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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동다송’ 뒷이야기

기자명 법보신문

‘동다송’ 원래 제목은 ‘동다행’… 필사 오류로 바뀌어

1831년 청량산방 시회서
정조 사위 홍현주와 인연
홍현주 차 질문을 계기로
초의 스님 ‘동다송’ 집필

 

 

▲진주목사 변지화가 ‘전다박사(煎茶博士)’로 익히 알려져 있던 초의 스님에게 보낸 편지.

 


‘동다송(東茶頌)’의 저술 시기가 1837년 여름이었다는 사실은 홍현주에게 보낸 초의의 초고(草藁) 편지를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에서 확인한 이후이다. 이 편지에는 초의 스님이 홍현주를 만난 것이 1831년 정월, 청량산방이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동다송’의 초기 표제명(表題名)이 ‘동다행(東茶行)’이었음을 밝힐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였다. ‘상해거도인서(上海居道人書)’이라 쓴 초의의 편지는 정중하고도 차분하게 서술되었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 신묘(1831)년에 청량산방 송헌(松軒)에서 모셨을 적에 미천한 몸으로 분에 넘치는 과분한 은혜를 입었으니 불도의 인연과 문자의 은혜가 깊고도 중합니다. 듣건대 ‘초목의 어린싹도 옛 땅을 잊지 않는다’하였고, ‘사람은 떠나면서 번번이 고개를 돌려 은혜 입은 곳을 바라본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궁벽한 골짜기에서 자취를 감추고 들은 것 없이 산다고 한들 무지한 초목만도 못하겠습니까. 다만 구름으로 막혔고, 산과 바다를 거쳐야하는 먼 길이라서 뵙기를 바라지만 인연이 없었고 때때로 문안을 올리려 해도 닿지 않았습니다.


옛말에 ‘정이 어그러지면 한 방안에 있어도 서로 어긋나고, 도가 합치되면 천 리만큼 떨어져 있어도 더 친하다’하였으니 찾기 어려운 말과 모습 때문에 서글퍼하기보다는 차라리 친하기 쉬운 탄탄한 도리(道理)에 맡겨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마음에 향불을 피워서 단단하게 천성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장지화는 ‘천지로써 집을 삼고 해와 달로 등불을 삼아 천하의 여러 군자와 함께 있어도 서로 막힘이 없다’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달인의 소견이라 하지만 오히려 표현된 말의 흔적에 막힘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옛말에 ‘눈꺼풀이 삼천 세계를 모두 덮을 수 있고, 콧구멍에 백억의 몸을 다 담는다’고 했으니 이런 눈과 코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습니다. 천지와 일월이 이 눈 안에서 뜨고 지고, 운행되지만 안광(眼光) 때문에 장애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떤 장애가 있다고 한들 서로 떨어지겠습니까.


빽빽하게 우거진 소나무 아래, 밝은 달이 비치거든 수벽탕(秀碧湯)을 끓이다가 백수탕(百壽湯)이 되면 도인(홍현주)에게 가져갈까 생각하지만 밝은 달과 더불어 (홍현주의)곁에서 모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서로 막힘없는 도리이니 특별히 신통한 묘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북산도인(변지화)을 통해 다도(茶道)를 물으시니 옛 사람이 전하신 뜻에 따라 동다행 일편을 지어 올립니다. 말이 잘 드러나지 않는 곳은 원문을 뽑아내어 물으신 뜻에 답하려했지만 제 글재주가 변변치 않아 간절한 원래의 뜻을 다 듣기에는 번거로울 것입니다. 혹 손볼 만한 구절이 있으시면 다듬어 주십시오.


