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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따라 보신·화신 나투지만 법신은 변함없어

기자명 법보신문

볼 것이 없어야 진정으로 보고 들을 것 없어야 참으로 듣는다
온갖 법에서 선과 악 다르지만 본디 성품에는 다를 것이 없다

 

▲미륵과 보살, 유림석굴 제25호굴, 중당시기 북쪽 벽.

 

 

66. 눈앞에 그 무엇도 없어야 부처님을 본다


一念成佛 已入信門 如何得目前了了分明而見. 目前無物 是眞見佛. 如文殊師利巡行經 以經中說 文殊遍巡五百比丘房 皆見寂定 因以爲名 最後難舍利弗 以顯甚深般若.


문 : 한 생각에 부처님이 되어 믿음의 문에 들어간 것을 어떻게 눈앞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까?
답 : 눈앞에 ‘그 무엇’도 없어야 이것이 참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이는 ‘문수사리순행경’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경 가운데 “문수가 오백 비구의 방을 두루 돌며 모든 곳에서 ‘고요한 마음자리[寂定]’를 보았다.”라고 말한 내용을 취해 이 경의 이름을 붙였는데, 맨 마지막에 사리불에게 질문하며 깊고 깊은 반야의 도리를 드러내었다.


舍利弗言 我時見汝 獨處一房 結跏趺坐 折伏其身 汝爲當坐禪耶否耶. 答云 坐. 難云 爲當欲令未斷者斷故 坐禪耶等 因此廣顯性空無得之理意.


문수가 사리불에게 “그대가 방에서 혼자 결가부좌로 몸을 다스리고 있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대는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사리불이 “그렇습니다.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답하니, 문수는 다시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한 사람이 좌선을 한다고 번뇌를 끊을 수 있습니까?”라고 힐난조로 질문을 하는데, 이는 ‘성품이 공(空)이어서 얻을 수 없다’는 이치의 뜻을 널리 드러낸 것이다.


五百比丘 從座而起 於世尊前 高聲唱言 從今已去 更不復見文殊身 不復聞其名字. 如是方處 速應捨離 所有文殊一切住處 亦莫趣向. 所以者何 文殊煩惱解脫一相說故等.


이때 오백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 앞에서 큰 소리로 “저희는 이제부터 다시 문수를 보지 않고 그의 이름조차 듣지 않겠습니다. 이 장소에서 바로 떠나 문수가 있는 곳은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문수는 번뇌와 해탈을 똑같은 모습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舍利弗 令文殊爲決了 文殊言 實無文殊而可得故 若實無文殊可得者 彼亦不可見等 廣爲說法. 四百比丘 漏盡得果 一百比丘更謗 陷入地獄 後還得道 廣如彼說.


사리불이 문수에게 이들의 의심을 풀어주도록 부탁하니, 문수는 “고요한 마음자리에는 실로 문수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문수라 할 것이 없다면 문수 또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많은 법을 설하였다. 법문을 들은 사백 명의 비구는 온갖 번뇌가 다 사라지고, 일백 명의 비구는 도리어 이 법문을 비방한 과보로 지옥에 떨어졌지만 이 법문을 들은 공덕으로 뒷날 도를 깨친다.


所以 無見是眞見 無聞是眞聞 不見不聞文殊 是眞見眞聞文殊矣. 若不信此說 雖起謗而陷獄 以曾聞故 終熏種而得道. 何況聞而信耶. 則成道不隔於一念. 故知 宗鏡見聞 無不獲益矣.


그러므로 볼 것이 없어야 참으로 보고 들을 것이 없어야 참으로 들으니, 문수를 보지 않고 듣지 않아야 참으로 문수를 보고 듣는다. 만약 이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 않아 비방한 과보로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이 법문을 들은 공덕이 있으므로 마침내는 이 법에 가까워져 도를 깨친다. 하물며 이 법을 듣고 믿는 사람이야 어찌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곧 도를 이루는 것이 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경’에서 보고 들어 얻는 법의 이익이란 헤아릴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강설) 유명한 육조혜능 스님의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라는 게송이 있다. “깨달음은 잡히는 존재가 아니고 밝은 마음은 이름뿐 실물이 아니어서 본래가 그 무엇도 없는 것인데 일어날 번뇌가 어디 있겠느냐.”라는 뜻이다. 여기서 깨달음은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고요한 마음자리[寂定]’를 말한다.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하여 육조 스님도 ‘고요한 마음자리’를 깨달음이나 밝은 마음이라고 억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눈앞에 그 무엇인 어떤 경계가 있다면 ‘나’와 ‘대상 경계’가 존재하여 시비 분별이 있게 되니 ‘고요한 마음자리’가 아니다.

