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불교순례] 7. 사막 위에 꽃피운 벽화의 도량 둔황 막고굴 〈끝〉

기자명 법보신문

신심으로 쌓아 올린 모래 위 불국토의 꿈

 

▲130호 굴에 조성된 당나라 시대 대불. 막고굴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으로 크기가 25m에 이른다.

 

 

난주에서 기차를 타고 낮과 밤을 번갈아 달려 오아시스의 도시 둔황(敦煌)에 도착했다. 조금씩 엷어지던 초목의 풋풋함이 누런 황야로, 마침내 모래가 휘날리는 황량한 사막으로 변해갈 무렵 그림처럼 아름다운 도시 둔황이 신기루처럼 일행을 맞이한다.


둔황은 중국의 서쪽 영토가 끝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서역으로 향하는 실크로드의 시작이기도 하다. 중국 장안을 출발한 현장 스님이 이곳을 거쳐 인도에 들어갔고, 인도를 떠난 혜초 스님도 여기에 들러 목을 축이고 중원으로 돌아갔다. 가물거리며 펼쳐진 모래와 타는 목마름. 하얀 해골만이 즐비한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 사막. 그 아수라 같은 땅을 가까스로 벗어난 사람들만이 물과 향기로운 음식, 미녀들의 웃음이 넘치는 도시 둔황에 들어 올 수 있었다.


중국과 서역,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사통발달의 요충지인 까닭에 전쟁도 잦았다. 중국 중원과 북방의 유목민, 남쪽의 티베트의 역대 왕조와 민족들은 달콤한 도시 둔황을 차지하기 위해 창칼을 맞댔고 땅의 주인은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다 진나라 이후 다시 중국을 통일한 수·당이 둔황을 장악하면서 화려한 비상은 시작됐다.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무역은 호황을 누렸고, 둔황은 세계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서역에서는 유리와 보석, 금과 은이 끊임없이 낙타 등에 실려 들어왔고 중원에서는 비단과 각종 공예품이 쉴 틈 없이 말에 실려 왔다. 다른 옷, 다른 얼굴, 다른 언어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금은보화가 넘쳐났다. 그 풍요 위에서 불교문화 또한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그러나 강대하던 당나라도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서서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덩달아 둔황 또한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위구르, 서하, 투루판, 티베트 등 땅의 주인이 무수히 바뀌면서 둔황은 점차 쇠락한 도시가 되어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둔황은 20세기 초 다시 화려한 부활을 시작했다. 1900년 둔황의 막고굴(莫高窟)에서 방대한 양의 고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이후 미려한 벽화와 조각, 수많은 불상들이 연이어 세월의 장막을 걷어내고 뽀얀 얼굴을 드러내면서 세계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작은 오아시스 도시 둔황은 세계 미술사의 보고로, 불교문화의 꽃으로 새롭게 주목받게 됐다.


운강, 용문 등 중국 3대 석굴 중 으뜸인 막고굴은 둔황의 중심지에서 대략 25km 떨어져 있다. 가는 길은 종착지가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모래와 하늘이 입을 맞댄 지평선이 멀리 보이고, 가끔씩 나타나는 작은 모래산과 가시덤불이 대지의 밋밋함을 달래고 있다. 30분 정도, 늘어진 시선이 무료해질 쯤, 쪽빛처럼 푸른 하늘 아래로 늘씬한 백양나무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그 끝에서 황토색의 거대한 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50m정도의 얕은 구릉 같은 산은 발밑으로 작은 개울을 끼고 수많은 석굴을 품에 안은 채 대지의 여신처럼 옆으로 길게 누워있다.


일주문 격인 고풍스런 누각을 지나 숲 같은 길에 들어서자 석굴은 조금씩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을 위압하듯 엄청난 규모로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장대한 세월과 아름다운 신심이 어우러져 쌓아올린 사막 위의 도량, 막고굴이다.


1900년 장경굴 발견으로 주목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해 수많은 고문서가 쏟아졌던 17호 굴. 일명 장경동이라 불린다. 고문서가 사라져 텅 빈 공간엔 이 굴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홍변 스님의 좌상이 모셔져 있다.

 


막고굴은 366년 낙준(樂樽) 스님이 둔황의 삼위산(三危山)에서 멀리 명사산(明沙山)자락이 석양에 비춰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옮겨가 굴을 파고 수행도량을 조성하면서 비롯됐다. 석굴은 5호16국 시대를 보내고 수당 시대를 지나 14세기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때까지 1000년간 쉼 없이 조성됐다.


역대 왕과 권력자에서 이름 없는 스님과 석공, 화가, 가난한 민초들까지 끊임없이 굴을 뚫어 도량을 만들고 그 안을 장엄했다. 벽에는 강바닥에서 채취한 고운 진흙을 발라 바탕을 만들고 그 위를 도화지 삼아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화려한 안료로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냈다. 또 그 안에는 무수하게 많은 불보살을 조성하고, 당시의 풍속과 생활상도 기록하듯 담아냈다. 이렇게 해서 남아있는 굴은 모두 1000여개. 황량한 사막의 모래 바람 위에 아름다운 불국토를 화현시킨 것이다. 산은 남북으로 1.6km에 이른다.


그러나 너무나 방대한 규모에 현재까지도 492개의 석굴만이 조사를 마친 상태다. 그런데도 절반에 불과한 석굴에서 현재까지 2500여체의 불상이 발견됐다. 석굴 안 벽화의 총면적도 무려 4만5000㎡. 이를 떼어내어 일렬로 이어 붙이면 22.5km에 이른다. 세계 최대의 벽화미술관이라 해도 결코 손색이 없다.


