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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깨달음의 본질은 지극한 기쁨입니다

순수하게 집중된 상태가 늘 때
행복이 밖 아닌 안에 있음 알아

 

 

 


몇해 전 문화부에서 외국인들의 한국관광과 관련해서 통계를 낸 적이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인데 한국에서 가장 좋았던 일에 대해 대략 70%정도의 사람들이 사찰에서의 선(禪) 체험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시 한국을 찾는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것 또한 좀 더 깊은 선 체험이라는 대답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 체험이란 무엇일까요. 선은 상당히 넓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깊은 선 체험을 말한다면 바로 깨달음이 되겠지요. 선이라는 것이 때로는 깨달음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선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짧은 노력으로도 체험할 수 있기는 합니다. 노력만 따른다면 짧게는 일주일이나 열흘, 길게는 한두 달 정도면 기본적인 선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선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선을 쉽게 명상이라는 넓은 범주로 말하기도 하는데, 형태 또한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화두를 잡고 하는 화두 참선도 있고, 염불(念佛)도 있고, 관(觀)도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선을 통해 우리의 의식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을 선정상태(禪定狀態)라고 말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삼매(三昧)입니다. 그러나 저는 쉽게 풀어 순수의식(純粹意識)이라 말합니다. 선을 하면 결국 이런 순수의식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노력만 한다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두 달 정도면 순수의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수의식은 어떤 상태일까요. 먼저 희열(喜悅)을 느끼게 됩니다. 순수의식 상태에서는 희열이 넘쳐 황홀감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계속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의 깊이가 낮으니, 오래 지속되기가 힘들겠지요. 그렇지만 잠깐이라도 이런 느낌을 체험하고 나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 조금 더 노력해서 30분, 1시간 이렇게 순수하게 집중된 상태가 늘어나게 되면 그때부터 느낌을 넘어 삶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행복이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절에 와서 누누이 법문으로 들었지만 결코 알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차, 많은 돈, 비싼 아파트, 승진. 좋은 것은 전부 외부에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도 외부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선을 하게 되면 외부로 향한 눈이 점차 안으로 향해 자기 자신을 관조(觀照)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어지면 한 생각에 집중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오로지 자기의식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바로 기쁨과 희열이 찾아오게 됩니다.


보통 경전에 따르면 선의 깊이를 4선8정(四禪八定)으로 설명합니다. 초선(初禪)에서 시작해서 팔정(八定)에 이르기까지 여덟 단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초보자가 선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체득하게 되는 초선에 대해 말해 봅시다. 예컨대 마음이 하나로 집중된 상태에서 30분~1시간을 견딜 수 있다면 초선의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초선의 특징은 심사희락정(尋伺喜樂定)이라고 설명 할수 있습니다.


여기서 심사(尋伺)라는 것은 노력하고 집중력이 생긴다는 뜻인데, 심(尋)은 일으킨 생각을 말하고 사(伺)는 지속적인 관찰을 뜻합니다. 다음은 희락(喜樂)입니다. 심사는 2선정에 들어가면 사라지지만 희락은 2선정, 3선정 계속됩니다.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희(喜)는 기뻐한다는 뜻이고 락(樂)은 즐거운 행복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순수한 상태가 계속될 때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경전 중에 ‘열반경(涅槃經)’이 있습니다. 이 경에서 열반(涅槃)을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상락(常樂)이 무슨 말입니까. 상(常)은 항상 한다. 영원하다. 이런 뜻이니 항상 하는 기쁨, 영원한 행복, 이런 뜻이 됩니다. 열반은 진리 그 자체이고 본성인데 그 본성은 영원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성에 도달해 있을 때, 즉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열립니다. 극락세계가 무엇입니까. 부처님 세계가 극락입니다. 말 그대로 지극한 즐거움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순수 집중이 깊어지면 즐거움 또한 더욱 깊어집니다. 이렇게 즐거움으로 가득 차면 다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삶이 바뀌고 생활태도가 달라집니다. 행복을 위해서 남과 다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절로 남에게 양보할 줄 알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배워서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내 속에 있고, 더 나아가 나 자신입니다. 그런 상태가 체득되면 비로소 더욱 진정한 행복, 더 순수한 차원의 행복, 더 고원한 행복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깨달음의 행복, 열반의 행복, 구경의 행복을 향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 수행을 통한 행복을 체득해야 진정한 불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일체가 하나 깨달음 없으면
진정한 의미 보살행도 없어


깨달음의 문제를 보여주는 선가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몽산 스님이라고 하는 분의 법문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구하다가 깨닫고 나서 터진 게송(偈頌)인데, 홀연히 갈길 다 하였네/발길을 돌이키니 물결이 곧 물이로다(沒興路頭窮 踏飜波是水).천하를 뛰어넘는 늙은 조주여/그대 면목 다만 이것뿐이던가(超群光趙州 面目只如此).


