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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 타계

기자명 법보신문
  • 사회
  • 입력 2010.12.05 12:47
  • 수정 2010.12.07 10:05
  • 댓글 0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발인 8일 오전
본지 고문으로 칼럼 연재하며 불교계 견인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는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평생을 언론과 민주주의, 후학 양성에 바친 진보적 사상가이자 언론인이었다.

 

 

실천하는 사상의 은사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12월5일 타계했다. 향년 81세.

 

리 전 교수는 이날 0시 40분께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리 전 교수는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지병이던 간경화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실천하는 지성’, ‘행동하는 지성’으로 불리던 리 전 교수는 1929년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 한국해양대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수학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에 입대해 장교생활을 지내기도 했다.

 

리 전 교수는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평생을 언론과 민주주의, 후학 양성에 바친 진보적 사상가이자 언론인이었다.

 

리 전 교수는 1957년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을 시작으로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1965년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1972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일찍이 민주화를 위한 언론활동을 통해 1961년부터 5.16 군사혁명에 반대하는 글을 ‘New Republic’에 기고하기도 했다. 1964년엔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989년 한겨레신문의 방북 취재를 기획,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 다시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고, 1977년 저서 ‘8억인과의 대화’가 중국공산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반공법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각각 4년간 해직됐고, 기자 생활 땐 2번의 해직까지 모두 4번이나 권력에 필봉을 꺾여야만 했다.

 

리 전 교수는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얻은 폭넓은 지식과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한 활발한 저술을 통해 진보세력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70∼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처럼 여겨졌던 ‘전환시대의 논리’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우상과 이성’, ‘베트남 전쟁’, ‘자유인ㆍ자유인’, ‘스핑크스의 코’, ‘동굴속의 독백’, ‘21세기 아침의 사색’, 회고록 ‘대화’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히 리 전 교수는 1974년 출간한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반공주의의 철가면을 벗겨 내고 중국, 일본, 미국, 베트남 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붉은 공산주의 국가로만 치부됐던 중국 혁명사를 역사적 사실과 논리에 따라 이성적으로 서술했다.

 

굽힘 없는 지성의 최고봉 리 전 교수는 1996년 8월 본지 고문을 맡고 같은 해 12월 ‘리영희 칼럼’을 신설, 불교계 안팎에 신선한 화제를 불러왔다. 당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리 전 교수는 본지의 칼럼 수준을 다시 한 번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고 이후 불교계 남북교류, 대북지원 활동의 정신적 기둥이 됐다.

 

특히 본지에 연재됐던 칼럼이 엮인 ‘스핑크스의 코’에는 오늘날 불교계에 대한 충고로 손색없는 주옥같은 글들이 촘촘히 빛을 발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사를 찾아 산중유곡에서 사바로 내려오면 좋겠다는 바람과 신도의 보시금을 도식하지 말라는 당부와 더불어 신도의 공양으로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스님들을 경계했다. 또 백장선사의 말을 빌어 노동과 수행이 하나로 통일된 신앙생활이 아니면 위선이라고 질타했다.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글도 눈에 띈다. 1995년 당시 종교인구 중 불자가 으뜸인 사실을 두고 ‘자비를 생활과 행동의 지침으로 여기는 인구가 많은 것은 민족의 축복’ 이라며 반가워하는 반면, 불교계의 냉담한 북한 동포 구호 운동을 꼬집기도 했다.

 

불교계를 향한 애정 어린 비판 뿐만 아니라 리 전 교수의 불연 역시 특별하다. 리 전 교수는 투옥 당시 이기영 선생 번역의 ‘대승기신론소’와 ‘한국의 불교사상’, ‘선가귀감’ 등을 탐독했다. 특히 17세 무식꾼 초동이 부처님 강론을 듣고자 300제자의 더러운 신발을 닦았던 일화에 작은 깨달음을 얻고 희열을 느꼈다고 리 전 교수는 회고했다. 그날부터 리 전 교수는 광주 교도소의 정치범과 시국사범을 넣는 0.9평의 감방 끝에 연결된 0.2평의 콘크리트 변소 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았다. 이를 마음의 거울에 묻은 더러움과 티를 닦았던 일이라 기억하는 리 전 교수는 ‘형무소 감방 안에서 부처님의 한량없는 지헤의 가늘고 가는 한 가닥 빛을 본 것 같았다’고 적었다. 

 

신흥사, 건봉사에 대한 리 전 교수의 생전 인연도 독특하다. 리 전 교수는 한국전쟁 당시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 소속 청년 장교 시절 임시 연대본부가 위치할 신흥사를 찾았다. 군인들은 경판을 불쏘시개로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리 전 교수는 당장 연대 전방지휘관인 부연대장에게 달려가 ‘귀중한 겨레의 문화재가 회진 되고 있으니 즉시 불을 끄고 모든 경판을 회수하십시오’라고 말했다. 타다 남은 경판은 조각까지 주워 본당 좌측에 있는 판고에 도로 꽂아놓도록 했다. 리 전 교수가 전쟁 상황에도 지켜냈던 그 경판은 은중경을 비롯해 법화경, 다라니경 등이다. 은중경은 다행히 완전히 보존됐고, 법화경과 다라니경은 많은 경판이 소각됐다. 리 전 교수의 보호로 남게 된 이 경판은 한자, 한글, 산스크리트 세 언어로 된 경판인만큼 희귀한 자료였다.

 

리 전 교수가 비교적 자주 찾았던 건봉사와의 인연도 각별하다. 한국전쟁 때 화약 냄새가 자욱한 경내에 있었던 한 스님과의 기억 때문이다. 리 전 교수는 미군 공군의 폭격으로 주춧돌만 있었던 건봉사에 남은 암자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식량만 있으면 혼자서라도 건봉사 터에 남다가 죽을 각오를 전했고, 리 전 교수는 스님의 위의에 경외감을 느꼈다.

 

날카로운 이성으로 촌철살인의 글을 써 오던 리 전 교수는 잦은 고초 탓인지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저술 활동은 자제했다. 그러나 그의 사회참여와 진보적 발언은 계속됐다. 이런 그를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사상의 은사’라는 표현으로 한국사회에서 리 전 교수의 비중을 높이 평가했다. 또 일찍이 시인 고은 선생은 ‘한반도의 상공에 날고 있는 각성의 붕(鵬)이자 한반도와 한반도를 에워싼 모든 힘의 논리를 이성의 논리로 이겨내는 물질적 정화’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언론자유상과 단재학술상, 늦봄통일공로상, 만해실천상, 한국기자협회 제1회 ‘기자의 혼’상, 심산(김창숙) 학술상, 한겨레통일문화재단상, 후광김대중문화학술상 수상 등을 통해 치열했던 삶을 작게나마 평가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영자씨와 아들 건일·건석씨, 딸 미정씨를 두고 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특1호실(02-2227-7550)에 마련됐다. 입관은 6일 오전 11시, 발인은 8일 오전 6시에 거행된다. 이후 수원 연화장(031-218-6500)에서 화장식이 열린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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