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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특강 〈8〉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의 고통 어루만질 참 불사 필요한 시대

크고 화려함만 좇는 요즘 불사는
중생 외면한 비불사이자 반불사

 

성태용 교수는 “중생의 조건에 맞는 올바른 방편을 찾아주는 것이 불사”라고 강조했다.

오늘은 ‘보살행품’과 ‘아촉불품’입니다. 이제 무대가 부처님 회상으로 옮겨집니다. 유마거사가 주인공인데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증명을 받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제 마무리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향적여래의 음식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음식을 먹은 이들은 번뇌가 해소돼야 음식이 소화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진리의 음식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가르침을 받았더라도 그것을 소화해서 내 것으로 하지 못하면 그것은 소화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이 소화된다는 것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소화됐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소화가 안되어 정신의 위장에 그대로 쌓여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진리의 음식을 먹고 소화가 되면 향내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불자가 불자인 티를 내고 다니는 것은 소화가 안됐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완전히 자기화가 되면 자기표현이 나오지 그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나의 냄새가 나게 되지요.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하면 자기 것이 됩니다. 불교에는 ‘장부가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개가 있으니, 여래가 행한 것을 따라서 행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불교가 부처님을 무조건적인 절대자로 모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가 행한 것을 따라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자유로운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화 된 그 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향적여래의 음식으로 불사를 짓습니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여래는 국토의 중생에 맞춰서 온갖 다양한 불사를 짓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보리수 불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래 색신으로 짓는 불사, 갖가지 의복으로 짓는 불사, 온갖 음식으로 짓는 불사가 나오는데 그 이유가 중생은 방편으로 조복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올바른 방편을 써서 중생을 조복시키는 것이 불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중생들이 어떻게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 조건에 맞는 올바른 방편을 찾아주는 것이 바로 불사입니다.


이 말에 비춰보면 이 시대의 불사는 비불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절 짓기, 기왓장 올리기, 불상 조성, 개금불사 이런 것들 말입니다.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예전에 불상을 조성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크기를 경쟁하며 온갖 불상을 조성하는데 그게 중생에게 감화를 줄까요. 요즘 그런 큰 불상 조성이 의미가 있을까, 화려하게 절 짓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면 이것은 비불사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불사가 아니다’라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진짜 불사를 방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중생 고통을 어루만지는 진정한 불사가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반(反)불사가 됩니다.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기개가 생깁니다. 이 시대에 맞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기상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상이 달라지고 삶의 태도가 달라지는 불사가 없습니다. 선망부모에서 가족까지 읊는 불사만 하니까 위안은 받아도 기상이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인재양성도 필요하고, 병원도 필요하고, 수없이 많은 영역이 있습니다. 통일 불사, 환경 불사에 앞장서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에 참여하는 대중들의 인식이 달라집니다. 또 마음과 기상이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복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렇게 기상이 달라지면 호법신장이 달라집니다. 주변에 모이는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이 바뀌질 않습니다. 스님들은 대중의 탓을 하는데, 스님들이 말하면 바뀌게 됩니다. 편한 것만 찾으니 문제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물든 불자들이 또 스님들을 끌고 갑니다. 과연 그게 복 받을 일입니까. 불사를 제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성문과 보살의 차이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것도 중요합니다. 성문이 원래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닌데, ‘유마경’에서는 성문승을 두드려 패는 대표로 내세웠습니다.


그 시대의 잘못된 불교 모습을 대변하는 것으로 성문을 세운 것입니다. 성문은 아무리 기를 써도 보살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가족과 자기 안위를 위한 불사를 하는 의식세계에 있는 사람과, 적어도 자기의 이웃과 중생과 사회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과는 서 있는 자리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성문이 두드려 맞는 것은 자기의 해탈만을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열린 의식으로 사는 사람과 자기의식에만 갇혀 사는 사람은 차원이 다르다는 말인데, 낮은 레벨에서는 기껏해야 보살의 레벨에서 내딛는 한 걸음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대승의 마음을 내면 그 전에 갈등하던 것들이 해소됩니다. 예전에 백봉 김기추 선생님은 ‘대승의 범부가 될지언정 소승의 성과를 탐하지 말라’고 했는데, 대승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유마경’을 읽다보면 대승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부처님이 중향세계의 중생들에게 ‘보살은 유위를 다해서도 안 되고 마찬가지로 무위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부촉을 내립니다.


