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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깨달음을 증명하는 마하보디 대탑

기자명 법보신문

“이곳에 온 모든 이가 2500년전 부처님이어라”

 

▲순례자들의 영원한 고향인 보드가야 성지, 마하보디 대탑은 수없이 많은 순례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증명하듯 오늘도 여여(如如)한 모습으로 나투어 계시다.

 

 

캘커타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곳처럼 성도성지인 보드가야의 ‘시킴하우스’도 시킴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시킴이 인도에 편입이 되기 전 소유했던 건물로, 편입 이후에도 시킴의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넓은 땅을 가졌음에도 인도가 워낙 가난한지라 보드가야에는 공터로 그냥 방치되어 있는 곳이 많았다. 시킴하우스 앞에는 앞으로 순례자들을 위한 법당과 게스트 하우스가 들어 설 예정이란다.


일행은 우선 2층에 짐을 풀고 마하보디 대탑의 입구가 보이는 난간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기나긴 버스여행으로 인해 쌓인 여독을 풀기 위해서다. 난간 아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풍경은 화덕에 걸어놓은 ‘솥’이었다. 진흙으로 만든 투박한 화덕 밑에선 요리를 위해 피운 군불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어오르고 있었다. 반가웠다. 그 옛날 송광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부처님오신날 등 큰 행사 때면 공양간 밖에 커다란 화덕을 설치하고 그곳에 불을 지펴 밥을 했다. 나무로 불을 때 밥을 하기 때문에 가스나 전기로 밥을 지었을 때보다 가마솥 누룽지 맛이 훨씬 좋았다. 송광사에서 보았던 가마솥 누룽지가 떠올랐다. 할머니들은 “이제 막 치아를 갈고 있는 손자, 손녀에게 주어야 한다”며 너나없이 누룽지를 가져갈 생각으로 손을 내밀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의 소박한 풍경이 시킴하우스의 화덕에서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덕킁린포체께서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나온 나온 사람들이 린포체께 인사를 올리고 있기에 일행은 여유롭게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수많은 제자들이 린포체를 친견하는 동안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시자 버스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금세 풀렸다.
“여기들 있었구만.”


린포체는 제자들과의 만남이 끝나자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오셨다. 주위에서 여러 제자들이 수행과 정진에 관한 질문을 하자 정성을 다해 답을 해준다. 질문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린포체는 싫은 기색도 없이 유치원 선생님께서 어린 아이에게 생활 예절을 가르치듯이 존조리 답을 하신다.


시킴하우스의 내부는 시킴에서 온 순례자들을 맞이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인터라 시드니에서 온 순례자들의 숙소는 대만과 중국이 운영하는 사원으로 정했다. 저녁 공양을 마친 이후에도 린포체의 지혜를 경청하려는 제자들의 행렬과 질문은 계속됐다. 린포체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제자들과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린포체의 만남, 그곳에선 향긋한 법향이 새어 나온다.
“내일 새벽 5시에 대탑에 가세.”


보드가야에 도착하여 짐을 정리하고 잠잘 곳을 결정하느라 직접 참배를 하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는데 린포체께서 내일 아침 일정을 알렸다. 드디어 성도성지를 친견하게 되다니, 벌써부터 오감(五感)이 짜릿짜릿해진다.

 

대탑 앞에선 모두 침묵으로 참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독수리 바위, 부처님 재세 당시에도 있었을 독수리 바위는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던 모습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나는 잠을 청하기 위해 시드니의 도반‘알버트’와 대만 사원의 옥탑 방으로 향했다. 보드가야 대탑을 친견한다는 ‘설레임’도 잠시, 깊은 피로가 밀려와 스르르 잠에 빠졌다.


새벽녘에 일어나 대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꽃이나 공양물을 팔려는 사람들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길가에 나와 장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대탑에 들어가는 문 밖에는 이미 장마당이 서 있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 물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그들이 팔고 있는 것이 공양물이나 대탑에 들어가서 사용할 수 있는 깔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느낌으로만 알 수 있었다.


대탑의 앞문에 도착하니 예상대로였다. 보드가야 대탑은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2500여년전 부처님께서 새벽 별을 보시고 깨달으신 성지를 참배하려는 수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의 행렬이 여명(黎明)의 이른 시간인데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동이 트기 전 장엄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닮아서인지 순례자들 사이엔 터럭의 잡음도 없이 고요함만이 가득하다.


