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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특강[6〉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은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 없어

 

 

우리함께 회관에서 강의 중인 성태용 교수.

 

 

오늘은 중생을 이야기 한 「관중생품」입니다. 중생은 생을 가진 존재들을 말합니다. 문수사리보살의 물음에 의해서 ‘중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중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생이라고 부를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비유가 재미있습니다.

“문수사리여, 가령 지혜로운 사람은 중생을 물속의 달을 보듯 하고, 거울 속의 상을 보듯 하고, 신기루를 보듯 하고,(…) 물거품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처럼 보고, 다섯 번째 대(五大)를 보듯 하고, 여섯 번째 온(六蘊)을 보듯 하고, 일곱 번째 근(七根)을 보듯 하고, 열세번째 처(十三處)를 보듯 하고, 열아홉번째 계(十九界)를 보듯 하고, 무색계(無色界)에서 온갖 색깔의 영상을 보듯 하고, 썩은 종자에서 싹을 틔우는 듯이 보고, 거북털로 옷을 만든 것처럼 보고, 요절한 사람이 온갖 욕망의 쾌락을 누리는 것처럼 보고…”

 

이런 식으로 비유가 되어 있습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그 실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데서 시작합니다. 고정된 것으로의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름이 중생일 뿐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떼어 놓고 고정된 실체로 생각해 둘로 나누어 보면 안됩니다.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번뇌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번뇌를 없앨 수 없습니다. 번뇌는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도 거울속의 그림자요 물속의 달일 뿐입니다.

중생도 중생과 부처를 나누어 놓고 이쪽은 부처 이쪽은 중생이라고 하면 중생을 없앨 길이 없게 됩니다. 중생이 부처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부처이면서 한편으로는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쓰면 중생이고 저렇게 마음을 쓰면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견(知見)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선(禪) 수행이나 어떤 것을 하더라도 올바른 지견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를 믿으면서 정지견(正知見)을 갖고 믿느냐, 그렇지 않고 믿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정지견을 갖고 있지 않으면 복을 짓는다는 것이 악업이 됩니다. 정지견이 있으면 방편을 올바로 선택할 수 있는데, 없으면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할 때도 중생과 부처를 딱 둘로 나눠놓고 수행하면 수행이 안됩니다. 어떤 것을 둘로 나누는 방식으로 수행하면 거꾸로 가게 되고 병이 듭니다.

『유마경』에서는 불이(不二)라는 것이 정지견입니다. 불이의 입장에 서야 비로소 번뇌도 없앨 수 있고 중생상도 벗을 수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인정하고 나서는 벗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정지견에 서야만 수행을 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그런 마음으로 더 자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不二 입장 돼야 중생상 벗을수 있어

이름이 중생일 뿐이라는 입장에서 일으킨 자비심이 진정한 자비심입니다. 사랑도 애착이 끊어진 상황에서 일어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애착만 뺀다면 보살의 사랑과 같습니다. 보살의 바라지 않고 다 주려고 하는 느낌이, 곧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는 내 자식이라는 애착이 개입됩니다. 그것만 빼면 바로 부모의 자식 사랑이 보살의 사랑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보살의 사랑은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보살이 크나큰 연민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여지껏 이룩하고 쌓아온 선근을 전부 포기하여 중생에게 베풀어 주는데 전혀 인색함이 없는 것, 이것을 보살이 크나큰 연민을 닦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문수사리가 말했다. ‘보살이 크나큰 기쁨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늘 기쁘게 하면서 전혀 후회가 없는 것, 이것을 보살이 크나큰 기쁨을 닦는다고 말합니다.’ / 문수사리가 말했다. ‘보살이 크나큰 포기를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마힐이 답했다. ‘평등하게 이익을 주면서도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 이것을 보살이 크나큰 포기를 닦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과 가장 비슷한 사랑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중생과 보살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아서 내가 한다는 상도 없이 하는 것이 바로 보살의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식 사랑은 내 자식이라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무너뜨리면 보살의 사랑이 부모의 자식사랑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완전한 실현은 대승불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내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보살의 사랑과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변해가는 관점 자체가 중요하고, 이것이 곧 정지견입니다.