공중에서 부처님 찾으면 위험
부처님의 삶을 정확히 알아야

 

‘유위를 다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중생을 성숙시키는데 한시도 게으르지 않고, 짐짓 생사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불국토를 장엄하기를 즐기고, 번뇌의 적을 영원히 무찌르기 위해 방편을 통해 반야의 칼과 몽둥이를 갈고 닦고, 대비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 그러니까 유위 그 행을 버리지 않고 해나가는 것입니다. 불사하고 장엄하고 정진하고 노력하는 것이 다 유위의 영역입니다. 그것을 비우지 않고 계속 진행해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측면으로 ‘무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공을 행하더라도 그 공을 증명하기를 즐기지 않고 안으로 ‘나’가 없음을 관찰하면서도 끝내 자신을 저버리지 않고, 행이 없음을 보면서도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일을 행하고, 번뇌 없음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생사에 유전하는 것, 그러니까 보살은 본래의 염원을 성취시키는 일이지만 근본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이룬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없다고 하는 일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바로 집착이 없는 보살의 대원력에 바탕한 행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중향세계의 보살들이 여기에 크게 감명을 받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세계도 부처님이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방편이지 더럽고 깨끗한 세계가 따로 없다는 것이 ‘유마경’의 본래 뜻입니다. 때문에 중향세계의 보살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감명을 받으면서 이 대목이 끝이 납니다.


그 다음에 ‘아촉불품’ 입니다. 여래의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주제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나는 부처님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적어도 불자라면 부처님일대기를 제대로 읽어봐야 합니다. 어떤 시대를 어떻게 살다 가셨는지, 그 시대에 그 몸으로 그렇게 사셨다는 것에 미루어서 어떤 것을 가르치려고 하신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 속 부처님을 이해해야 역사를 넘어선 부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공중에서 부처님을 찾으려고 하면 위험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통해서 진리를 접한 것입니다. ‘유마경’에서는 색신을 넘어선 부처님의 모습을 형용한 것입니다. ‘여래의 몸은 모든 것을 넘어선 존재이며 어떤 것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존재이다. 모든 것을 성취했으며 모든 장애를 벗어난 존재이다’ 정도로 요약하면 됩니다.


완성형이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 구체적인 말로 형용이 안 됩니다. 부정적인 말로 형용돼야 합니다. 규정성이 되면 한정이 되기 때문에 늘 ‘아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열반을 형용하면 ‘고통이 없다’, ‘번뇌가 없다’고 하니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최고의 긍정입니다. ‘가장 행복한 것’, ‘완전히 진리와 하나된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위험합니다. 행복하다고 하면 그게 무엇인지 또 헛갈립니다.


그렇게 긍정적인 표현을 쓸 때 위험요소를 없애기 위해 부정적인 표현을 쓰는 것으로, 가장 완전한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몸도 그렇게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몸짓은 어떨까요. 생멸문이 바로 부처님 몸짓입니다. 차별 속에 드러나는 묘용으로써 부처님 몸짓은 드러납니다. 우리 생멸의 세계가 부처님의 몸짓입니다.


그 다음에 아난이 ‘저 훌륭한 분이 어디서 왔을까’를 묻습니다. 이 물음에 유마거사가 ‘삶과 죽음이 어디 있느냐’고 대꾸하자, 이때 부처님께서 ‘유마거사는 묘희세계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합니다. 유마거사는 근본원론을 갖고 말하는데, 부처님은 그것을 눌러놓고 ‘묘희세계에서 왔는데, 그 세계의 부처님은 무동불’이라고 합니다. 이 무동불이 아촉불입니다.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그 세계를 이쪽으로 옮겨옵니다. 중향세계와 마찬가지로 두 세계가 전혀 장애가 없습니다. 무동부처님의 세계, 즉 움직임이 없는 세계가 옮겨져 온 것입니다. 이게 일종의 ‘유마경’의 선지입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세계를 움직여 온 것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부 묘희세계에서 왔다고 읽는 것입니다. 묘희는 오묘하게 기쁜 세계입니다. 유마거사는 큰 발원으로 오셨고, 우리는 어쩌다가 인연에 끌려서 왔습니다.

여기서 무동부처와 묘희의 세계는 중생의 뿌리입니다. 오묘한 환희의 세계입니다. 중생의 본래 자리가 오묘한 환희의 세계인 것이고, 우리가 ‘왔다’ ‘갔다’를 떠난 무동의 세계를 바탕으로 여기에 온 것이지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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