막고굴은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벽화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인데 갈수록 건조해지는 기후 변화로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석굴 안은 다른 조명 없이 가이드의 손에 들린 손전등에 의지해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어가 유창한 중국인 가이드의 안내로 막고굴의 정문격인 구층 누각의 96호 굴에서부터 순례가 시작됐다. 이곳은 둔황에서 가장 큰 불상이 있는 곳으로 흔히 북대불(北大佛)로 불린다. 대불의 높이는 35.5m로 세계에서 4번째로 크다. 너무나 거대해서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없고 굴도 너무 좁아 답답할 지경이다. 대불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가 꺾일 만큼 젖혀야 하는데, 거대한 바위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아름다운 채색을 해 조형미가 뛰어나다. 특히 가사 대신 곤룡포를 입고 있어 측천무후의 모습을 본뜻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처럼 거대한 대불을 어떻게 좁은 굴 안에 조성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96호 굴에 이어 들른 148호 굴은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굴은 고요한 정적과 슬픔, 그리고 미적인 아름다움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른 팔을 머리에 대고 조용히 누워 계신 부처님. 석굴암 부처님과 너무나 닮은 그 미소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열반상의 모습은 세상의 경건함과 고요함을 모두 모아 놓은 듯 일행의 숨소리에도 죄송함이 밀려든다. 특히 열반상 주변 벽화에는 합장을 하고 서있거나 가슴을 치며 울거나 탄식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스승을 떠나보내는 슬픈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올라 가슴이 절로 먹먹해 진다.


미로 같은 계단을 다시 오르고 내려 259호 굴로 스며들었다. 1m가량 남짓의 북위 시대 선정불은 깊은 명상에 든 채 웃는 듯 마는 듯 절묘한 미소로 동방의 ‘모나리자’라는 애칭으로 불리는데, 손전등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온화한 미소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초기인 5호16국 시대의 굴에서는 불상과 의상, 화풍에 서역의 맛과 멋이 잔상처럼 담겨 있다. 풍만한 몸과 서구적인 얼굴, 중성성이 강조된 보살상. 특히 무엇보다 방형의 기둥을 중심으로 사방에 감실을 뚫어 불상을 안치하는 인도의 전형적인 석굴 양식은 인도에서 서역을 통과해 중국으로 들어오는 중국 초기 불교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세계 최대·최고의 벽화미술관

 

 

 


그러나 수·당시대를 거치면서 불상과 벽화에는 중국화의 모습이 짙게 나타난다. 거대하면서도 미려한 불상들. 얼굴 모습과 복식도 중국풍으로 바뀌었다. 특히 벽화는 초기의 고졸한 모습이 사라지고 정교하면서 화려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또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송·원 시대로 내려가면 색감의 화려함은 빛을 잃고 조형미에 있어서도 쇠락함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막고굴에는 둔황과 우리와의 교류 흔적도 남아있다. 서위시대 석굴인 249호 굴에는 고구려의 벽화에서 보았던 수렵도와 아주 유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고 237호 굴에는 조우관을 쓰고 티베트왕의 행렬에 사신으로 참석한 신라 왕자의 당당한 모습이 살갑게 담겨 있다. 핏줄의 끌림이 이런 것일까. 머나먼 이역만리 둔황에서 옛 조상을 만났다는 감동은 순례 내내 가시질 않았다. 뜨거운 태양과 어두운 동굴을 수차례 들고나기를 반복하며 열 개의 석굴을 참배한 끝에 드디어 17호 굴 앞에 섰다. 16호 굴 입구 오른쪽에 있는 17호 굴은 신라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중요한 많은 고문서들이 발견된 곳이다.


19세기 왕도사란 인물에 의해 발견된 17굴은 소문을 듣고 달려온 오렐 스타인, 폴 페리오, 랭던 워너 등 서구의 제국주의 수집가들과 일본 오타니 탐험대에 의해 수만 점의 고귀한 문서들이 탈취 당했고, 그 결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엄청난 양의 고문서들이 쏟아졌다는 의미에서 장경동(藏經洞)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서구 수집가들이 약탈해간 문서들은 경전과 불화, 호적문서, 계약문서, 악보, 여행기 등 당시의 불교사상과 문화, 생활상을 담고 있는 귀중한 문서들로 한문,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는 인류문화의 소중한  타임캡슐이다.


뒤늦게 중국 정부는 막고굴 옆에 전시관을 따로 마련, 탈취당한 고문서의 사본과 서구 수집가들의 사진을 걸어 놓고 ‘도적들’이라며 핏대를 올리고 있지만 중국의 소수민족이 받고 있는 문화파괴와 차별을 생각하면 쉽게 맞장구를 쳐주기엔 마음이 선 듯 내키지 않는다.


산처럼 쌓여있던 고문서들이 사라져 텅 비어 버린 17호 굴 장경동 안에는 굴 조성을 주도했던 홍변 스님의 좌상이 놓여있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양 옆으로 부채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시자와 시녀의 벽화가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겨우 10여개 남짓 석굴을 둘러보는 것으로 둔황의 순례는 아쉽게 끝났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내리 쬐던 해가 풀이 많이 죽었다.


망망한 모래에 새겨진 물결 같은 잔무늬가 바람과 허공이 만나 나눈 대화의 기록이라면 둔황은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스님과 불자들이 세월에 부대끼며 남겨놓은 아름다운 흔적일 터. 막고굴 밖 늘씬한 백양나무 위로 파란 하늘이 옛 것으로 푸르다. 

 

 

▲막고굴에서 고불의식을 갖고 있는 순례단.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