새벽 5시가 되자, 대탑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도량 중앙의 철문이 열렸다. 남방의 스님들이 들어가 팔리어로 염불을 시작했고 때를 맞추어 정성스럽게 준비해 온 공양물을 올리려는 불자들이 대탑 안으로 향했다.


나 역시 대탑의 부처님을 친견하고 싶었으나 우선 탑돌이를 하기로 했다. 순례 행렬의 흐름에 맞추어 대탑을 돌기 시작했다.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방식인 우요삼잡(右繞三)에 따라 오른쪽으로 세 바퀴를 돌았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세 바퀴를 돈 이후에는 발길이 멈추지 않아 그냥 돌았다. 나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모든 불자들이 한발 한발 지극한 마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탑을 도는 분위기는 자유로운듯하면서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흐름이 있었고 흐름 전체는 청정했다.


그 누구도 그 장엄한 묵언 수행을 방해하지 않으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순례자들의 침묵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그대로 받아드리려는, 바로 앞에 있는 불자들이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녹아 있었다. 너무나 지극한 분위기에 젖어서였을까, 몇 바퀴를 돌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탑을 돌다보니 이윽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탑 뒤편에 위치한‘보리수’의 자태가 또렷하다.


보드가야 대탑의 보리수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무상정각의 보리도(菩提道)를 완성하신 곳이 아니었던가. 그런 까닭에 ‘보리수’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오늘날의 보리수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보리수가 멸한 후 아쇼카 대왕 당시 전해진 스리랑카의 2대 보리수에서 전승된 3대 보리수라고 한다. 보리수는 씨앗으로 심어도 되고 가지를 꺾어 그대로 땅에 심어도 잘 자랄 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보리수 아래에는 부처님 재세 당시와 같이 명상에 든 사람들이 많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부처님처럼 수행하는 그들의 얼굴엔 깨달음의 경지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지극함이 배어 있다. 맑으면서도 경건했다. 끝없이 대탑을 향해 절을 하는 사람들은 대탑 주위를 두른 벽의 바깥쪽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석가모니부처님 세상에 나투시어
세상의 높은 진리 깨달으신 후
일체 중생 위해 40년 세월 동안
법을 설해 윤회 진리 일러주시고
세 가지 보배로운 지혜 가르치시니
세상에 비할 수 없는 스승이어라
보드가야 나무아래 자리를 잡고
룸비니의 일곱 발자국 보여주시니
우리 중생들은 그것을 믿어야 하며
우리가 가야 될 그 자리이리라


그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던 그윽한 분위기에 서 있자니 저절로 환희심이 일었다. 마음의 가장 아랫자리 바닥에서부터 뜨거운 용솟음이 올랐다. 탑에서 풍겨 나오는 그 기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주석하셨을 때 중생들을 대했던 자비의 온화함처럼 따스하면서도 청정하다. 이러한 감동이 항상하기에 이곳 성도성지에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이리라.


어둠이 모두 가시고 아침 햇살이 드리우자 일행은 참배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보드가야 대탑의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아침 햇살을 맞이한 대탑의 청명함이 눈이 부실 정도이다. 뾰족하게 솟은듯하면서도 부드러운 외형의 대탑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탑과는 달랐으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정(情)이 느껴진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 공양을 든 후 시킴하우스로 갔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와서 진찰을 받고 있었다. 수행력과 의술을 두루 갖춘 덕킁린포체는 어디를 가더라도 중생들의 마음과 몸을 돌보느라 분주했다. 여느 곳처럼 보드가야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온 사람들을 맞이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꺼리는 법이 없다. 그런 린포체를 기다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번이 마지막 불자이려니 생각하고 있으면 또 다른 불자들의 방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이곳에 왔으니 가볼까?”
“어디를요?”
“대탑에.”


린포체께서 보드가야 대탑에 가자신다. 낮에 친견한 대탑은 새벽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새벽녘엔 흙먼지와 꽃을 파는 사람들만 보였는데 밝은 대낮에 오니 길가에는 상인들로 북적였으며 오가는 사람들의 인파가 마치 대도시에 온 것처럼 분주해 보였다. 특히 티베트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많았다.