(憶昔辛卯獲奉巾拂於淸凉松軒 猥以微賤 蒙恤過情深感 香火緣深 翰墨恩重 嘗聞草木之萌芽 難忘于故土 人生發軔 每回首于恩門 雖鏟跡消聲於窮谷 豈草木無知之不若 但雲泥分隔 山海程遙愴扣謁之無緣 時獻訊而未達 古語有之 情睽則共一室而相忤 道合則隔千里而彌親 與其慽慽於言相之難求 寧任坦蕩於道理之易親 所以心香一炷 凝然不散於性天 張志和云 以天地爲遽盧 日月爲燈燭 與四海諸公 其處未嘗相隔 此雖達人之見 未免猶滯言象之跡 古亦有言 眼皮盖盡三千界鼻孔盛藏百億身 如此鼻眼 人人本具 天地日月在此眼中 運旋出沒 未嘗爲碍眼光 況此一四海之內 焉有防碍而相隔也 千株松下 對明月而煎秀碧湯 湯成百壽則 未嘗不思持獻道人 思則便與明月爲侍座側而爲勝 此其所以不相隔碍之道理也 非別有個神通妙術而然也 近有北山道人 承敎垂問茶道 遂依古人所傳之意 謹述東茶行一篇以進獻 語之未暢處抄列本文而現之以對下問之意 自爾陳辭亂煩 冒瀆鈞聽極切主臣 如或有句句存者 無惜一下 金鎞之勞)


이 대목은 초의 스님이 홍현주에게 ‘동다송’과 함께 동봉했던 편지의 내용이다. 이를 통해 ‘동다송’이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동다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가 홍현주를 만났던 곳이 청량산방의 송헌이었음도 드러난다. 청량산방은 홍현주의 별서(別墅)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별장이다. 사대문 밖 청량리 부근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자연 풍광이 수려했던 곳인가. 소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집, 그곳이 송헌(松軒)이다. 1831년 정월 중순 이틀에 걸쳐 열었던 청량산방 시회에는 한양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인 자리, 초의 스님이 홍현주에게 문자의 은택을 깊게 입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조선 후기 정조의 부마였으니 왕의 사위가 된 것. 정조의 둘째 딸 숙선옹주를 아내로 맞아 영명위로 봉해졌다. 그의 본관은 풍산이요, 자는 세숙(世叔), 호는 해거재(海居齋), 약헌(約軒)이다. 시문에 능했던 풍류남아로 일찍이 다산의 자제들과 가까웠고, 추사와 신위와도 교유했다. 더구나 조선 후기 여류 시인이며 다인이었던 영수합 서씨가 그의 어머니이시고, 유한당 홍씨가 그의 누이였으니 그는 초의 스님과 교유하기 이전부터 차를 가까이했던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가풍 속에 무젖었던 그가 진도목사였던 변지화를 통해 초의 스님에게 다도를 물었던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당시 초의 스님은 이미 전다박사(煎茶博士)라고 칭송될 만큼 차의 이론적 토대가 확립되었고, 그가 자부했던 것처럼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난다. 우리 차는 두 가지를 다 겸했다(陸安茶以味勝 蒙山茶以藥勝 東茶蓋兼之矣)”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초의의 이러한 자신감은 1830년 겨울 ‘다신전(茶神傳)’의 말미에서 “총림에는 조주풍이 있었으나 사라져서 다도(茶道)를 알지 못한다(叢林有趙州風而盡不知茶道)”라든지 “시자방에 있던 수홍 사미가 다도를 알려고 해서(修洪沙彌侍者房欲知茶道)”라는 입장보다 진일보된 견해를 드러낸 것이다. 이 밖에도 그는 육우의 ‘다경’이나 명대 고염(高濂)이 쓴 ‘준생팔전(遵生八)’을 통해 차의 이론적 토대를 단단히 다져 나갔던 것으로 확인된다.