무자 화두는 조주 스님의 대표적인 화두입니다. 그런데 몽산 스님은 몰록 깨닫고 나서 조주 스님을 향해 방망이를 날리고 있습니다. 조주 스님은 천하를 뛰어넘었다고 칭송이 자자했는데 깨닫고 보니 별 것 없더라는 그런 말입니다. 조주 당신의 진면목이 고작 이것뿐이었던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위해 극한까지 걸어왔는데, 발길을 돌이키니 물결이 곧 물이더라는 뜻입니다. 이 한마디가 게송의 핵심입니다. 물결이 물이다. 일체가 이것 아님이 없다. 이런 뜻입니다. 몽산 스님은 게송을 짓고 나서 완산 스님을 찾아뵀습니다. 그때 완산 스님이 광명이 고요히 비추어 온 법계를 두루했네(光明寂照遍河沙)라는 게송은 장졸수재(張拙秀才)가 지은 것이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장졸수재는 당시 오도했다는 사람인 것 같은데, 당시 사람들이 그 오도송을 다 알고 있었나봅니다.


몽산 스님이 이 오도송을 몰랐을 리 없지요. 그리고 이제 조주 스님도 우습게 생각하는 처지에 왜 대답을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몽산 스님이 바로 입을 떼려는 순간 완산 스님이 문을 닫고 그냥 들어가 버립니다. 그 순간 몽산 스님은 딱 막혀버립니다. 아직 공부가 끝나지 않은 것이지요. 그때부터 몽산 스님은 앉으나 서나 음식을 먹으나 오로지 화두 참구에 전념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깨달음의 세계는 쉽게 맛볼 수 있지만 또한 그 깊이가 한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두두물물이 자기 아님이 없다는 경계는 그리 깊은 경계가 아닌데, 흔히 이것을 완전한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좌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수좌 스님의 화두가 일념이 됐을 때 문득 경계가 와 닿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계가 와 닿는다. 무슨 말일까요. 예컨대 산을 보면 보통 때 산은 나하고 상관이 없겠지요. 나는 나고 산은 산입니다. 그런데 문득 그게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아니 어느 날 문득 산이 바로 내 마음입니다. 내 자신으로 느껴져요. 물론 이 상태를 말로 설명 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득 나라는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산은 저 밖에 있고 나는 이 안쪽에 있고 안과 밖이 다르다 생각했는데 이런 게 본래 없었던 것이지요. 공연한 분별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소리, 새소리가 들립니다. 그 동안은 소리가 귀로 와서 들리는 걸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눈앞에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마음입니다.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마음입니다. 그렇게 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그냥 직관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산이나 들이나 사람이나 모두가 자기 자신으로 느껴질 때 이때부터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보살행이 시작됩니다.


애들 키워 봤으니까 알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일은 힘들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들이 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분신이며, 또 나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해 희생해도 희생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이 마음이 연장이 되면 바로 무아(無我)가 됩니다.


무아에 대한 깨달음, 즉 일체가 하나라는 깨달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보살행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보살행을 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화두를 들던지 염불을 하던지 무엇이든지 들고서 정말 열심히 정진을 하다 보면 큰 깨달음은 아니더라도 이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초보적인 깨달음은 쉽게 체득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런 깨달음을 체험했을 때 남을 위한 헌신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참된 보살의 삶이 가능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 삼아 용맹정진 합시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이 법문은 문경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이 지난 1월 8일 부산 원오사(주지 정관 스님)의 제30차 산사순례에서 봉암사를 찾은 불자들을 위해 설한 내용입니다.


적명 스님은

고등학교 졸업 후 나주 다보사 우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전국 제방선원과 토굴에서 50여년 동안 묵묵히 정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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