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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번뇌 사라져야 태양 같은 지혜 떠오른다

기자명 법보신문

마음에 높낮이 있으면 갖가지 차별이 생긴다
두려움없는 법 깨달으면 기쁨가득한 곳 태어나리

▲안중식作. 대환희도. 간송미술관 소장.

58. 범부와 성인의 개념을 떠난 마음


肇法師云 萬事萬形 皆由心成 心有高下 故丘陵是生. 又云 佛土常淨 豈待變而後飾 蓋是變衆人之所見耳. 是以 衆生見爲土石山河 皆是自業之影起 菩薩純爲妙慧 卽是眞智之所爲. 離凡聖心 無眞俗境.


승조(384~414) 스님은 “온갖 일과 온갖 모습이 다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마음에 높고 낮음이 있으므로 온갖 차별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또 “부처님의 국토는 늘 맑고 깨끗한데 어찌 이것이 변하기를 기다려서 그런 뒤에 아름답게 꾸민다고 하는가. 대개 중생의 소견이 변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중생의 견해로 흙, 돌, 산, 강을 보는 것은 모두 스스로가 지은 업의 그림자에서 일어난 것이며, 보살의 순수성이 오묘한 지혜가 되는 것은 그대로 참다운 지혜가 하는 일이다. 범부이다 성인이다 하는 개념을 떠난 마음에는 세간과 출세간을 경계로서 차별하는 마음이 없다.


如華嚴論 云. 此華嚴經 明緣起法界門 理事無二 無緣不寂 無事不眞. 十方世界 一眞性海 大智圓周. 爲國土境界 總爲性海 爲一眞法界 非有情無情隨業說故 爲華嚴中 純眞境界 總爲智故. 十住菩薩 以慧爲國 十行菩薩 以智爲國 十迴向十地 以妙爲國. 不說情與無情 二見差別 以華嚴經 爲彰本法 異三乘權學敎故. 是無情是有情 有生有滅故.


이는 ‘화엄론’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화엄경’에서 인연으로 일어나는 법계에는 이(理)와 사(事)가 다른 것이 아님을 밝히니, 어떤 인연도 공적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떠한 현상도 진여 아닌 것이 없다. 시방세계가 하나의 참성품으로서 바다를 이루니 큰 지혜가 오롯이 두루 하다. 국토의 경계가 되어 전체가 진여 성품의 바다가 되고 하나의 참법계가 되니 유정이나 무정이 업에 따라 법을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엄에서 참으로 순수한 경계가 되어 모두 부처님의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십주(十住) 보살은 번뇌가 다 사라진 마음을 삶을 의지하는 국토로 삼고, 십행(十行) 보살은 번뇌가 다 사라진 자리에서 나오는 태양 같이 밝은 지혜를 보살의 삶을 실천하는 국토로 삼으며, 십회향(十向)과 십지(十地) 보살은 보살행을 실천해도 실천한 바가 없는 오묘한 도리를 국토로 삼는다. 유정과 무정의 다른 견해를 설하지 않고 화엄경으로 본디 법을 빛나게 하는 것은 삼승(三乘)의 방편으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과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정이다 무정이다 하는 것은 생(生)하고 멸(滅)함이 있기 때문이다.


강설) 한문본문 ‘이혜위국(以慧爲國)’에서 ‘혜(慧)’는 중생의 시비분별을 다 쓸어버려 중생의 번뇌가 다 사라진 마음자리를 말한다. ‘이지위국(以智爲國)’에서 ‘지(智)’는 중생의 번뇌가 다 사라진 마음자리에서 태양 같이 밝은 부처님의 지혜가 떠오른 것을 말한다.


59. ‘두려움이 없는 법’을 닦았기에


夫一切諸法 隨緣幻生 體用俱無. 隱顯互起 或多中現一 一中現多. 若不知起盡之根由 則任運 但隨境轉 或隨好境而忻集 或逐惡緣而怖生. 若能明了一切凡聖等法 悉是自心境界 以此一印 衆怖潛消. 所以 持地經云 佛告阿逸多菩薩 於一切法 於一切菩薩法 莫生恐怖. 於一切辟支佛法 亦莫恐怖. 於一切聲聞法 亦莫恐怖. 於一切凡夫法 亦莫恐怖 乃至 於靜於亂 亦莫恐怖. 於假於實 亦莫恐怖. 於信不信 亦莫恐怖. 於善念不善念 亦莫恐怖. 於住不住 亦莫恐怖. 如是菩薩 於一切法 莫生恐怖. 阿逸多 我於往昔 修如是等無畏法故 得成正覺 悉能了知一切衆生心之境界 而於所知 不起知相. 以我所證 隨機演說 能令聞法諸菩薩等 獲得光明陀羅尼印. 得法印故 永不退轉. 釋曰 了一無畏法 能除五怖畏 入此一心門 當生歡喜地.


