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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금강산 유람과 초의차 연원

기자명 법보신문

초의차 완성은 전통적인 사찰차 복원에서 비롯

초의차 명성 높았던 것은
차에 대한 명확한 이론과
삼매의 경지 잘 어우러진
제다방법 터득했기 때문

 

 

▲초의 스님은 1838년 봄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곳에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사진은 정선의 ‘금강전도’.

 


초의 스님이 금강산 유람 길에 오른 것은 1838년 봄이다. 그는 시자방에 있던 수홍(秀洪)을 데리고 유람 길에 올랐다. 당시 금강산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과 철원을 지나 강원도의 김화와 회양을 거쳐 내금강산으로 들어가 명승지를 둘러보고, 동해안의 관동 팔경을 거쳐 다시 외금강으로 들어가 유람한 후 한양으로 돌아오는데 대략 20~30일 걸리는 장도(長途)였다.


당시 그의 금강산 유람은 경화사족 사이에서 상당한 화제꺼리였다. 무술(1838)년 봄에 수홍과 함께 지었다는(戊戌年春與秀洪同作) ‘유금강산시(遊金剛山詩)’에는 금강산의 웅혼한 경치를 담담히 그렸다. 시원하고 통쾌한 그의 웅지는 분명 수행에서 얻어진 것. 명산의 속 깊은 위용을 일필(一筆)로 드러냈다. 한편 그가 쓴 ‘주상운타(注箱雲朶)’ 후기에는 1834년에도 금강산 유람을 계획했다가 무산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삼년이 지난 갑오(1834)년 가을, 또 취연(醉連)과 함께 금강산 유람을 계획하고, 철선(鐵船)과 만휴(万休)도 함께 가려 하였다. 철선과 만휴는 공주 경계의 갈라지는 길에서 되돌아가 곧바로 금강(錦江)을 건너갔고, 나와 취연은 보운산(寶雲山)으로 금령(錦)을 찾았다(甲午秋 又與醉蓮作金剛遊 鐵船万休偕行 及回還船與休分路於公州界 直度錦江 予與蓮爲弔錦舲於寶雲山中)


그가 두 번째 상경길에 올랐다가 대둔사로 돌아간 것은 1832년경이다. 삼년이 지난 1834년 가을 다시 금강산 유람 길에 올랐다는 것인데 당시 동행 인물은 취연과 철선, 만휴이었다. 이들의 이 계획은 대둔사에서 이미 논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들의 장도(長途)는 성사되지 못했다. 이 글을 통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대둔사를 출발해 공주 부근에서 도착한 철선과 만휴는 초의에게 금강산을 유람할 수 없게 된 전후사정을 전달 받는다. 이들은 대둔사에서 공주까지는 거의 십여일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를 왔으련만 오던 길을 되돌아 곧장 대둔사로 돌아갔고, 초의와 취연은 보은산으로 금령 박영보를 찾았다는 것이 확인된다. 또 다른 자료인 금령의 ‘자운음고(紫雲吟藁)’에는 당시의 정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초의 스님과 철선, 견향, 자흔 세 화상이 금강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하고 한상(漢上)에 이르러 철선과 자흔을 대둔사로 보냈다. 이로 인해 김 추사와 금호에서 지내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를 찾았다고 하고, 수제차를 주었으며 며칠 머물다 떠났다(草衣師與鐵船見香自欣三和尙 約遊金剛 至漢上 只遣香欣入山 因與金秋史 說經于琴湖 歸路訪余 贈手製茶 數宿而去)


박영보의 증언으로는 초의가 금호의 추사 댁에서 지냈고, 그가 만든 차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의는 무슨 이유로 금강산을 가지 못했고 추사 댁에 머문 것일까. 신헌(申櫶)의 ‘금당기주(琴堂記珠)’에는 저간의 사정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두 선사가 산천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하고, 불등(佛燈)을 가리키며 서약했다. (초의가) 천리 길을 달려와 약속을 지켰지만 산천이 병이 나서 마침내 그만 두었다. 다만 거사의 병을 살피며 수일동안 머물렀는데 (대둔사로) 돌아감을 몹시 서둘렀다(二禪師與山泉約遊金剛 指佛燈爲證 及千里赴約 山泉有疾 遂已之 但聽病居士 設經數旬 其歸甚倀倀)


신헌은 추사의 제자로 누구보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쓴 글을 신빙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글에서 언급한 두 선사는 바로 초의와 취연을 두고 한 말이다. 초의의 금강산 유람 계획은 이미 1831년 산천 김명희와 약속된 일로, 이들은 불등(佛燈)을 사이에 두고 굳게 언약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김명희의 발병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상경한 초의는 피치 못할 저간의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철선과 자흔을 대둔사로 돌려보냈다. 자신과 취련은 금호의 김명희 집에서 머물다가 대둔사로 돌아 간 것. 초의는 금호를 떠나면서 김명희를 위해 ‘금호유별산천도인(琴湖留別山泉道人)’을 남겼다.


