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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특강 〈7〉

기자명 법보신문

진리의 밥 귀로 들어가 입으로 나오니 향취 없어

유마경의 정수는 不二 법문
유마일묵은 경전의 화룡점정

 

 

성태용 교수는 유마일묵을 설명하면서 침묵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침묵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시간에 ‘길이 아닌 길’을 이야기 했습니다. ‘유마경’에서는 진흙이 아니면 연꽃이 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더럽지만 물들지 않는다가 아니라 거기가 아니면 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아라한들은 성불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라한들이 탄식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제 유마거사가 문수사리를 비롯한 보살들에게 묻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모두 불이법문인데, 이것을 당신들은 어떻게 들었습니까’ 하고 말이죠. 첫 물음에 아무도 답을 하지 않으니, 유마거사가 문수보살에게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문수사리가 보살들에게 한마디씩 할 것을 권하고 보살들로부터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불법 뿐만아니라 분별을 넘어서서 분별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수사리가 “그대들은 그래도 둘이 아니라는 말을 세우고 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들어보면 둘이 아닌 문을 말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 분별도 떨쳐야 불이법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서 유마거사를 돌아보는데, 유마거사는 말없이 침묵을 합니다. 이것이 ‘유마일묵’ 입니다. 그렇게 유마거사가 침묵하자, 곧바로 문수사리가 “정말로 여실하게 몸으로 드러내 보이셨다”고 찬탄을 하는 것으로 ‘불이법문품’은 끝이 납니다.


이 대목을 보면 ‘유마경’을 지은 분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유마거사의 장광설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런데 보살들에게 말을 시켜놓고는 수많은 말을 하고 나니 당신은 스스로 침묵을 지킵니다. 또한 여기서 문수사리의 역할은 또 얼마나 절묘합니까. 문수사리가 없어서 유마거사가 침묵을 하는데 아무런 말도 없으면 그 자체가 얼마나 머쓱한 상황이 되겠습니까. 유마의 일묵을 문수사리가 치켜세웠기 때문에 그 의미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 ‘유마경’의 정수는 불이(不二)이고, 바로 이 대목이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유마거사에게 시비를 한 번 걸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침묵도 하나의 표현 아닌가. 불이라고 하면 말 있음과 말 없음도 떠나야 하는데 왜 말을 안 하는 것으로 표현을 해야 하는가’하고 말입니다. 요즘 불교를 자꾸 말 없음의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을 해야 할 때는 하는 것이 옳습니다. 불이도 말 있음과 없음을 넘어서 있어야 불이가 됩니다. 진리는 무조건 말 없는 경지라고 강조하는 것 또한 하나의 집착입니다.


선사들은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고 합니다. ‘입을 열면 곧 착’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입을 안 열면 맞는 것입니까.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착’입니다. 입을 열고 열지 않고를 둘로 보는 입장에 있어서 집착인 것입니다. 하도 말이 많아 ‘개구즉착’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입을 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분별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면 그것도 착이 됩니다. 이 대목은 하나의 전개로 봐야 합니다. 정말로 말이 떨어진, 분별이 떨어진 것을 그 모습으로 보여주는 정점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침묵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할 말이 없고 무식해서 침묵하는 것은 금일 수 없습니다. 말을 하되 말에 머무름이 없을 때 수천마디의 말을 해도 말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둘이 아닌 자리를 여의지 않고서 말이 나왔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침묵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마경’ 전체에서 침묵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불이의 내용을 보면 아주 많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세간과 출세간, 승과 속, 더러움과 깨끗함 그런 것들이 다 분별로서 그것을 넘어서서 둘이 아닌 것으로 깨달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이법문을 듣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칫 분별을 넘어선다고 하니 거기에 매달려 또 병이 걸리게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차별하지 않고 시비를 넘어서야 할 것 같고, 적당히 넘어가는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집착 속에 한 가지 입장의 분별에 들어앉아서 문제이지, 집착이 떠난 자리에 가면 오히려 더 명료하게 보여야 합니다.


