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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킴·인도 성지순례를 회향하며 〈끝〉

기자명 법보신문

“순례는 나의 스승, 사랑과 자비 배웠다”

 

▲초전법륜성지인 녹야원의 부처님 사리탑에 삼배의 예를 올리고 있는 덕킁린포체.

 

 

“저기 앉았으면 좋겠어.”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나무아래서 깨달으신 직후 칠일 밤낮을 선정에 들어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다. 그런 연후 윤회와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일러주기 위해 함께 고행을 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머무르고 있었던 ‘녹야원’으로 향했다. 사슴들이 많이 살았기에 ‘사슴동산’으로 불린 그곳을 향해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에서 천천히 걸어서 가셨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가 극도로 발달한 지금, 일행은 편안하게 차를 타고 그 길을 지나쳐 왔다. 차로 달려도 5시간정도 걸릴 만큼 먼 거리를 걸으셨을 석가모니께서는 무엇을 생각하시며 무엇을 위해 걸어오셨을까? 녹야원으로 오는 차 안에 있는 나에겐 그러한 자문이 화두가 되었다.


과거의 성스러운 모습은 잊은 채 무너지고 쓰러진 ‘사원’이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을 성자의 공덕으로 사바세계에 다시 불법을 설하게 된 역사적인 현장 ‘녹야원’에서 덕킁린포체의 가르침을 따라 ‘다메크 수투파’ 앞에 앉아 입정에 들었다.


녹야원의 출입구에는 ‘사르나트’라는 문패와 함께 ‘부처님의 4대 성지 가운데 한 곳’이라는 문구를 새긴 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성지에 발을 들여 놓을 때는 부처님 사리탑이 겨우 귀퉁이만 보이다가 안으로 들어서니 전체의 장엄한 모습을 일행을 맞이했다. 보드가야의 대탑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드러난 폐허의 모습 속에 그 옛날의 화려하고도 성스러웠던 시절을 말해주는 증거들이 가득하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문양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의 일부이었을 조각난 파편들이 일행을 맞이한다. 그것들은 비록 온전했던 모습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모됐지만 당시에 새긴 아름다운 문양들의 멋스러움은 여전하다. 천년을 넘는 세월을 버텨온 그 문양들은 우리나라 단청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것들과 엇비슷하다. 다른 점이라고 해봐야 돌에 새겼다는 점과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다라 꽃모양과 물결 모양 그리고, 작은 부처님들…, 조각 속에서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심성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니 경주의 다보탑을 볼 때 느꼈던 것만큼 이름 모를 인도 장인들의 기술과 지극한 불심(佛心)이 마음에 와 닿는다.


여여하게 서 있는 진리의 스투파

 

 

▲갠지스강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인도의 힌두교도들.

 


대탑이 잘 보이는 곳에 이르자, 린포체는 의복을 정리한 후 삼배의 예를 올렸다. 일행 역시 기다렸다가 똑같은 자리에서 예를 드렸다. 녹야원의 사리탑은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는 보드가야의 대탑하고는 분위기가 달랐다. 나란다 대학처럼 여유로운 유적지 같으면서도 사리탑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장엄하다’는 느낌도 가득하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사라탑 쪽으로 향하는데 중간 중간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확연히 남아 있는데도 린포체는 “그곳을 지나지 말라”며 손사래를 친다. 조금 멀기는 하지만 그곳을 피해 더 걸어서 탑으로 가자며 손짓을 한다. 어떤 연유가 있을 것이지만 순례자들은 린포체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따를 뿐이다. 탑으로부터 100여 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린포체의 지도 아래 함께 자리를 틀고 앉아 선정에 들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선정을 마무리한 린포체를 따라 일어나 묵묵히 대탑으로 향했다.


탑을 오른쪽으로 세 번을 돌고 난 뒤 표면의 돌에 새긴 문양을 살펴보니 오랜 세월 수많은 ‘풍파’를 견디었는지 문양이 제대로 남은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전체 표면이 돌로 싸여 있어서 그런지 다른 건물들은 파괴되었지만 사리탑만은 온전하다. 부처님의 보배로운 세 가지 가르침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메크 수투파는 그 웅장한 모습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여여(如如)하게 오늘도, 내일도 서있을 것이다.


