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암이라는 진단결과를 통고 받은 것은 2007년 6월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처음엔 선뜻 믿겨지지 않았다. 내가 암이라니…. 허나 그리 오래지 않아 체념하듯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쩌면 평소 허약했던 나의 몸 상태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 못지않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노스님 때문이었다. 내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노스님이 충격으로 쓰러지셨으며, 눈물도 많이 흘리셨다는 것이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설마 우리 노스님께서….
사람들에게 노스님은 다가서기 어려운 존재였다. 평생 흐트러진 모습 한 번 보이신 적이 없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말씀도 거의 없으셨다. 팔순 가까운 연세에도 새벽예불이나 참선을 거르는 일조차 없었다. 신도들이나 다른 스님들에겐 늘 자비로우셨지만 스스로에게나 상좌들에겐 매섭도록 엄격했다.
그런 큰 바윗덩이 같은 노스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다니. 내가 도대체 뭐라고…. 노스님께선 수술실에 들어가는 내게 “화두를 잘 챙기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서 어떤 위로보다 강한 믿음과 신뢰가 전해져 왔다. 그 때문일까. 나중에 다른 분들 말씀을 들어보니 내가 수술실에서 나오는데 내 다리가 안보여 살펴보니 누운 채로 가부좌를 하고 있더란다.
수술 후 나는 잠시 노스님이 계시는 공주 동해사에 머물렀다. 때마침 법당 아래쪽에는 새로 지은 작은 황토방이 있었다. 노스님께서 산과 들로 다니시는 것도 그 무렵부터다. 노스님께선 몸에 좋다는 약초를 캐와 항아리에 차곡차곡 재어 두었다. 또 매일 오후면 손수 내 방에 불을 지펴주셨다. 온돌보다 따뜻한 노스님의 정성이 나를 감쌌다.
새벽 3시, 노스님께서 예불하실 때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법당 쪽을 향해 절을 했다. 노스님께서 참선하실 시간이면 나도 좌복을 펼치고 앉았다. 그럴 때면 출가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언제든 출가자로 살다 죽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대구에 계시는 한 스님으로부터 복지센터 일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잠시 갈등했지만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조금 무리하자 몸 상태가 금방 나빠졌다. 특히 모기한테 물린 왼팔 임파선 쪽이 쉽게 아물지 않았다. 갈수록 덧난 곳이 커져갔고 고름까지 나왔다. 일주일 쯤 지나니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때였다. 은사 스님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대구에 찾아오셨다. 노스님께서 보내셨다며 작은 상자를 끄르셨다. 새하얀 손수건 위에 산삼 3뿌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밤 12시에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며 꼭꼭 씹으라는 말도 함께 전해주셨다. 노스님 계신 절이 가난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콩나물이나 두부 한모 사다먹은 적 없고, 새로 산 승복은 꿈도 못 꿀 정도였다. 그런데도 노스님께선 산삼을 마련해 보내주셨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날 밤 나는 노스님의 당부대로 12시를 기다려 두 시간 동안 천천히 삼을 씹어 삼켰다. 입에선 관세음보살이, 마음속으론 노스님이 떠나지 않았고, 두 눈에선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그 정성 앞에 어찌 낫지 않을 병이 있을까. 며칠 뒤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고, 그 뒤로 지금까지도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고 했다. 우리 노스님은 깊고 깊은 강이다. 지금도 가끔 힘들어질 때면 전화를 드린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동시에 나도 깊은 강이 되어 흐르리라 새삼 다짐하게 된다.
대엽 스님 동국대병원 지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