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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자타삿투

기자명 법보신문

부왕 죽인 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

왕에 의해 살해당한 선인 왕자로 환생

불멸 후 칩엽굴 결집 후원 등 승가 외호

 

 

 

 

부처님 말년의 어느 날, ‘라자가하의 비극’이라 불리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인도의 최대강국 가운데 하나였던 마가다국의 빔비사라(Bimbisāra)왕이 자신의 아들인 아자타삿투에게 폐위당하여 라자가하 성 밖의 한 옥중에 있다 숨진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통곡했다.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 주셨던 정법왕이 돌아가셨구나. 이 정법왕의 나라에서 우리들은 그 동안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던가. 죽는 날까지 부처님을 찬탄하셨던 빔비사라왕께서 돌아가셨구나.” 15세에 왕의 자리에 오른 빔비사라는 즉위 16년경에 부처님께 귀의, 이후 37여 년 동안 부처님과 친구처럼 지내며 승가의 외호자로서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비심 깊고 현명한 처사로 세속의 왕으로서도 뛰어난 선정을 베푼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권력·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경악할 사건으로 이어진다.


빔비사라왕에게는 케마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아자타삿투는 그 가운데 웨데히(Vedehī)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왕위를 물려줄 마땅한 자식이 없어 근심하던 빔비사라왕은 어느 날, 한 점성가를 찾아가 의논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라자가하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비후라산에 한 명의 선인이 살고 있는데, 3년 후면 죽어 왕의 자식으로 웨데히왕후의 태내로 들어올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빔비사라왕은 어찌 3년이나 기다릴까 생각하며 몰래 자객을 보내 그 선인을 살해했다.


선인은 죽기 직전에 자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에게 내 말을 전해라. 내 목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건만 왕은 마음에 살의를 품고 입으로 명령하여 사람을 보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나 왕의 자식이 된다면, 마음에 살의를 품고 입으로 명령하여 사람을 보내 왕을 죽일 것이다.” 이 말을 남긴 채 선인은 살해되었다.


데와닷타 유혹에 왕위 찬탈


선인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웨데히왕비는 정말 임신했다. 빔비사라왕은 크게 기뻐하며 점성가를 불러 아들인가 딸인가 물었다. 점성가는 대답했다.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언젠가 왕에게 해를 가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흘려버리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머물던 걱정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결국 모든 사정을 웨데히왕비에게 털어 놓은 왕은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높은 누각으로 데려가 떨어뜨리자고 제안했다. 왕비는 망설였지만 결국 왕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높은 누각에서 떨어진 아기는 새끼손가락 하나가 부러졌을 뿐 다른 곳은 멀쩡했다. 아자타삿투란 ‘태어나기 전부터 원한을 가진 자’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빔비사라왕의 명령을 받고 온 자객에게 살해된 선인의 원한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자신의 한 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아들에게 입혔을 심신의 상처를 가슴 아프게 여기며 왕은 한없는 애정을 쏟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빔비사라왕의 뇌리에서도 점성가의 예언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자타삿투는 앙가국의 수도인 참파(Campā)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이를 전해들은 빔비사라왕은 대노하여 그를 나무랐다. 앙가는 빔비사라왕에게 있어 특별한 곳이었다. 빔비사라왕 때까지 마가다는 건립 7~8백년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대국은 아니었다. 그런데 일약 대국으로 성장할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빔비사라왕이 태자로 있을 무렵, 마가다는 앙가의 속국 상태였는데, 어느 날 앙가의 관원이 마가다에 와서 징세하는 것을 본 태자 빔비사라는 크게 분노하며 그를 쫓아버렸다. 이로 인해 마가다와 앙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승리한 마가다는 앙가를 병합하게 되었다. 이후, 빔비사라는 마가다과 앙가, 이 두 나라의 왕이 되어 양쪽 나라의 백성들로부터 칭송받는 선정을 베풀었다. 일찍이 앙가의 과다한 세금 부과로 마가다의 백성들이 받았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였기에 앙가의 국민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부왕의 뜻을 어기고 아자타삿투는 앙가에 중세를 부과하고자 했고, 이는 당연히 왕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왕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은 아자타삿투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기름을 들이붓는 계기가 생겼다. 바로 데와닷타(Devadatta)의 유혹이었다. 데와닷타는 부처님의 숙부 아들로 부처님께서 성도 후 카필라성에 가셨을 때 다른 석가족 청년들과 함께 출가한 인물이다. 신통력 등을 보여주며 아자타삿투의 마음을 사로잡은 데와닷타는, 어느 날 아자타삿투에게 출생에 얽힌 비밀을 들려주며 그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부왕에 대한 그의 분노는 한층 커졌다. 이를 감지한 데와닷타는 제안했다. “만약 왕자님이 부왕을 죽인다면, 저 역시 사문 석존을 죽일 것입니다. 왕자님은 부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이 되고, 저는 사문 석존을 죽여 교단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아버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왕의 자리에 대한 욕망,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아자타삿투는 가서는 안 될 길을 선택하고야 만다.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는 인륜을 저버리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부처님 인연으로 참회의 삶


