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운사 주지 호성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무념·무상·무주로 새 시대 리더 되자

 

 

 

반갑습니다. 함께 수계 받고 함께 수행했던 봉은사 주지 스님과의 인연으로 오늘 법석에 오르게 됐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준비해 온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으로 법문을 대신할까 합니다.


먼저 불자라면 ‘나는 누구인가’를 항상 고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일까요. 지금 보이는 이 몸이 나일까요. 아니지요. 진정한 나라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항상 변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실체가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하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이니라. 무릇 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거기에 얽매이지 않으면 여래를 본다는 말입니다. 모양 있는 것은 모두가 헛것입니다. 허망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이 몸을 나라고 하면 괴로움뿐입니다. 몸은 잠시 인연으로 모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진아(眞我)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일단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고부동하게 믿어야 합니다. 신심(信心)이 클수록 분심(忿心)도 크고 의정(疑情)도 큽니다. 진아를 찾기 위한 정진은 쉼 없는 여정이 돼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모두는 리더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시대를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앞장서야 합니다. 욕을 먹더라도, 시련이 있더라도 밀고 가야 합니다. 불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배경에는 이차돈 성사의 순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불법을 위해 몸을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리더는 무엇일까요. 진정한 리더는 무념(無念)으로 으뜸을 삼아야 합니다. 무념은 얽매이거나 끌려 다니지 않는 마음입니다. 좋다 나쁘다. 나다 너다. 이런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상(無相)으로 몸을 삼아야 합니다. 무언가 있다고 하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뒤이어 욕심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괴로움이 생깁니다. 구제역 파동으로 나라 전체가 우울합니다. 얼마 전 봉은사에서는 매몰당한 동물들의 천도재를 봉행했습니다. 말 못하는 동물이라고 그리 죽여도 됩니까. 우리가 소나 돼지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소는 자기 몸을 바쳐서 고기라도 줍니다. 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과 동물을 따로 보면 안 됩니다. 공덕의 차이로 모양이 서로 달라졌을 뿐입니다. 무상(無相)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항상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 다음은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육조 스님은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에서 확 깨달아 버렸습니다. 그분은 낫 놓고 기역자로 몰랐습니다.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대목에서 확 열려 버렸습니다. 육조 스님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은 항상 머물러 있습니다. 무주가 안 됩니다. 머무는 바가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리더는 무념, 무상, 무주라는 3가지 진리를 잘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중생제도가 수행·기도의 명분 돼야


여러분, 이번에는 명분과 실리를 생각해 봅시다. 의외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처님 출가수행의 명분은 성불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스님들의 수행 명분도 깨달음이 아닙니다. 중생을 다 제도하지 못했는데 어찌 내가 멈출 수 있겠는가.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수행하는 것은 출가자의 본분사입니다. 성불한 다음에는 중생을 제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출가수행의 명분이 돼야 합니다.


끊임없이 정진해서 무념, 무상, 무주가 되고 그 다음에는 한없는 중생들을 제도하겠다. 이것이 불자들이 수행하고 기도하는 명분이 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진리를 분명히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물론 누구나 분명히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도 생각이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에 6~7시간씩 기도 정진을 하곤 했습니다.


기도가 끝나면 몸이 얼어서 잘 펴지지 않을 때도 많았습니다. 기도로 일념이 되어야 하고 염불도 삼매가 돼야 합니다. 선방 정진할 때도 화두가 이리저리 도망가서, 남모르게 소리도 지르고 눈물도 흘리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진을 했더니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이 내려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가 어떤 것이고 내가 어떻게 수행을 해야겠구나 하는 그런 안목이 열리더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법이 정확히 보이고 그러면서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보는 안목입니다.


분명하게 보는 안목이 열리면 전체를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지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이며 또한 우주와 연결돼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진리를 배워도 나 혼자 잘 살길 바랍니다. 나만 잘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과 세상과 우주와 인드라 망으로 연결돼 있어서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미국의 큰 사업가 빌게이츠는 아침에 일어나면 모르는 누군가에게 행운을 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다고 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로또가 되기를 바라고,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빌게이츠는 복을 받기 보다는 늘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줄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갖습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그를 이렇게 큰 사업가로 성장시킨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에겐 훌륭한 갑부가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댁입니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집은 몇 백 년 동안 엄청난 부를 유지했습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 때문입니다. 첫째가 자처초연(自處超然)입니다. 항상 수행하며 초연하게 지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처인애연(處人靄然)입니다. 남을 만나면 온화하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라. 넷째는 유사참연(有事斬然). 일을 당했을 때는 용감하게 대처하라. 다섯째는 득의담연(得意澹然). 뜻을 얻었어도 담담하게 행동하라. 즉 성공해도 교만하지 말고 여여해라. 마지막이 실의태연(失意泰然). 즉 실의에 빠졌을 때에도 태연히 행동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기도를 하던 염불을 하던, 살다보면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고 실의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태산처럼 무겁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주변에 널리 회향하는 게 참 불교


이것 외에도 최부자댁에는 또 6가지 집안의 가훈도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를 보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벼슬하는 것은 좋지만 만약 당쟁에 얽히게 되면 집안이 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지혜입니다. 다음은 만석 이상이 됐을 때는 사회에 환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셋째는 흉년에 땅을 늘리지 말라는 가훈입니다. 참 자비롭고 지혜롭지 않습니까. 다음은 손님이 왔을 때는 정중히 모시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주변 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금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부자댁에서는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합니다. 부자 집이니 비단옷을 입을 만도 한데 무명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가난을 경험해야 남의 가난에 귀 기울 수 있다는 그런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최부자댁의 가르침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불자들 삶이 바로 최부자댁의 가훈과 가르침에 녹아 있습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있었기에, 세상이 인과 연으로 얽힌 하나임을 알기에 이런 가르침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기다릴 줄 아는 덕입니다. 우리는 너무 급합니다. 기도도 하다보면 빨리 성취하시는 분도 있고 늦게 성취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성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남이 하기 어려운 고행을 6년이나 하셨습니다. 달마 스님 또한 9년을 면벽했습니다. 도인도 인연이 없으면 기다려야 합니다. 복과 지혜를 다 갖춰도 때가 아니면 기다립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유약한 물이라도 꾸준히 바위에 떨어지면 결국 바위가 뚫립니다. 부지런히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과정을 통해 성취를 이루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남과 나눌 줄 아는 복을 지녀야 합니다. 회향이 중요합니다. 기도가 성취됐으면 반드시 주변에 널리 회향하는 것이 참다운 불교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이 법문은 1월15일 고운사 주지 호성 스님이 강남 봉은사 일요법회에서 설한 법문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호성 스님은
1982년 10월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1987년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은사는 부석사 주지 근일 스님이다. 1986년 10월 봉암사 수선안거 이래 15안거를 성만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