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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적 포퓰리즘과 근본적 포퓰리즘

기자명 법보신문
  • 법보시론
  • 입력 2011.01.24 14:37
  • 수정 2011.02.07 12:25
  • 댓글 0

작년 말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안을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포퓰리즘’이란 말이 정치적 문제로 떠올랐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올해 예산에서 복지예산이 많아서 한국은 이미 ‘복지국가’ 수준이라며, 복지에 대한 야당이나 시민들의 요구를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그 말은 정치적 비난의 용어로 자리 잡게 된 듯하다. 이 경우 ‘포퓰리즘’이란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그들의 욕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지칭하는 것 같다.


알다시피 포퓰리즘이란 ‘인민’ 내지 ‘민중’으로 번역되는 ‘피플’에 ‘이즘’이란 말을 덧대어 만들어진 말이다. 직역하면 ‘인민주의’ 내지 ‘민중주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고 보면 그 말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1970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치며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이후,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수많은 대학생이나 지식인들이 ‘민중 속으로’ 들어갔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시도들을 예전에는 ‘민중주의’라고 불렀다.


자기만의 삶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 자신들의 삶이 가능하도록 버티어주는 사람들, 그렇지만 고통스런 삶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과 함께 하려는 이러한 태도에서 어떤 사람들은 ‘보살의 마음’을 보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마음’을 읽었다.

 

한편 ‘인민’을 뜻하는 러시아어 ‘나로드’에 ‘이즘’이란 말을 붙인 나로드니즘은 러시아에서 짜르(황제)의 전제정에 반대하는 이념이나 운동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사회변화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맑스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인민에 대한 애정이나 열정에 관한 한, 레닌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슬로건인 ‘브 나로드(인민 속으로)’라는 말은 30년대 심훈의 ‘상록수’ 같은 민족주의적 소설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번역이란 언제나 어떤 의미를 지우고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게 마련이고, 그렇기에 ‘민중주의’나 ‘인민주의’와 포퓰리즘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할 순 없는 일이다. 그러나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고통과 희망을, 욕망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정치적 입장이 아무리 달라도 비난하기 힘든 것이다.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언제나 올바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아닐 지라도, 그것 없이는 정치가 정치가나 통치자의 자의와 독단으로 귀착되는 것을, 혹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이나 이권을 위한 담합으로 귀착되는 것을 피할 길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민중이나 국민들이 원하는 것에 마음을 열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모든 정치의 출발점이라고 해야 한다.


포퓰리즘이 피플의 욕망을 정치의 기초로 삼으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런 출발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포퓰리즘이란 말을 비난의 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것과 달리 무엇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지 주시해야 한다.


가령 지금처럼 실업자와 비정규직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먹고사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게 된 시절에, ‘복지’나 생존을 유지하는 문제에 귀기울이는 게 포퓰리즘이라면, 그걸 나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민 대부분이 중단하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목소리를 ‘생까고’ 건설업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며 미친 속도로 강을 ‘개발’하는 게 정치의 목표가 된 지금, 정작 필요한 건 근본적 의미의 포퓰리즘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진경 교수
물론 폼 나는 분수와 야간조명으로 장식을 하고, 그럴듯한 모양새로 청계천이나 남산자락을 뜯어고치는 것 밖에 생각해본 적이 없는 분들에게 포퓰리즘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포퓰리즘이 ‘망국적’인 것은, 자신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해본 것이 그런 포퓰리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진지한 포퓰리즘이야 그만둔다고 해도, 민중의 거대한 요구를 무시하는 턱없는 건설업자의 독선에 미래를 맡기는 쪽보다는 차라리 민중의 생존과 복지를 위해 ‘망국적 포퓰리즘’을 시험해보는 쪽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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