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하기도 하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잘못을 시인하기는커녕 처음부터 끝까지 변명으로 시작해서 끝나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많은 사람의 목숨이 아닌 소의 목숨이 달린 이번에 ‘구제역 파동’은 또 어떻게 수습될지 모르지만 잘 처리되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발원한다.
대개의 황소 누렁이는 고향 노부모님들에게는 가축 이상의 감정이 있어 한 집안에 사는 식구처럼 여겨 왔다. 대를 이어 몸을 바쳐 주인집 아이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담당했던 누렁이. 모두 시골 고향집 노부모님들에게는 크나큰 재산이기도 했다.
며칠 전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송아지가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지 자꾸만 자신을 키워주던 할머니 등 뒤로 숨으며 ‘엄매’하고 울고, 그 모습을 본 식구들이 송아지를 끌어안고 울었다는 짤막한 기사를 읽고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어린 송아지를 죽게 만든 것은 어찌보면 모두 사람 때문이다. 이기심 많은 우리 인간들 같으면 저런 상황에서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억울하게 모두 죽는다’고 원망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소들은 길러준 주인을 원망하지 않고 주인의 등 뒤에 숨어, 죽는 순간까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고 한다. 그 소는 주인이나 우리들을 용서하고 갔을까.
아무튼 나를 울린 소의 영령들에게 극락왕생하라고 두 손을 모으고 싶다. 불교에서는 소의 열 가지 모습으로 마음 닦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흔히 십우도(十牛圖) 또는 심우도(尋牛圖)라고 불리는 그 그림은 산중 절간에 사는 중에게도 큰 감화를 준다.
몇 년 전부터 협상을 한다하면 소가 등장하고, 정치 싸움에도 소가 등장을 하더니 이런 끔찍한 구제역이 발병해 벌써 몇 십만 마리의 소가 살처분 되는 일이 생겼다. 우리가 저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죽음을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기에 우리는 소로부터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다. 아무리 먹고 싶어도 이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라도 고기를 당분간 먹지 않아도, 인간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느 날 바랑을 지고 가을 들판 길을 걷던 비구는 누렇게 고개 숙인 벼를 만지작거리다가 벼 몇 알을 떨어뜨렸다. 비구는 깜짝 놀라 살펴보니, 그 때 곧바로 농사지은 농부에게 땅에 떨어뜨린 벼 낱알에 대한 빚을 갚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비구는 곧 황소로 변화하여 그 주인집의 농사를 도와주었다. 왜 그리 소중했을까? 한 톨의 낱알 속에는 수많은 농부의 수고도 숨어 있겠지만 곡식이 사람의 목숨을 부지하도록 하는 소중함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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