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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총림 방장 송원 설정 스님

하심은 깨달음에 이르는 복전 좌복서 죽을 각오로 정진하라

무상·선농일치 덕숭가풍
경허·만공·원담 이어 계승

일체중생 구제복덕 없으니
방장직에 있어도 행자일 뿐

 

 

덕숭총림 수덕사 대웅전을 지나 정혜사 향적당(香積堂)으로 오르는 겨울 산길은 녹록치 않았지만, 푸른 소나무와 하얀 눈이 어우러진 설산이 주는 웅장함과 수려함에 힘겨움은 이내 환희로 바뀌었다. 산 중턱에 이르니 저쪽 편에 작은 암자가 보인다. 만공 선사가 수행정진했던 소림초당(小林草堂)이다. 그 곳으로 이어지는 갱진교(更進橋)도 눈에 들어온다. '다시 나아가는 다리!' 소림초당을 오가는 길목에서도 만공 스님은 ‘정진의 정진’을 다짐했으리라.

선지식 경허 선사가 주석했던 도량 수덕사. 근현대를 빛낸 세 개의 달, 즉 수월(水月), 혜월(慧月) 그리고 월면(月面 萬空)이 모두 경허 선사의 제자들이다. 수월은 북간도에서, 혜월은 남녘땅에서 그리고 월면 만공 스님은 그 중간 지점인 수덕사를 중심으로 법을 펼쳤다. 만공 스님 문하에는 혜암, 벽초, 원담 스님이 있었으니 총림으로서의 손색이 없음은 물론이고, ‘선지종찰(禪之宗刹)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이라 불릴 만하다.

원담 스님이 원적에 든 후 대나무처럼 곧고, 소나무처럼 강직하면서도 연꽃 같은 미소를 머금은 송원 설정(松原 雪靖) 스님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여덟 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어야 했고, 천식으로 약해진 몸이었기에 1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다시피 했던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불공을 올리기 위해 수덕사를 찾았다. 부친은 만공 선사로부터 계를 받았을 정도로 신심 돈독한 불자였는데, 서암 스님과의 왕래가 잦았다하니 부친의 학식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곳에서 희유한 일이 벌어졌다. 산사에 있는 동안 그토록 자신을 짓눌렀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소년은 그대로 절에 머물렀다. 부친은 아들의 출가를 예견이라도 한 듯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어머니는 “출가 시킬 수 없다”며 찾아왔지만 그 때마다 13세 소년은 숨어 버렸다. 이후 7년 동안 단 한 번도 속가로 발길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당시의 수덕사 선풍에 비춰볼 때 한 선원에서 정진하던 스님이 강원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설정 스님은 직지사, 해인사 강원으로 향했다. 군 제대 후 환속하는 스님을 많이 보았던지라 입대 전 동화사 비로암에서 7일 동안 ‘제대 후에도 부처님 제자로 살겠다’고 서원했다. 독학으로 대학에 입학해 ‘사찰경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원예학을 전공한 이례적인 경력을 소유하기도 한 스님.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두 번 연임한 후 “총무원장에 나서달라”는 대중의 뜻도 뒤로하고, 걸망 메고 선방으로 발길을 돌렸던 스님. 매서운 설풍이 휘몰아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만 같은 수좌의 풍모가 짧은 이력에서도 읽혀진다.

수덕사에는 부도탑이 없다. 일찍이 “사리를 취하는 놈은 마구니”라 일갈한 만공 스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단순히 사리에 천착하지 않기 위한 방편만은 아니다. 설정 스님은 ‘무상(無相)’의 뜻이 배어있다고 한다.
“금강경에서도 4상에 얽매이지 말라 했지요. 그 중에서도 아상(我相)의 집착부터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상(無常)을 알고 중도연기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상을 깰 때 바로 깨달음과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된다고 선지식들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일까? 방장에 오른 설정 스님은 스스로 ‘방장 행자’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굳이 이 뜻을 풀이하면 방장이지만 행자처럼 살겠다는 것인데 하심(下心)이라 해야 할까? 

 

▲만공 스님이 수행했던 ‘소림초당’. 갱진교를 건너면 이 곳에 닿는다.

 

“아닙니다. 저는 부처님 경지에 오르려는 수행인일 뿐입니다. 일체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지 못해 정진하고 있으니 저 역시 행자일 뿐입니다. 하심은 방장이든, 조실이든, 수좌든, 재가불자든 모두 행해야 하는 실천 사항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 같지만 하심은 도(道)로 들어가는 복전이요, 지름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설정 스님은 방장에 오르기 전 당간 41년 유교법회(遺敎法會)를 조명하는 연찬회에서 “조계종은 외형상 많은 발전을 했으나 내용이 없는 위기의 교단”이라며 출가 대중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우리 교단은 구성원 모두가 안일과 비승가적 모순에 빠져 있으며, 물질과 명리에 집착하고 있어 국민에게 신망을 잃고 사부대중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고 일갈한 스님은 “이젠, 성찰해야 할 때”라고 일침을 놓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스님의 위의와 교양마저 의심받는다면 곤란합니다. 왜 의심받는지,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다 압니다. 탐욕과 분노의 쓰레기를 버려야만 합니다. 산문에 들어서면서 일으킨 초발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삼세출가의 원대한 뜻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대도를 이루겠다는 굳은 의지와 신심을 잃는다면 그 누가 스님을 신망하고 신의하며, 신탁하고 신용할 수 있겠습니까?” 