비포장 흙길을 걸어서 걷다보니 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사찰들이 눈에 띈다. 우리 일행은 우선은 ‘마하보디 대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대탑 정문에 들어가기 전 길목에 있는 새벽에는 보지 못했던 한국 사찰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차를 한잔 얻어 마셨다.
“저쪽으로 가보세.”
한국 사찰에서 나와 왼편으로 향해 가다보니 그곳에는 누각처럼 생긴 장소에 글씨를 새긴 둥그런 돌이 놓여있었다. 아주 오래돼 보였다.
“파드마삼바바의 돌입니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일행이 다가가자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대뜸 말을 건넸다.


까르마파, 한국말로 순례자 맞아

 

 

보드가야에 있는 부탄 사원의 벽화,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제자 한 분이 몸에 병이 났는데 이 돌이 땅에서 솟아 나와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네. 돌에 새긴 것이 바로 만다라야.”


린포체의 설명으로 그 돌의 실체를 알 수 있었으며 린포체는 돌에 다가가 이마를 대고 예를 갖추었다. 정성으로 예로서‘만다라’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 일행도 예를 갖춘 뒤 이마를 만다라에 댔다. 그냥 바라보던 돌덩이가 만다라라니, 그것도 자연적으로 빚어진 ‘만다라’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마음이 숙연해졌다.
“저기 보이는 것은 무엇인지 아는가?”


돌 만다라 뒤편으로 폭이 좁은 둥근 지붕에 작은 불상들이 놓여있고 붉은 색 바닥의 중앙에 볼록 튀어나온 것이 있는 작은 건물을 가리키며 린포체가 질문을 던졌다. 무엇인지 알 길이 없으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저곳은 아라한들을 화장하던 곳이라네.”


린포체의 설명을 들은 뒤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린포체가 가리킨 건물 뒤에는 수많은 작은 돌탑들이 있었고 호수로 물을 뿌리고 있는 짙은 황색가사를 입은 스님도 볼 수 있었다. 돌탑들은 아라한들의 부도였다. 세월에 찌들어서인지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돼 있었고 몸체를 잃은 부도탑은 시멘트 위에 맨 꼭대기 부분만 올린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했다. 대탑 곳곳에 숨어 있는 성보를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해주는 린포체는 잃어버린 과거를 화면으로 다시 보여주는 영화감독 같았다. 설명의 깊이나 내용이 참으로 알차면서도 듣는 이의 불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대탑을 참배한 뒤 태국의 사원과 일본, 부탄의 도량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부탄 사원의 특징은 티베트 불교의 한 부류이면서도 시킴과는 색감이 다른 녹색 계통의 색상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삼층탑처럼 생긴 법당의 안쪽 벽에 양각으로 표현한 부처님의 일대기는 보는 이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게 할 정도로 장엄했다.


다음 날은 차량 한 대를 빌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셨던 영취산과 나란다 대학을 순례했다. 영취산에 오르는 동안 수많은 원숭이들을 구경했다. 원숭이들 역시 매일 매일 다른 순례객들을 맞이하느라 조금은 부산해 보였다. 영취산의 계단을 뚜벅뚜벅 오르다 보니 정말 ‘독수리’와 닮은 모양의 돌이 하늘로 머리를 향한 채 금방이라도 비상하려는 듯 기세가 대단했다.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니 이 독수리 바위는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을 맞이했을까. 고승과 불자들의 지극한 정성을 증명하고 맞이했을 독수리 바위는 그대로가 부처님의 징표(불상)이리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뒤 순례자들은 날을 바꾸어 까르마파를 뵈러 갔다. 시킴사람들은 그들의 전통에 따라 옛 의상을 입고 까르마파가 주석하고 있는 처소로 향했다. 처소 주위는 삼엄함 경계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언제 있을지 모를 중국의 테러를 막기 위해 카르마파를 호위하는 경호원들의 눈빛이 사나웠다.


우리 일행의 경우 미리 연락을 하고 왔는데도 카르마파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까르마파의 첫인상에는 호랑이 같은 위엄과 새의 깃털 같은 부드러움이 함께 담겨 있다. 이제는 청년으로 성장한 까르마파는 열일곱 차례 환생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로, 덕킁린포체의 스승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까르마파는 한국말로 일행을 맞이했다. 또박또박 들려오는 한 마디 한국말, 무척이나 반가웠다. 일순간 뻣뻣했던 긴장감이 햇볕에 눈이 녹듯 사라진다. 티베트의 세 번째 고승인 까르마파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한국말이 나오다니, 소소(少笑, 작은 웃음)가 나왔다. 


시드니 보안 스님 boansun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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