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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송광사 주지 도영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거짓 없는 삶이 깨달음 이르는 지름길

 

▲도영 스님

 

 

멀리 창밖을 바라보니, 곳곳마다 ‘주인’이 나투어 계십니다. 여러분들 역시 ‘주인’입니다. 주인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임제 선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수처작주(隨處作主)요, 입처개진(立處皆眞)입니다. 어느 곳을 가든 내가 주인이어야 합니다. 남의 정신에, 남의 행동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닌 내가 주인으로서 거듭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1961년에 출가한 소납 역시 늘 화두처럼 생각한 것은 ‘도대체 깨달음을 얻는 삶은 어떤 삶인가’에 관한 자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상좌들에게는 ‘깨닫기 전에 먼저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조석(朝夕)으로 일렀고 그러한 믿음이 확고하였기에 ‘참 진’(眞) 자를 넣어 제자들의 법명을 지었습니다.


참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떠한 깨달음도 증득할 수 없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성과 중심적 발상을 하는데 그리하면 안됩니다. 거짓되지 않은 삶이 바로 깨달음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된 삶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보살의 3가지 진실된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로 불자는 불보살님을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보살의 원력대로 살아야 하는데도 우리들의 일상을 살펴보면 생활 따로, 불교 따로 입니다. ‘지금 이곳 법당에서 부처님께 합장하고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서원하시겠지만 현실에서는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보살도를 실천해야 삶도 진실해져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爾 內世得作佛)”이라고 했습니다. 풀어 쓰면 일체의 법은 유위도, 무위도 아니며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불자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부처를 이룰 수 있다(內世得作佛)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의 얼굴을 살피고 있자니 수행정진을 잘하시고 보살도를 잘 실천하는 성품들이 엿보여 모두가 훌륭해 보입니다. 보살로 거듭나 보살행을 실천하고 보살도를 실천해야 비로소 우리들의 삶은 진실되게 변합니다.


‘법성게(法性偈)’에 보면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이라고 했습니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진리의 보배가 허공가득 비처럼 내리고 중생들은 저마다 자신의 그릇에 따라 얻어가는구나’라는 뜻입니다. 실상이 그러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일체 중생에게 똑같이 내립니다. 그런데 ‘중생수기득이익’이라, 중생의 그릇에 따라 이익을 더 많이 가져가기도 하고 덜 가져가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담을 수 있는 그릇, 그 마음자리를 자비롭게 증장시키기 위해 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날마다 좋은날이 되세요’라고 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 나에게 좋은 날을 만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날마다 좋은 날로 만들고 가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알면 평생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교를 알면 집착을 버리고 행복의 길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알면 절대로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날마다 좋은날을 보내게 됩니다.


“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 욕지내생사 금생작자시(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라 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 의미는 ‘만약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며 다음 생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행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다음 생의 모습’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살다보면 ‘왜 그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하고 이해가 안되고 용납이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으로 비춰지는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바로 전생에 지은 인과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일화를 한 토막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노스님께서 자신의 전생사를 살펴보니 남의 것을 훔친 과보가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 과보를 받으러 올 것이라 생각하여 방석 밑에 돈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도둑이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들고 왔습니다. 도둑은 칼을 들이대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얼른 돈을 주면서 ‘아이고, 이제야 빚을 갚았구나’하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일은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고통이 커집니다. 그냥 일어난 일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항상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세요. 금생에는 받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베풀어서 행복한 마음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항상 베풀 때 다음 생에 받을 수 있는 것이며 베풀지 않고 매번 받기만 하면 자비의 마음을 키울 수 없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불자라면 인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분들을 ‘좋은 인연’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또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이기에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불자의 삶입니다.


상대를 오해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세 번만 생각하세요. 그러면 화(火)가 사라지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하게 되면 미워하는 마음이 금세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면 운명이 바뀝니다.
여러분들에게 화두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중국의 승찬 선사께서 설하신 신심명(信心銘)의 한 구절입니다.


도(道)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어른 스님들께서는 ‘도통하기는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이르셨습니다. 그럼 그렇게 쉬운데 왜 못하느냐, 그 이유는 ‘간택심’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증애심만 떨쳐버리면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땅히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떨쳐버리면 모두가 깨달음을 증득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법구경’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면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고 미워하면 자주 만나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삼학 배우고 지키면 날마다 좋은날


미운 사람은 왜 밉습니까, 미운 짓을 하니까 밉겠지요. 미운 짓을 왜 하느냐, 그것은 인과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운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위없는 자비로 포용할 줄 알아야합니다. 미운 짓을 한다고 구박하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로 인해 더욱 미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인과를 모르고 인연의 소중함을 모르기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구나’하고 감싸고 용서할 때 우리는 여실히 불성(佛性)을 직관할 수 있습니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탁 트여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멀리할 것이며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증애심(憎愛心)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합니다. 한 가지 더 첨언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무상관(無常觀)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체는 무상합니다. 그 무엇 하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상관으로 직관하게 되면 영원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 자체도 내 것이 아닌데 그 무엇에 집착을 하는 것인지요. 그렇기에 여러분들은 항상 무상관을 관할 줄 알아야 하고 자비심을 간직하고 그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려면 끊임없이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배워야 합니다. 계정혜 삼학을 왜 배워야 하느냐, 그것은 탐심과 어리석음, 성냄을 씻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계를 실천함으로써 다스릴 수 있고 번뇌 망상으로부터 일어나는 성냄은 선정으로써 정화할 수 있고 어리석음은 반야(지혜)로서 물리칠 수 있습니다. 탐심은 원력으로 바꾸어야 하고 성냄은 자비심으로 바꿔야 하고 어리석음은 지혜로 바꿔야 합니다. 불퇴전의 원력과 자비와 지혜로서 우리는 ‘날마다 좋은 날’을 완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정리=조영훈 광주지사장

 

이 법문은 4월17일 무등산 증심사 취백루에서 열린 ‘무등에서 길을 묻다’ 초청법회 두 번째 법석의 법사인 조계종 전 포교원장 도영 스님의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다음 초청법회는 5월17일 오전 11시 방송인 이상벽 씨를 강사로 진행됩니다. 062)226-0108


 

도영스님은

1935년 전북 부안 출생. 1961년 김제 금산사에서 월주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1년 금산사에서 금오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8년 법주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고 김제 흥복사·금산사 주지, 8~10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포교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완주 송광사 주지 소임을 맡아 가람을 수호하고 신도교육과 수행을 지도하며 불법홍포의 원력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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