사슴동산을 지나쳐 입구로 나와 녹야원 인근에 있는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 지은 사찰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박물관에 들어가서 인도의 불상도 친견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간다라 양식의 부처님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뭔가 그리스의 조각품들에 더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 부처님들은 처음엔 낯설게 다가왔다. 그러나 허리를 숙여 한분씩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친근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우리나라나 중국 그리고, 일본의 부처님들처럼 32상80종호를 완벽하게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없어서일 게다. 얼굴이나 신체의 모습이 여느 인간의 모습에 가깝다.


“나는 갠지스강가에서 삼일씩 지내면서 여러 모습을 보았어. 거기서는 그렇게 보고 있는 것 자체로 뭔가를 느끼고 배울 수 있어.”


‘사르나트’에 가면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갠지스강이다. 힌두교 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교의 성지인 갠지스강가로 이동해 다다르니 오래전 인도를 일 년에 한 번 이상 다녀갔던 사형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사형을 말을 떠오를 때면 부럽기만 하더니 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그 말을 한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항하의 모래 수’라고 여러 번 되풀하면서 생각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수를 표현하셨는데 그 ‘항하’를 내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옅은 안개가 자욱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강물에 들어가 기도를 하거나 이미 기도와 목욕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도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보드가야에서 며칠 동안 지내면서 보았던 인도인들의 삶의 방식과 연결해보았다. 그들의 믿음과 염원 그리고, 의식들은 어쩌면 본능에서 간절히 솟아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처럼 인도인들은 내생을 확신하면서 다음 생엔 반드시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단지 이생의 미래라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고 사람들이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인류가 추구하고자 하는 내면의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강가에 정박해 있는 배들도 여럿이었고 강 한가운데에서 배를 타고 그들만의 의식을 거행하는 모습들도 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갠지스강가에서의 시체를 화장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시킴에서 불교식 화장을 보기는 했으나 그 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갠지스강의 화장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도인들의 정신세계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었던 인연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강가에 있는,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옛 왕궁’으로 갔다.


왕궁엔 우리나라의 고궁처럼 건물과 유물만이 덩그렇다. 빨갛게 칠한 두껍고 커다란 문과 감히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을 듯 높게 쌓은 담장 등 옛 모습이 여전하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 뿐이지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도 파괴된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고 잘 관리 되고 있었다. 왕궁을 마지막으로 사르나트의 일정을 마치고 시킴에서부터 순례를 함께 했던 시드니의 도반들이 비행장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보드가야로 돌아왔다.


언제 다시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지인 보드가야에 올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대탑에 예를 올리러 갔다. 대탑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스님들과 세계 각국의 불자들이 수행과 기원을 올리고 있었다. 매일 끊임없이 사원을 찾는 사람들을 보니 며칠 전 만났던 한국의 스님들과 불자들이 생각났다. 매년 보드가야에 와서 절 수행을 한다던 그들에게 인사나 할까하고 찾았으나 아쉽게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불단은 달라이라마의 설법을 위해 겔룩파 식으로 변해 있었다.


사색하게 해준 땅,  인도

 

 

시킴의 수도인 강톡에서 방학을 이용해 공부하고 있는 특별반 아이들의 교실.

 


대탑을 둘러 본 후 숙소로 가는 길목에서 달라이라마께서 막 도착하는 모습을 길가에서나마 볼 수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티베트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나의 마음까지 착잡해진다. 인도 순례 중 만났던 많은 티베트 불자들 그리고 스님들의 얼굴들이 숙소로 가는 내내 떠올랐다.


시킴에서 보드가야로 왔던 길은 3시간 자동차를 타고 20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이동했었다. 다시 시킴으로 돌아가는 길은 탈 것이 달랐다. 2시간 자동차를 타고 15시간 기차 타고 다시 강톡까지 3시간 차를 타야 한단다. 인도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이러한 일정이 가능하리라. 조금은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순간순간은 나의 마음을 순화시켜주는 시간이다. 특히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세 시간 동안에는 인도의 군것질 거리도 사서 맛을 보았다. 그곳에선 서울역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역전에 누워있는 모습이나 오랜 시간 기차를 기다리느라 짜증도 날법하지만 그 누구도 큰소리를 내지 않는 특이한 인도의 한 면을 보기도 했다. ‘환경에 순응하고 산다’는 것을 인도인들의 생활상을 배운다. 인도순례를 하다보니 이제 내 마음에도 제법 인도 냄새가 담겨 있는 듯하다. 기차를 타고 비좁은 침대칸에서 잠도 잘 자고 더러운 화장실도 이용을 하다 보니 편안해졌다. 역에 설 때마다 오르고 내리는 인도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기만 하다.