추사학파 변지화 서간문에
책 제목 바뀐 이유 소개돼
변지화가 홍현주에게 전달
급히 베꼈던 게 오류 원인


초의 스님이 정조의 사위였던 홍현주에게 보낸 편지.
한편 초기 ‘동다행’에서 ‘동다송’으로 제명(題名)이 바뀐 것은 당시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이 문제는 ‘동다송’ 연구에 필연적으로 밝혀야할 문제였지만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의문이 깊으면 우연히 그 단서가 드러나는 법. 필자의 소장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변지화의 편지가 발견되어 당시 ‘동다송’의 저술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자! 그럼 변지화의 편지를 꼼꼼히 읽어보자.


묵은해와 새해가 바뀌었는데도 소식이 막히고 끊어져 아득히 스님을 생각하지만 공연히 마음만 피로할 뿐입니다. 뜻하지 않게 인편을 통해 편지를 받았고 이어 새해(新元)를 알립니다. 스님께서 편안하시다니 위로되고 시원함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변방 밖에서 새해를 맞고 나이를 먹으니 쓸쓸함을 느낍니다. 다른 것이야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줄(콩의 일종)이 이미 익었고 자두도 딸 만합니다만 그러나 한번 간다고 약속했는데 그 사이 신태희(申泰熙)께서 한양에 올라가시게 되어 신용 잃는 것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탄식한들 무엇 하겠습니까. 출발할 날을 다음달 10일로 이미 정해서 2~3일 사이로 기약하고 단단히 (약속을) 실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이 마음과 같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또한 그 확실한 것을 보장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東茶行’을 서울로 보낼 때 사람을 시켜서 급히 등초 시켰는데 지금 열람해보니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의문 나는 곳에 표를 한 것 말고도 착오가 더 있는 것 같아 부칩니다. 요행히 버릴 곳은 버리고 개정하시어 인편에 다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나머지는 이만…28일 북산 노인


(歲換新舊 信息阻絶 懸望雲水 徒勞神往 非意轉便 獲承手滋 仍諗新元 禪體珍重 豈勝慰豁之至俺 關外逢新 齒添感祟 餘何足道 苽已熟矣 李將治矣 然一造之約 間因晶陽之上洛 未免失信之科 何嘆何嘆 發行日字 以開月旬日已定 期於初二三間 奮袂踐約計 而事不如意者多 亦難保其的然也 東茶行送京時 使人急謄 今覽多誤 懸標質疑而此外 似又錯誤 故 爲付呈 幸望逐處改定 回便還投 是望耳 餘留 不備式 卄八日 北山老人 頓)


이 편지는 변지화가 화원리에 있으면서 보낸 것이다. 당시 그는 진도 목사였다. 편지의 말미에 쓴 간지(干支)는 이 편지를 보낸 연도와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인데도 이 편지에는 28일 북산도인이 보낸다는 내용뿐이다. 북산도인의 변지화의 호이고 추사학파였다는 사실이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적다. 하지만 그가 이 편지를 쓴 시점은 초의 스님이 홍현주에게 ‘동다행’과 함께 보낸 편지가 남아 있어 대략 이 글은 1837년 여름 쯤 초의에게 전해졌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 글에서 변지화는 당시 해남 현감이었던 신태희가 상경할 예정이므로 그와 함께 초의 스님을 만나려 계획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전해지고 있는 ‘동다송’의 표제명(表題名)이 무슨 연유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실증적인 단서, 다시 말해 ‘동다행(東茶行)’을 한양으로 보낼 때 사람을 시켜서 급히 쓰게 했다. 이 후 다시 열람해보니 의문 나는 곳에 표를 한 것 말고도 착오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변지화가 필사해 홍현주에게 보낸 ‘동다행’은 초의 당시부터 오탈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박동춘 소장
따라서 초의 스님이 ‘동다행’을 정정하는 과정에서 ‘동다송’으로 개명되었고, 이 ‘동다송’이 변지화를 통해 다시 홍현주에게 전달된 것이다. 실로 ‘동다송’ 저술의 뒷이야기는 한 장의 편지로 인해 그 전말이 밝혀지게 된 것, 자료의 중요성이 거듭 거듭 확인된 셈이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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