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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보살은 중생 이롭게 함을 업으로 한다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의 마음과 업 평등함을 보는 것은
한마음에서 부처님 눈으로 보는 것이다
허망한 생각 떠나게 하면 곧 보살이니
보살은 다만 그대들의 몸 가운데 있다

김정희 作. 명선. 간송미술관 소장.

52. 임시방편으로 가르치는 알음알이와 다르기 때문


李長者論 云. 此華嚴經 十住爲見道 十行十向十地十一地爲加行 修行令慣熟故 佛果於初. 先現 以普賢悲願 令智悲大用 慣熟自在故 以自如來根本普光明智先現故. 始終本末 總無延促時日分劑故. 以法身根本智 如實而言 不同三乘權敎情所解故 皆須約本而觀之. 畢竟佛果慣習已成 普賢行已滿. 一往 但以敎化一切衆生 爲常恆 從初至末 無始無終 無成無壞. 但以普遍十方一切六道 以智對現利生 爲永業也.


당나라 화엄학자 이통현(635-730) 장자가 논(論)에서 말하였다.
‘화엄경’에서는 십주(十住)를 ‘진실한 도의 흐름을 보는 견도(見道)’로 삼고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回向) 및 십지(十地)와 십일지(十一地)를 진실한 도의 흐름 속에 들어가 ‘더욱 열심히 정진하는 가행(加行)’으로 삼아 수행하며 공부가 익어질 때 비로소 부처님의 세상이 나타난다. 이는 보현보살이 모든 중생을 애틋하게 여기는 원력으로 대자대비를 실천하여 거침없이 자유자재 함을 먼저 드러내는 것이므로 ‘여래의 근본에서 두루 빛나고 있는 지혜’로부터 먼저 나타나기 때문이다.


처음과 끝, 근본과 곁가지에서 조금도 더 보태지거나 줄어드는 법이 없고 시간이나 날짜로 한정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법신의 근본지’ 그대로 말하는 것으로써, 삼승(三乘)에서 임시방편으로 가르치는 알음알이와 다르기 때문에, 이 모두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지혜 그 근본에서 보아야 한다. 마침내 부처님의 세상은 익숙한 일처럼 이미 완성되어 있고 보현의 보살행은 벌써 세상에 가득하다. 세상에서 다만 모든 중생 교화하는 것을 늘 하는 일로 삼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시작이나 끝도 없고 이루거나 허물 것도 없다. 시방세계 온갖 중생계에 보현의 보살행이 두루 빠짐없어 빛나는 지혜로써 중생을 이롭게 함을 영원한 업으로 삼는다.


강설) 십주(十住)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보살의 수행단계 52위 가운데 십신(十信)을 지난 11위에서 20위까지를 말한다. 부처님의 세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안주하게 될 수 있다는 마음자리를 열 가지 뜻으로 나누어 십주(十住)라고 한다. 이곳에서 부처님의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니 이것이 견도(見道)이다. 십주(十住) 보살은 번뇌가 다 사라진 마음으로 삶을 의지하는 국토를 삼고, 십행(十行) 보살은 번뇌가 다 사라진 자리에서 나오는 태양 같이 밝은 지혜로 보살의 삶을 실천하는 국토를 삼으며, 십회향(十回向)과 십지(十地) 보살은 보살행을 실천해도 실천한 바가 없는 오묘한 도리로 국토를 삼는다. 십일지(十一地)는 부처님의 세상을 완전히 깨닫는 묘각(妙覺)에 들어가기 직전 경계가 부처님과 비슷하지만 아직 조금 부족한 상태인 등각等覺을 말한다.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回向) 및 십지(十地)와 십일지(十一地)의 경계를 가행(加行)이라고 하는데, 이는 견도(見道)에서 부처님의 세상을 보고 그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수행하는 단계를 말한다.


53. 부처님들 빠짐없이 내 품에 있고


大集經 云. 住一心中 能知一切衆生諸心. 觀衆生心 悉皆平等 如幻化相 本性淸淨. 觀諸衆生 身業平等 皆如水月. 見諸衆生 悉在己身 己身亦在衆生身中 猶如影現. 能令衆生悉作佛身 亦令己身作衆生身 一切無有能轉動者. 又 經頌云 諸佛一似大圓鏡 我身猶若摩尼珠 諸佛法身入我體 我身常入諸佛軀. 雖然互入 而無所入 若有所入 卽成二法.


‘대집경’에서 말하였다.
한마음에서 모든 중생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중생의 마음이 모두 평등한 것을 보니 허깨비의 본디 성품이 맑고 깨끗한 것과 같다. 온갖 중생의 업이 평등한 것을 보니 모두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 모든 중생이 자기 몸 안에 있고 자신의 몸 또한 모든 중생의 몸 가운데 있음을 보니 밝은 거울에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중생이 부처님이 되고 자신이 중생이 될 수 있는 온갖 것에도 이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없다. 또 경의 게송에서 말한다.