남녀라는 분별이 있어서 남자와 여자라는 상속에 들어가 있으면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나 모습이 잘 안보이고, 파도라는 입장에 서면 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너의 파도와 내 파도로 나누게 됩니다. 하지만 물이라는 입장에 서게 되면 모든 파도들이 다 용인되면서도 오히려 분별 속에 들어앉았을 때 보지 못한 것들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털끝만큼도 어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엄밀해 지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그 분별없음이라는 것에 있어야 가장 엄밀해 지고, 엄밀하게 세상사를 건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자라면 오히려 더 정확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둘을 억지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다른 하나를 더 만들어서 차별을 뭉개는 것이 됩니다.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둘을 뭉개고 차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둔 채로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차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별 있음을 차별 없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정지견(正知見)입니다. 정지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정지견이 서지 않으면 수행을 해도 거꾸로, 기도를 해도 거꾸로 가게 됩니다.


부처님과 나를 둘로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미 내가 없으니까 구한다는 마음을 먹으면 안 됩니다. 없앤다고 자기를 분별해버리면, 또 내가 없어서 저것을 구한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 둘이 됩니다. 내가 없는 존재로 규정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 주시는 분입니다. 기도는 이미 받은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과 나를 둘로 보고 매일 부처님께 매달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이 불이의 기도이고, 참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법을 몸으로 소화시켜서
털구멍마다 향기를 풍겨야


나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해서 둘로 나누면 절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정지견이 바로서서 그 정지견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이는 둘을 두면서도 둘이 아닌, 둘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매몰되지 않는 입장입니다. 둘을 뭉개는 것은 불이가 아니라 셋이 되는 것이고, 둘 밖에 또 하나를 세우는 것이 됩니다. 불교는 절대로 아득한 불이의 세계에 빠지게 하지 않습니다. 고통의 원인과 거기에 닿는 이유가 있고, 언제나 적실하게 우리의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향적불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도 역시 못난이 역할을 하는 문수사리가 역할에 충실합니다. “밥은 언제 주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그 생각을 읽고 향적여래가 계신 중향세계에 화신을 보내서 밥을 빌어옵니다. 이때 그 세계의 보살들까지 이 법석을 구경하고자 함께 오게 됩니다. 그런데 문수사리는 “밥이 조금밖에 없는데 저 밥으로 다같이 나눠먹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 밥은 다같이 먹고도 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가 밥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닌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내가 정말 인간답게 당당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러한 힘을 주는 음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갖고 ‘향적불품’을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의 음식은 바로 진리의 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렇게 또 다른 세계를 말할 때는 어찌 이리도 세계가 많은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고, 다만 우리가 사는 세계 역시도 동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흔히 우리들이 현재 의식하고 있는 것은 전체의 의식에 비해 빙산의 일각이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잠재돼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평상시 멀쩡하다가도 술을 마시면 주사가 나오는 사람은 그 잠재의식 속에 있던 것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인데, 수행을 하는 사람의 의식은 확장되고 잠재의식 속에 있던 것을 떠올려 해소하게 됩니다.


꼭 수행이 아니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 잠재의식을 없애고 소멸해 갈 때 완성된 인격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꿈 역시도 내 마음에 갈등과 부조화를 일으켰던 요소들을 해소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수행을 해서 완전한 인격을 갖는다는 것은 의식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경전에서처럼 불보살이 어떤 세계라도 갈 수 있다는 것은 ‘자기’라는 이 몸을 벗어나서 모든 의식의 바닥까지 꿰뚫어본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에 수억의 세계가 있고, 보살의 세계는 생각하는 만큼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유마거사는 그 중 중향세계에서 밥을 빌어온 것이고, 그것은 바로 진리의 밥입니다. 때문에 이 밥은 수십억명이 나눠먹어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밥을 먹은 사람들은 털구멍마다 향기가 나고 몸이 편안해집니다. 여러분도 진리의 밥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의 털구멍마다에서는 향취가 나지 않을까요.


중국의 순자는 “소인의 배움은 귀로 들어가면 바로 입으로 나온다. 귀와 입 사이는 세치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그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신 진리의 밥이 ‘유마경’에서 말하는 향적여래의 밥만큼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의 밥을 먹는 우리는 여래의 밥을 다 먹었으면서도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몸을 아름답게 하지 못하고 불법의 향취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의 밥을 차분하게 몸으로 소화시켜서 털구멍마다 향기가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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