 

경전에서는 또 천녀가 유마힐의 방에 있다가 꽃을 뿌립니다. 이 꽃이 보살의 몸에는 안 붙는데 스님들의 가사에만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사리불이 떼려고 하니까, 천녀가 왜 떼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사리불이 ‘법답지 않아서’라고 답하자, 천녀는 ‘법답다, 법답지 않다는 것은 당신의 분별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그냥 ‘법답다, 아니다’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계율을 생각해야 합니다. 계율로만 보면 스님들은 꽃 한 송이, 장신구 하나도 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꽃을 떼려고 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천녀는 그게 법답다 아니다 하는 것 자체가 법집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사리불은 ‘법답지 않다’는 말로 율에 대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계율도 방편이라는 입장이 아니라 절대로 깨지면 안 된다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불자 5계도 지켜지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술 마시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계를 주면서 명목상 주는 것이니 그건 빼고 나머지는 지키라고 한다면 그 자체로 계율의 권위가 깨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는 지켜지겠습니까. 그래서 지금이라도 바꿨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사리불이 천녀에게 ‘당신은 왜 남자 몸을 받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천녀에게 당하다 보니 일종의 반격이었지요. 그러니까 천녀가 사리불을 여자로 바꿔놓고는 ‘여신을 받은 것도 당신이 남신으로 바뀐 것과 같이 환(幻)일 뿐’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환일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유마경』을 보면 불교는 철저하게 남녀평등의 입장에 있습니다. 부처님 정신에 비춰보면 남녀불평등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가 부처이고, 다 환일뿐이고 역할일 뿐입니다. 중생이 부처이고 번뇌가 보리라고 했듯 ‘불이’의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왜 사리불이 천녀에게 혼나고 있습니까. 불교는 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둘이라는 데 빠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불도품」에 들어가면 감격할만한 대목이 나옵니다.

 

지금 있는 출세간 아니면 성불 못해

문수사리보살이 “보살이 어떻게 하면 모든 불법을 따르는 길을 성취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유마거사가 “보살이 길 아닌 길을 따를 때 불법을 성취하는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길 아닌 길이 무엇입니까. 유마거사는 “보살들은 오무간업을 다시 행하더라도 원한이나 증오,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지옥으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모든 번뇌의 오염을 벗어나며, 아수라의 길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일체의 오만과 교만과 자만을 벗어나며…”라고 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진여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세들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무시하고 들어앉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 빠쳐 허우적거려서도 안 되고, 거기에 들어앉으면 그게 또 하나의 벽이고 집착입니다. 그 세계와 이 세계가 둘이 아님을 엮어주는 것이 『유마경』의 선언입니다.

『유마경』에서는 지금 이곳을 떠나서는 성불의 길이 없다고 합니다. “성문이나 독각의 종성처럼 이미 무위를 보아서 바른 성품에 들어가 생을 벗어난 자는 끝내 일체지심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온갖 번뇌가 작용하는 낮고 습한 진흙 속에서라야 비로소 일체지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불법이 생장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사윤회를 일으키는 온갖 번뇌의 종성이 바로 여래의 종성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건 그냥 세속에 있으면서도 출세간의 마음을 잃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거기가 아니면 성불할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성문승식으로 금을 그어놓고 그 세계를 떠나서 안주하는 사람, 진여문 테두리를 갖고 앉은 사람은 성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는 세속화되고 경직된 불교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들어간 사람들은 불종자를 끊는 것이어서, 모든 일체지심을 일으킬 수 없고 온 중생을 함께 데리고 가기를 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썩은 종자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서 깨닫지 않으면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연꽃이 진흙이 아니면 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흙에 물들지 않고 정도가 아니라, 진흙이 아니면 연꽃이 필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오탁악세가 아니면 성불할 곳이 없습니다. 일체지심을 일으켜서 그 자리에서 성불해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성불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속세를 떠나는 것의 이면에는 비겁함, 두려움이 있습니다. 올바른 출세간에 있으면 두려움이나 겁내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당당한 불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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