부처님은 예외 없이 큰 거울 같고
저의 몸은 맑고 맑은 마니주 같아
부처님들 빠짐없이 내 품에 있고
제 몸 또한 그 분 속에 들어가 있네.
비록 서로의 품안으로 들어가더라도 들어간 바가 없는 것이니, 들어간 바가 있다면 곧 두 가지 법이 되느니라.


강설) 중생의 마음과 온갖 중생의 업이 평등함을 보는 것은 한마음에서 부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54. 슬기로운 사람이 물속의 달을 보듯


維摩經 觀衆生品 云. 爾時 文殊師利 問維摩詰言 菩薩 云何觀於衆生. 維摩詰言 譬如幻師 見所幻人 菩薩觀衆生爲若此. 如智者見水中月 如鏡中見其面像 如熱時焰 如呼聲響 如空中雲 如水聚沫 如水上泡 如芭蕉堅 如電久住 如第五大 如第六陰 如第七情 如十三入 如十九界 菩薩觀衆生爲若此..


‘유마경 관중생품’에서 문수가 유마에게 물었다.


문수 : 보살은 중생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유마 : 보살은 중생을 요술사가 요술로 만들어 낸 사람을 보듯 보아야 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이 물속의 달을 보듯, 거울에 비친 얼굴 보듯, 뜨거운 사막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보듯, 골짜기에 울리는 메아리를 듣듯, 허공의 구름을 보듯, 흐르는 물에서 일어나는 물방울을 보듯, 물 위에 떠있는 물거품을 보듯, 파초의 단단한 껍질 속을 보듯, 번개가 오래 머무는 것을 보듯, 제오대(第五大)·제육음(第六陰)·제칠정(第七情)·십삼입(十三入)·십구계(十九界)를 보듯 보살이 중생을 보는 것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如無色界色 如焦穀芽 如須陀洹身見 如阿那含入胎 如阿羅漢三毒 如得忍菩薩貪恚毁禁 如佛煩惱習 如盲者見色 如入滅盡定出入息 如空中鳥跡 如石女兒 如化人煩惱 如夢所見已寤 如滅度者受身 如無煙之火 菩薩觀衆生爲若此. 文殊師利言 若菩薩作是觀者 云何行慈. 維摩詰言 菩薩作是觀已 自念 我當爲衆生 說如斯法 是卽眞實慈也.


무색계(無色界)의 색을 보듯, 타버린 곡식의 새싹을 보듯, 오온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몸을 실재한다고 잘못 아는 견해를 끊어버린 수다원(須陀洹)의 신견(身見)을 보듯, 다시 태어나지 않는 아나함이 태(胎) 속에 들어가듯, 삼독(三毒)을 끊은 아라한의 삼독을 보듯, 모든 것을 참아내는 득인(得忍) 보살이 탐욕과 성냄으로 금계(禁戒) 훼손하는 것을 보듯, 부처님에게 번뇌가 남아 있음을 보듯, 눈이 먼 자가 색을 보듯, 멸진정에 들어간 사람이 들여 마시고 내쉬는 숨을 보듯, 허공에 새 지나간 흔적을 보듯, 석녀(石女)의 아이를 보듯, 허수아비 번뇌를 보듯, 꿈에 본 것을 잠을 깬 뒤 보듯, 윤회를 끊은 이가 사람의 몸 받는 것을 보듯, 불이 없는 연기를 보듯 보살이 중생을 보는 것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문수 : 보살이 이와 같이 본다면 어떻게 자비를 행할 수 있겠습니까?
유마 : 보살이 이와 같이 본다면 스스로 “나는 중생을 위하여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을 설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곧 이것이 진실한 자비입니다.


淨名私記釋 云. 今明觀衆生品大精 只依其中一句行則足 得一句攝心 常照行之 一切萬行足. 只令汝自觀 觀汝身心 如此畢竟空 卽是菩薩觀衆生. 菩薩名道 道能通 通汝色心本性. 令離虛妄 卽是菩薩 菩薩只在汝身中. 觀汝身心如第三手 爲畢竟無身心.


‘정명사기’에서 이를 풀이하여 말하였다. 지금 ‘관중생품’의 요점을 밝히자면 다만 그 이야기 가운데 한 구절만 의지해도 충분하다. 한 구절을 챙겨 늘 잊지 않고 실천하면 온갖 보살행이 그 가운데 다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단지 그대 스스로 그대의 몸과 마음이 필경에 공(空)임을 본다면 곧 보살이 중생을 본다. 보살이 도(道)라고 할 때 도는 통한다는 뜻이니, 이는 그대 ‘몸과 마음의 본디 성품’에 통한다는 것이다. 허망한 생각을 떠나게 하면 곧 보살이니 보살은 다만 그대의 몸 가운데 있다. 그대의 몸과 마음을 존재하지 않는 제삼의 손처럼 본다면 마침내 허망한 몸과 마음은 없다.


원순 스님
강설) 제오대(第五大)·제육음(第六陰)·제칠정(第七情)·십삼입(十三入)·십구계(十九界)와 같은 단어들은 사대(四大)·오음(五陰)·육정(六情)·십이입(十二入)·십팔계(十八界)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말이니 사실 중생계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는 용어이다. 중생을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본다는 것은 허망한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언젠가는 사라질 중생들에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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