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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의 생물학, 경쟁의 교육학

기자명 법보신문

한국에서 자살은 이제 양적으로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최고 수준이 된 듯하다. 지난해 서울대생 가운데 5명이 자살했다고 하더니, 올해는 몇 달 안되는 사이에 카이스트 학생 4명, 급기야 교수도 1명 자살을 했다.


잘나가는 엘리트들이 앞장서 자살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드러난 카이스트의 현실은 자살의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징벌 등록금, 예외 없는 영어강의, 등록연한 제한, 교수들의 실적주의 등등 단 한순간도 경쟁에서 피할 수 없는 제도로 학생은 물론 교수들을 토끼 몰듯 쪼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토끼몰이 제도들이 한때는 총장이름을 따 ‘서남표 개혁’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찬양되었다고 한다. 카이스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살이 많은 이유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멀쩡한 소 돼지가 잔계산의 경제학 때문에 턱도 없이 죽는다면, 멀쩡한 학생들이 경쟁과 도태의 생물학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다윈의 ‘적자생존’이나 ‘자연도태’라는 개념이 스펜서의 사회학이나 멜서스의 경제학에서 기원한 것임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경쟁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협력과 공생이 있음을 알기 위해 마굴리스의 공생진화론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삶을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좀 더 나쁜 것은 경쟁과 도태에 대한 단순화된 관념이다. 다윈에 따르면 가령 마데이라 지역에는 날개가 퇴화되었거나 있어도 날지 못하는 딱정벌레가 반 정도나 된다고 한다. 이유는 잘 나는 놈들은 바람에 날려 바다에 떨어져 쉽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에선 생존경쟁과 도태는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완전한’ 것들에게 불리했고, ‘불완전한’ 것들이 ‘적자(fittest)’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는 단지 하나의 특별한 예가 아니다. 두 앞발이 퇴화된 장수풍뎅이 등 많은 사례를 다윈 자신이 언급하고 있다. 살아남아 ‘진화’하는 것들, 그것이 좀 더 ‘진보된’ 것, 좀더 ‘완전한’ 것은 아니다. 환경에, 조건에 잘 맞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을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경우에조차,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즉 어떤 경쟁인가를 보는 것이다. 성적이 징벌적 등록금까지 이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재능이 있거나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개체들이 아니라 성적관리를 잘하는 개체들이다. 성적관리를 위해 흥미와 열정을 죽이며 좋아하는 강의를 포기할 줄 아는 ‘지혜’, 배울 것도 별로 없고 매력도 없지만 성적을 잘 주는 과목을 선택하는 ‘지혜’, 그것이 그런 경쟁에선 살아남는 비결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이런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을 자는 그런 계산과 관리에 능란한 자일 것이다. 그들이 재능 있는 창조적 연구자가 될까? 그보다는 관리자 계통의 직업을 택하는데 다음번 경쟁에서도 살아남는 방법일 것이다.


일정 비율의 탈락자를 무조건 내야 하는 성과급 체계가 열심히 공부하는 교수를 선별할 거라고 가정하는 경쟁체제에선 어떨까? 생존이 달린 그 경쟁에서, 애써 논문이야 쓰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령 새로운 교수를 선발하면서 경쟁력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은 미련한 짓이 되지 않을까? 경쟁과 성과 간의 선형적 관계만을 고려하는 경쟁의 생물학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경쟁자들을 조절하는 인간의 이러한 피드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성’이 있는, 즉 계산하는 동물에게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의 자살 또한 이런 피드백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경쟁의 생물학에 기초한 교육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진경 교수
지금 모든 대학을 겨냥하고 있는 경쟁이 어떤 학생, 어떤 교수가 ‘생존’하게 하여 어떤 대학을 만들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경쟁이 모든 것을 ‘진보’하게 하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어리석다 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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