시킴으로 통하는 통로인 ‘실리구리’에서 하차해 강톡으로 향했다. 같은 길을 벌써 세 번째 가는 것이라 그런지 눈에 익숙하다. 시킴에 들어갈 때 다시 출입허가증을 받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시킴의 숙소로 돌아오고 나니 그래도 며칠을 묵었던 탓에 편안했다.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볼일을 보러 홀로 외출을 했다. 언덕을 넘어 시내로 가는 길목에서 보지 못한 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바로 히말라야의 한줄기 만년설산인 ‘칸첸중가’가 강톡에서도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서(西) 시킴에서 볼 때 보다는 작아 보였지만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그 자체의 위용은 역시 대단했다.


잠깐 산책을 하고 싶어서 린포체를 따라 나섰다. 숙소 위쪽에 작은 학교에 들어서니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알고 보니 거기에 모인 학생들은 평상시에는 학교를 다닐 형편이 안되 일을 하다가 학교가 방학을 했을 때 정부가 학교를 임대해 숙식을 해결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만난 학생들은 중고등부 아이들이었다. 린포체는 그 아이들의 식비를 부담해주고 있었다. 이 학교 관계자들이 린포체를 초대했는데 어디를 가든 힘들고 부족한 이들을 돕는 린포체의 자비로운 손과 마음이 느껴졌다. 교실과 아이들이 머무는 곳을 둘러보았는데 거의 난민 수준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이제 막 부모님 품에서 사랑을 받으며 응석을 부릴 나이인데…. 책상을 연결해 만든 잠자리부터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오직 공부와 세끼 식사뿐이었다. 그래도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가득하다.


학교를 나와 찾아간 곳은 마을공터에 마련된 놀이동산이었다. 처음 시킴에 왔을 때는 빈 공터였는데 어느 날 보니 조그마한 놀이동산이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가 간 날은 놀이동산이 운영하는 마지막 날이란다. 세련된 것은 아니고 규모도 작았지만 갖출만한 것들은 거의 다 갖추었다. 일 년에 이곳에 문을 여는 놀이동산인데 비록 돈을 내야 하지만 강톡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놀이 공간이다.


시킴에서 며칠 동안 머물며 린포체를 따라다녔다. 지난번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체험한 뒤 캘거타를 거쳐 인도를 떠났다. 이것이 인도순례의 전부이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시킴과 인도에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를 다녀가면 또 가고 싶다고 한다. 다른 어떤 이들은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도 한다.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내 경우엔 당연히 “다시 가고 싶다”는 쪽이다. 기회가 된다면 아주 오랫동안 살아 보고 싶기도 하다. 내게 인도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해준 곳이었다. 삶과 죽음은 물론이요, 어떤 문제에 대해 골똘히 사색하게 만들었다.

 

 

녹야원을 순례하고 있는 순례자들.

 


대부분의 시간을 시킴에서 보내면서 어느 노 라마의 화장의식을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았으며 파드마삼바바의 성지를 돌아보면서 정말 위대했던 한 스승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과 의식에 담을 수 있었다. 3000m 이상의 산꼭대기 사찰에서 입정에 들어 고산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이 맞닿은 그곳에서 마음을 점검했다. 까르마파 존자와 관련된 ‘룸텍’이나 ‘푸동’ 사원에서 시킴 불교의 참모습을 친견했다. 시킴 사람들이 어떻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는가를 보면서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과 정겨움을 발견하기도 했다. 짧은 순례기간 중 우리나라와는 너무나도 다른 문화를, 너무나도 많은 것을 체험한 것이다.


특히나 마음이 맑은 영혼들과 함께하면서 늘 중생들의 고통과 함께하려는 삶을 보면서 상(相)을 내거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보리심에서 나오는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배웠다. 그리고 내가 가진 번뇌를 진단하고 내려놓는 지혜를 익혔다. 그러한 순례에 지심으로 귀의한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시드니 보안 스님 boansun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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