모든 법은 인연 따라 허깨비처럼 생겨나 그 바탕과 작용이 모두 없는 것이지만, 사라졌다 나타남이 번갈아 일어나니, 혹 많은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고 하나 가운데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만약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근본 이유를 알지 못하면 삶의 흐름이 다만 경계를 좇을 뿐이니, 좋은 경계를 따라 좋아하고 나쁜 인연을 좇아 두려움을 낸다. 만약 모든 범부와 성인들의 법이 모두 자신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경계인 줄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이 깨달음으로 모든 공포를 잠재운다. 그러므로 ‘지지경’에서 부처님은 아일다 보살에게 말하였다.


온갖 법 모든 보살의 법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벽지불의 법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성문의 법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범부의 법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 고요한 곳이나 산란한 곳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거짓이나 진실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이나 믿음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착한 생각이나 착하지 않은 생각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어떤 경계에 머물든 머물지 않든 간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법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아일다여, 내가 옛날 이와 같은 ‘두려움이 없는 법’을 닦았기에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중생의 경계를 다 알 수 있었고, 아는 곳에서 ‘안다는 집착’을 일으키지 않았다. 내가 증득한 것으로써 중생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하여, 법을 들은 모든 보살이 ‘광명 다라니’를 얻게 하니,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들은 영원히 법에서 물러나지를 않았다. 이를 게송으로 설명하겠노라.


두려움이 없는 법을 깨닫게 되면
죽음 같은 온갖 공포 제거가 되니
두렴 없는 한마음에 들어간다면
기쁨으로 가득한 곳 태어나리라.


60. 번뇌 없는 깨끗한 지혜로서 참다운 모습


不動眞際 建立諸法 則性不可壞 不壞假名 而說實相 則相不可壞. 斯則 天魔外道等 皆法印故 無能壞. 且五逆四魔 尙法界印 況無漏淨智一眞相好 而能障實相之妙旨耶.


‘진제(眞際)’를 움직이지 않고 모든 법을 펼치니 근본 성품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임시로 드러난 개념을 파괴하지 않고 ‘실상(實相)’을 설하니 어떠한 모습도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니 천마나 외도도 모두 ‘법인(法印)’이므로 파괴할 수 없다. 오역죄와 온갖 마구니조차 ‘법계인(法界印)’인데 하물며 ‘번뇌 없는 깨끗한 지혜로서 참다운 모습’이 실상의 오묘한 종지를 어찌 장애할 수 있겠는가.


강설) 진제(眞際), 실상(實相), 법인(法印), 법계인(法界印), ‘번뇌 없는 깨끗한 지혜로서 참다운 모습[無漏淨智一眞相好]’, 오묘한 종지[妙旨], 실제(實際), 보리(菩提)는 모두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부르는 명칭이다.


61. 한 법도 진실한 이치 아닌 것이 없다


寶積經云 化樂天王白佛言 世尊 彼實際者 遍一切處 無有一法而非實際. 世尊謂 菩提者 亦是實際 世尊 何者是菩提. 一切法是菩提 離自性故 乃至 五無間業亦是菩提. 何以故 菩提無自性 五無間業亦無自性.


‘보적경’에서 화락천왕이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진실한 이치가 모든 곳에 두루 하여 한 법도 진실한 이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존께서 ‘깨달음 또한 진실한 이치’라고 하시는데,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깨달음입니까?”라고 물으니, 세존께서는 “모든 법이 깨달음이니 ‘자성’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나아가 다섯 가지 무간지옥의 업도 깨달음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에는 ‘자성’이 없고 다섯 가지 무간지옥의 업도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무간지옥의 업도 깨달음이다.”라고 답하였다.


是故 無間業亦是菩提. 是以 了心本性 自體無生 從無生中 建立諸法. 觀無性之心 說無性之敎. 隨淨緣而無性成佛 隨染緣而無性爲凡. 不見纖塵 暫出性空之理 未有一念 能違平等之門. 所以 大般若經 偈云 有法不成有法 無法不成無法 有法不成無法 無法不成有法.


이 때문에 마음의 본디 성품을 알면 스스로의 바탕에 생멸할 것이 없고, 생멸할 것이 없는 데서 세상의 온갖 법이 펼쳐지니, ‘자성’이 없는 마음을 보고 ‘자성’이 없는 가르침을 설한다. 깨끗한 인연을 따라 ‘자성’이 없이 성불하고 오염된 인연을 쫓아 ‘자성’이 없이 범부가 된다. 아무리 미세한 번뇌라도 ‘자성’이 공(空)이라는 이치에서 잠시도 벗어난 것을 보지 못하고, 한 생각도 평등한 도리에 어긋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대반야경’ 게송에서 말한다.


법이 있다면 법이 있는 것을 만들지 않으며
법이 없다면 법이 없는 것을 만들지 않으리
법이 있다면 법이 없는 것을 만들지 않으며
법이 없다면 법이 있는 것을 만들지 않는다.


강설) 실제(實際)는 보리(菩提)이니 곧 깨달음이고, 이 깨달음은 ‘자성(自性)’이라 결정되어지는 온갖 고정관념을 벗어나 있다. 이 단락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기에 온갖 집착이 끊어진 부처님의 영역에서 하는 소리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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