 

부처님의 세상인 ‘고요한 마음자리’에 들어가면 중생인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중생의 번뇌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문수는 “고요한 마음자리에는 실로 문수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문수라 할 것이 없다면 문수 또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온갖 번뇌와 해탈은 ‘공성空性’으로 똑같은 모습이다. 고요한 마음자리의 성품은 ‘공空’이어서 얻을 것이 없고 이를 ‘종경’이라 말하기도 한다.


67. 어찌 중생의 모습을 보겠느냐


旣衆生已成 理事圓備 則諸佛何以出世更化衆生.


문 : 이미 중생이 이(理)와 사(事)를 오롯이 갖추고 있는 완성된 존재라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세상에 다시 나와 중생을 교화하십니까?


衆生不如是知 所以須化. 故經云 俱同一性 所謂無性. 大悲相續 救度衆生 隨門不同 種種有異 約成佛門 一切成也. 同一無性 故得現成. 妄性本虛 生元是佛. 眞性叵得 非今始成 故皆成也. 物物無性 故成種智. 證斯同體 而起大悲 一得永常 故云相續. 只由不知無性 故敎化不絶. 雖現報化 法體不遷. 如隨色之摩尼 衆相現而本體不動 似應聲之虛谷 群響發而起處無心. 不著自他 豈見衆生之相 本非出沒 常冥大覺之原.


답 : 중생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므로 교화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한다.


온갖 중생이 다함께 똑같은 성품이니 이른바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다. 부처님의 자비가 이어져 모든 중생을 제도함에 방편이 달라 온갖 차별이 있지만 ‘부처님이 되는 길’에서 보면 모두다 부처님이 된다. 온갖 중생이 똑같이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이므로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망념의 참다운 성품은 본디 비어 중생도 원래 부처님이다. 참다운 성품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지금 비로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참다운 성품은 모두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중생 하나하나가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이니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지닌 부처님’이 된다.


이 똑같은 바탕을 증득하여 부처님의 자비를 일으키고 이 자비를 한번 일으키면 영원히 지속되므로 ‘부처님의 자비가 이어진다’고 한다. 다만 중생들이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임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교화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중생들의 인연에 따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모습을 나타내더라도 법신(法身)의 바탕은 바뀌지 않는다. 이는 색에 따라 색의 모습을 드러내는 투명한 마니주에 온갖 모습이 나타나더라도 마니주의 본바탕은 움직이지 않고, 빈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온갖 메아리를 일으키더라도 골짜기는 무심한 것과 같다. 나와 남의 모습을 집착하지 않고 있는데 어찌 중생의 모습을 보겠느냐. 본디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사라지는 것도 아니면서 언제나 눈에 띠이지는 않지만 대각(大覺)의 근원과 하나가 된다.


강설) 어리석은 헛된 생각을 모두 제거하면 오롯이 안팎이 밝아 자신의 성품인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 가운데에 온갖 법이 다 드러나니, 이를 ‘맑고 깨끗한 부처님인 법신’이라고 한다. 온갖 법에서 선과 악이 다르지만 본디 성품은 다를 것이 없는 것 이를 일러 ‘참다운 성품’이라 하고, 선과 악에 물들지 않는 이 성품을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지닌 부처님’이라고 하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오롯한 부처님인 보신’이라고 한다. 이 성품은 본디 텅 비어 있는듯하지만 중생의 인연 따라 부처님의 자비로 온갖 법을 만들어 내니, 이를 ‘자신의 성품에 있는 부처님인 화신’이라고 한다.


‘맑고 깨끗한 법신[淸淨法身]’은 모든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 부처님 마음자리이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오롯한 보신[圓滿報身]’은 그러한 자리에서 드러난 부처님의 지혜이며 ‘인연 따라 수없이 몸을 나토는 화신[千百億化身]’은 중생의 부름에 응하는 부처님의 행行이다.


▲원순 스님
그러나 본디 성품을 떠나서 따로 이들을 이야기 한다면 지혜가 없다.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에서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을 나타내더라도 법신(法身)의 그 바탕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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