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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특강 〈9〉·끝

내 한 몸이 경전을 쓰는 붓 될때 진정한 법공양

불자는 스스로를 관세음보살님의
천수천안 가운데 하나로 자부해야


▲성태용 교수
이제 마지막으로 ‘유마경’의 뛰어난 공덕을 찬탄하면서 이것을 잘 옹호해서 후세에 전하라는 부처님의 부촉이 이어집니다. ‘아촉불품’ 마지막에 “진리를 이해하고 믿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무상정등정각의 수기를 받은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경전에서 말하는 부사의법문, 진리, 불이법문을 믿고 이해하고 지키고 기쁜 마음을 내는 것이야말로 수기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모든 중생들에게 수기를 내리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실천함으로써 부처가 되리라 하는 수기를 받은 것이지요. 따라서 여러분도 이 대목에서 무상정등정각의 수기를 받은 것이 됩니다.


우리는 보통 부처임을 너무 멀리 두는 병이 있는데, 오늘보다 더 멋있는 내일,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 오늘의 나보다 더 멋있어지는 내일의 나, 그 길이 바로 부처되는 길입니다. 그 궁극에 부처님이 있습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꾸준히 지향해 가는 길, 그 완성이 부처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수기를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는 길은 향상일로여야 하고, 향상일로를 가리라는 마음을 내는 것이 대승의 마음을 내는 것이며 그 마음을 내는 순간 여러분은 수기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길을 뚜벅뚜벅 간다는 것이 가장 위대한 신통이고, 거기에는 장애가 붙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부처님께 수기를 받는다는 느낌으로 이 대목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수기를 받은 우리들이 부처님이 수기를 내린 이 경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바로 거기서 법공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로 하여금 부처가 되게 하는 법을 모든 이들과 함께 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법공양입니다. 진리를 담은 경전이 있고, 가르침이 있고, 설해지는 곳이 바로 부처님 계신 곳입니다. 모든 경전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을 그냥 수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오욕락의 세계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즐거움과 쾌락을 주어서 사람을 불러 모으기에 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참 진리를 추구하는 자리, 즉 진리가 이야기되는 자리, 경전이 있는 자리가 부처님 계신 곳입니다. 그러면 신장들이 옹위하게 됩니다. 같은 기운에 응해서 오는 분들이 바로 일종의 호법신중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불성이 언제나 움터 나오는 존재입니다. 거기에 진실한 마음을 기울인다면 그래도 크게 틀리지 않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큰 힘이어야 합니다. 나를 불퇴전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응원군이어야 하는데, 지금 불교는 깨달음이 사람을 주눅들게 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깨달음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그 완전성은 나를 끌고 나가는 힘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나를 주눅들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될 때 이걸 깨달음 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한 깨달음 병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깨닫기 전에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완전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행동은 하지 않는 이 두 가지 양상을 극복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건강한 불교가 설 수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유마경’의 틀 속에서 하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100%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세상과 부딪쳐봐야 하고, 그 불완전성이 드러나면 그것을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 왜 아라한은 성불할 수 없는 썩은 종자라고 했을까요. 이 세상과 해탈계를 둘로 나눠놓고 해탈이라는 세계에 들어가서 머물렀기 때문에 그들은 부처가 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100이라는 영역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는 안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의 종자를 썩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불심 속 거기에 부처님이 오셨으리라 믿고 그 마음으로 ‘유마경’을 읽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함께 나누는 일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공덕입니다. 따라서 재물공양은 법공양의 공덕에 미칠 수 없습니다. 재물은 유루의 공양이고 법공양은 무루의 공양이기 때문에 차원 자체가 다릅니다. 2차원을 아무리 겹친다고 3차원이 되지 않습니다. 유루와 무루의 차원이 다르고 비교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서로 진리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일이고 진리의 벗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과정입니다. ‘100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요, 하루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라는 게송도 있습니다. 그러니 법공양이 최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부촉은 우리에게 하는 것
가르침 널리 펴는건 불제자 의무


법보시를 강조하는 것은 재보시는 법보시를 하면 따라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상식 위에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법을 전하는 것은 소중하지만 옛날 방식과는 달라야 합니다. 지금은 오히려 행동으로 전하고 실천으로 전하는 것이 더 소중한 시대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상을 담지 않은 재보시는 곧 법보시가 됩니다. 법보시 역시 어떤 형태에 구애되면 안됩니다. 경전의 가르침이 나와함께 될 때 법보시의 출발이 됩니다. 그 경전 가르침이 내 몸짓으로 나오는 것이 법보시입니다.


사실은 재보시부터 하는 것이 쉽고, 내 주머니에서 한 푼 내봐야 내 탐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내놓는 그 마음에서 희열이 일어날 때 법보시가 체화되는 것입니다. 경전의 유포도 예전에는 사경을 방법으로 했지만, 지금은 몸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법을 체화하지 않고 어떻게 법보시가 되겠습니까. 내 한 몸이 경전을 쓰는 붓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천수경을 보면서 내가 관세음보살의 천수 가운데 하나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관세음보살의 천개의 손과 눈 가운데 하나로 자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이 보장된 삶이 됩니다. 그래서 법보시도 관념이 달라져야 하고, 법보시가 몸으로 나타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이 내 것이 되어 경의 몸짓으로 나와야 재보시도 법보시도 올바르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에 전체를 다 하려고 하면 아예 못하게 됩니다. 조금씩 가는 길이 중요하고, 그러면 삶이 환해지고 밝아지고 건강해지는 씨앗을 심는 것이 됩니다. ‘공양품’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불세계는 같은 불자들을 늘려가는 것으로 건설해야 합니다. 같은 가르침을 추구하고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 산다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고 행복한 존재들이 살도록 하는 것은 불법을 함께 하는 이들을 늘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불세계를 건설하는 출발점이고, 법보시는 그 필수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촉루품’입니다. 이것은 부촉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로서의 부처님은 오고 감이 없으나, 육신을 다하신 부처님이 가시면서 그 뒤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대표로 아난다와 미륵불에게 부촉하지만 불제자들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촉은 경전에서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후세에 전해서 끊임없이 믿고 따르게 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종자를 전하는 길입니다. 정말로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경전의 끝에는 언제나 부촉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 불제자들에게 하는 것이니,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아난이고 미륵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부촉을 받았다는 마음으로 이 가르침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완악함을 버리고 진리의 길에 동참해서 가르침을 함께 하는 이들을 늘려가고 그들을 호지하고 옹호해서 불법의 세계를 넓혀야 합니다. 불자들이 늘 부족한 것 중 하나가 공동체의식입니다. 불법승 삼보에서 승은 작은 의미에서 출가승단이지만, 넓게 보면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바로 이 승의 확장이 불세계 건설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갖지 않으면 불법이 퍼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불법을 추구해야 한다는 믿음을 바로 세울 때 우리가 부처님 수기를 받은 것입니다.


불법은 큰 바탕,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큰 대도라는 바탕에서 털끝만큼도 어그러지지 않는 옳음을 세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부처님이 큰 부촉을 했으니, 여러분은 전 장에서 수기도 받은 만큼 성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촉을 너무 무겁게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오늘보다 더 멋진 내일,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나, 오늘보다 더 완전에 가까워진 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내 삶의 모습에 부처님을 겹쳐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은 영원히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당신이 됩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부촉은 “행복한 존재가 되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 하고 씨앗이 움틀 수 있는 조그만 출발이 되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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