아자타삿투는 부왕을 옥에 가두게 하고 먹을 것도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웨데히왕후의 걱정과 슬픔은 그 누구보다 컸다. 어느 날 웨데히는 온 몸에 꿀을 바르고 보석장식품 속에 먹을 것을 숨겨 몰래 빔비사라왕을 만나러 갔다. 이를 알게 된 아자타삿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어머니마저 죽이려 했지만, “일찍이 어머니를 죽인 왕은 없습니다”라는 지와카의 충고를 받아들여 옥에 가두는데 그쳤다. 지와카란 아자타삿투와 형제인 아바야왕자와 사라와티라는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위해 의료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왕위에 오른 아자타삿투는 데와닷타에게 날마다 수레 500대분의 공양을 보내어 공양했다. 때마침 기근이 발생하여 탁발을 할 수 없었던 500여명의 비구들은 부처님을 버리고 데와닷타에게 가버렸다. 한 때 이로 인해 부처님의 지위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극악무도한 아자타삿투의 소행이 알려지자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을 비롯한 인근 나라의 왕들이 군대를 일으켜 라자가하를 공격했다. 특히 빔비사라왕에게 시집보낸 자신의 여동생 코살라가 자비심 깊은 왕의 예기치 못한 몰락을 슬퍼하다 급사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접한 파세나디왕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대노하여 마가다를 공격, 아자타삿투를 포획하고 코살라를 시집보낼 때 지참금으로 보냈던 카시국을 다시 빼앗아 왔다. 이 전쟁으로 인해 마가다국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렸는데, 거기다 홍수와 역병까지 겹쳐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자비심 깊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파세나디는 아자타삿투가 조카라는 점을 생각하여 그를 풀어주었다. 또한 카시국도 되돌려주었으며, 심지어 바즈라공주를 함께 보내어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크게 상심한 아자타삿투는 두려움과 후회로 번민했다. 한때 아들의 병을 걱정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어머니인 웨데히왕후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아자타삿투야, 예전에 네가 아플 때면 너의 아버지도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단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아자타삿투는 서둘러 대신을 보내 부왕을 풀어주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옥중에서 기력이 다해 버린 빔비사라왕은 대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혹시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은 아닐까, 이 보다 더 고통스러운 형벌이 가해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떨다 의식을 잃고 그대로 숨졌다고 한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부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아자타삿투는 심각한 병에 걸릴 정도로 자책하며 괴로워하다 지와카에게 부탁하여 함께 부처님을 찾았다. 부왕이 평소에 그토록 존경하며 따랐던 정신적 지도자. 조금이라도 빨리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지금 이런 모습으로 서 있지는 않을 텐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절망하며 아자타삿투는 부처님을 마주하고 있었다. 부처님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40여년 가까운 세월을 친구처럼 지내온 빔비사라왕이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이제 그 아들이 자신에게 가르침을 구하며 이렇게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만신창이가 된 아자타삿투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셨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과법의 도리를 설하여 그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셨다. 참회하며 아자타삿투가 떠나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자타삿투는 실로 아까운 사람이다. 그가 만약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이 장소에서 깨달음을 열 수 있었을 것을…”

 

이자랑 박사

부처님과의 만남 이후, 아자타삿투는 승가의 외호자가 되었다. 날마다 세 번씩 부처님을 찾아 참회하고, 부처님을 맞이하며 90일 동안 궁중에서 안거를 보내시도록 하기도 했다. 또한 라자가하 근교에 포살당을 지어 불교의 흥륭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의 불사는 부처님의 열반 후에도 이어졌다. 불멸후에 그의 제자 500명이 라자가하의 칠엽굴에 모여 불전편찬회의를 했을 때도 그는 물질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몫으로 차지했던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라자가하에 탑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아자타삿투 역시 인과의 도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아들 우다야밧다카(Udayabhaddaka)에게 죽임을 당하는 최후를 맞이했지만,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탐진치가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결말과 인과의 도리를 꿰뚫어보며 진정한 참회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자랑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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