설정 스님은 ‘스님이 스님다울 때’ 승가에 대한 신의가 두터워진다고 했다. 그 신의를 바탕으로 사부대중이 단결할 수 있으며, 그 단결 속에서 불교의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법문(法門)의 흥함과 기울어짐도 승려들에게 달려 있다’는 종색 선사의 일언이 스쳐간다. 불교중흥의 원동력이 ‘승가의 품격’에 있음을 직시한 일언이다.  지난해 수좌회도 ‘선원청규’를 새롭게 마련해 발표했다. 이 또한 청정수행 풍토를 조성하자는 원력에 따른 것이었다.

“참으로 많은 애를 썼습니다. 작금에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사례까지 감안해 제정했더군요.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실천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청규가 있어도 안 지키면 무슨 소용입니까? 청규 만드는 사람 따로 있고, 지키는 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소소해 보이는 청규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수덕사는 ‘선농일치’, ‘주경야선’ 가풍을 철저하게 지켜가고 있다. 선방에서 수행하는 수좌들도 하루 일하지 않으면 밥을 공양할 수 없다. 설정 스님이 채공과 공양주 소임을 맡을 당시만 해도 ‘삼 홉’이상의 밥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곡식을 내어주는 스님이 딱 그 만큼만 내어주었지요. 하지만 대중은 아침공양 마치자마자 저녁 예불 전까지 일했습니다. 산내 경작지를 돌보는 것은 물론이고, 개울가의 돌도 일일이 치워가며 전답으로 일궜어요. 피곤함에 금방 잠에 떨어질 만도 한데 저녁예불이 끝나면 곧바로 방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습니다. 새벽 3시 이전에 일어나 수행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삼세출가 정신 잃는 순간
위의·신의도 땅에 떨어져

아상 끊고 중도 체득하면
생사일여 활로 보일 것

설정 스님은 ‘공부를 하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거나, 일을 하기 때문에 정진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우리 승가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근래 들어 이판과 사판을 나누려 하는데 잘못된 겁니다. 이(理)와 사(事)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나입니다. 행정일 본다고 정진할 수 없다는 건 핑계일 뿐입니다.”

출가 전에도 병고를 치렀던 스님은 종회의장 직을 내려놓은 직후에도 치명적인 병고를 치러야만 했다. ‘암’이었다. 몸무게는 줄어 50Kg밖에 나가지 않았다. 총무원장에 나설 것인가 하는 중차대한 결정을 앞둔 시점에 찾아 온 병고였다.

“인과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하려니 찾아온 겁니다.”
설정 스님은 부처님께 ‘이번에 다시 한 번 살아난다면 진정한 수행자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살았습니다! 봉암사 정진부터 살도 좀 붙었습니다. 이젠, 방석 위에서 죽어도 여한 없습니다.”
스님은 그 큰 ‘병고’를 인과의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참회와 정진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약과 병원 치료는 그 다음 일이다. 자신에게 찾아 온 병고를 어떻게 보고 맞서야 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는 대목이다.

김영삼 정부 당시 중앙종회 의장이었던 설정 스님은 정부의 종교편향에 의연하면서도 강단있게 대처했었다. 불교계 지도자 청와대 조찬 초청에도 “정부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도 없는 상황에서는 가지 않겠다”며 딱 잘라 거절한 스님이 설정 스님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도 이와 다르지 않는 가운데 개신교의 불교폄훼도 잇따르고 있는 상황이다.

“자신의 종교관에만 따라 이웃종교를 무시하며 정도를 걷지 않는 공직자는 이미 실격입니다. 다종교, 다문화를 보호해야 할 책무는 정부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 수장이 종교편향적이라면 이는 종교갈등을 부추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봉은사 땅 밟기 경우 하나만 보더라도 일부 개신교도는 각성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공동선은 이해와 배려에서 시작됩니다. 그럼에도 이웃종교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건 신앙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장사꾼 신앙인’일 뿐입니다. 남북동서 갈등이 아직도 극심한데 여기에 종교 갈등까지 가세할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향적당에서 바라 본 정혜사. 설경 속의 산사가 ‘선경’의 일미를 전하는 듯하다.

 

설정 스님은 불자들에게 팔정도를 닦아 가는데 매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팔정도 속에 법음의 진면목이 있다는 스님은 “그 속에서 분명 생사일여의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확언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피어나는 연꽃처럼 살겠다”는 스님은 ‘무소의 뿔처럼’ 자신이 선택한 길을 굳건히 걸을 것이다. ‘방장 행자’처럼 살겠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스님이 좋아하는 선구 하나를 부탁드렸다.

외로운 달 홀로 비쳐 강산이 고요하니 혼자 웃는 외마디에 천지가 놀란다.
(孤輪獨照江山靜 自笑一聲天地驚)

봉림 선사의 선문답(유사)에서 임제 스님이 전한 일언이다.

설정 스님은 언젠가 ‘쇠 나무에서 꽃이 피고, 불 속에서 연꽃이 자라난다’는 철수개화 화중생연(鐵樹開花 火中生蓮) 도리가 바로 선이자, 불법의 요체라 했었다. 달이 삼라만상을 비추듯 내 마음이 어디를 비추고 있는지부터 가늠해 가다보면 화중생연의 도리를 알아 혼자 웃을 수 있을까! 문 밖을 내어다 보니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설산에 핀 연꽃의 향기가 향적당에 가득하다. 

채한기 상임논설 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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