 나를 중심으로 대상화 객관화 할 때 괴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차별상에 매달려서 행위하던 것을, 차별상을 떠난 진여를 바탕으로 행위한다는 마음으로 행위하다 보면 부사의 해탈을 바탕으로 한 부사의업을 짓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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