한편 초의는 자신이 만든 수제차를 가져와 박영보와 추사, 홍현주 등에게 선물하였고, 1838년 금강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홍현주의 마장병사(瑪莊丙舍)를 찾아가 차를 마시며 시를 지었다는 것이 홍현주의 “시 짓고 차 마시니 모두 선미여서 나 또한 세상의 유발승이라(吟詩啜茗皆禪味 我亦人間有髮僧)”라든지 “손수 만든 햇차 귀한 선물에 감동하고, 풍성한 시 부뚜막 한철 안거를 견딜 양식이라. 홀연히 만났다가 곧 헤어지니 서린 회포 저절로 실버들처럼 길구나(手製新茶感珍貺 暴富詩廚三夏糧 忽漫相逢卽相別 懷緖自與柳絲長)”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를 통해 초의는 1830년 두 번째 상경 이후 사대부들과 교유가 확대되면서 이들의 초의차에 대한 이해가 확실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37년 홍현주의 요청으로 ‘동다송’을 저술한 초의는 이미 이 시기에 차에 대한 이론 정립과 제다술이 완성된다. 그가 이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수제차를 선물할 수 있었던 것은 초의차가 완성 단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차는 심신 정화기능 구비
선종에서 차와 수행 결합
정약용의 차 이해 수준이
건강차원서 그쳤다면 저급


김홍도의 ‘묘길상’.

그렇다면 초의의 차에 대한 이론적인 토대와 제다술은 어디에서 연원된 것이며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혹자는 초의가 다산에게서 차를 배웠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하지만 초의차는 대둔사에 전승되어 온 사원차에서 연원된 것이다.

 

대둔사는 서산의 제자 편양 문인들이 주석했던 대사찰로 13대 강사와 13대 종사를 배출할 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사찰이다. 선교융합의 수행풍토와 차는 초의 스님의 스승인 완호와 연담에게 까지 전해져 완호의 제자인 삼의(三衣: 호의, 하의, 초의를 말한다)가 모두 차를 즐겼던 인물이었다. 이들의 음다 풍속이 당시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누란위기(累卵危機)에 있었던 다풍(茶風)을 이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둔사를 중심으로 만덕사의 아암과 그의 제자 수룡, 철선 그리고 초의와 그의 제자 향훈은 추사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훌륭한 차품을 만들었던 승려였고, 무위, 범해, 이봉, 남파, 영호는 모두 차를 아끼고 즐긴 수행승들이었다. 이들은 조주의 ‘끽다거’ 전통을 미미하게 유지했을 뿐이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온 후 대둔사의 승려들이 그의 전등계(傳燈契) 제자가 되었고, 그를 통해 경학과 시, 그리고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에 대한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실로 다산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다산의 문하를 출입했던 승려들이 시학에서 높은 안목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산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변방의 승려들이 수준 높은 학덕을 겸비한 사대부들과 교유하고자했던 열망은 불교의 상대적인 열악성과 이들의 학문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초의는 북학파 경화사족들과의 교유를 통해 시대적인 흐름을 이해하였고, 이들은 초의를 통해 불교를 이해하려 하였다. 차 또한 이들의 인식을 변화시킨 이는 초의였다. 이들은 초의차를 통해 비로소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이해했으며, 차의 우수한 효능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초의가 차의 이론적 체계와 삼매의 경지와 어우러진 제다 방법을 터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의차는 1830년 이후 이미 추사 형제들과 그의 제자들, 다산의 자제와 그의 제자들, 홍현주와 그의 형제들, 신위와 그의 제자들은 물론 이들의 주변 인사들에게까지 회자되었다.


초의가 이룩한 차의 공적은 추사와 신위 등 조력자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의 조력으로 만들어진 초의차는 한 세대를 풍미하며 차 문화를 중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고, 초의차는 차의 애호층을 확대하기에 족한 명차였다. 이들은 쇠퇴기의 조악함을 벗어난 초의차를 음미함으로써 차의 정수를 이해하였다. 이들은 초의의 이러한 노력을 극찬하였다. 역사적으로 차의 변천을 살펴보면 처음에 차는 약용으로 이용되다가 점차 정신 음료로 발전되었다.


차가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수행에 결합시킨 것은 선종이다. 선종과 융합된 차는 단순한 물질에서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단계로 수행의 음료로 발전되어 정신적인 수행자와 문인들은 차의 이러한 덕성을 군자에 비유하는 단계에 이른다. 덩달아 탕법과 도구, 제다술도 최고의 수준이 이른다. 하지만 모든 것은 성쇠(盛衰)가 있는 법, 차 문화가 난만한 시기에는 극품을 생산할 수 있는 저력과 수준 높은 안목자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쇠퇴기에는 차에 대한 활용이 원시적인 응용 범위를 넘지 못한다. 조선 후기 차가 감기약이나 이질을 치료하고, 소화를 돕는 약으로 전락한 것은 쇠퇴기의 유형이 남아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쇠퇴기의 차는 그것이 지닌 고상한 가치를 이해하는 이들이 드물었기 때문에 차품 또한 저급한 수준으로 추락되었다. 만약 다산이 이해한 차가 체기를 내리는데 쓰는 정도였다면 다산이 아무리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시대의 걸물이라 하더라도 차에 대한 안목은 저급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박동춘 소장
더더욱 다산이 초의와 아암에게 차를 가르쳤다는 논리는 너무 무모한 단언이라 여겨진다. 초의가 이룩한 초의차의 완성은 평지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미미하지만 명맥을 유지했던 사원차의 원형을 복원한 것이기에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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