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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 취하지 않고 떠나지도 않아야 성품 절로 드러나

기자명 법보신문

있음과 없음 집착하는 것은
모두 함께 삿된 소견일 뿐
밖 없는 지극한 큰 모습이
안 없는 지극히 작은 모습

 

 

▲돈황 막고굴 57굴 관세음보살.

 


77.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간다


輔行記 釋云. 且約一念刹那心所起 故言小也. 卽此一念 具足法身一切佛法 卽是能容須彌之大. 大小常遍 理事無礙 本來相卽故. 所以 不斷煩惱 而入涅槃. 只指凡夫一念刹那心 具足難思法身之體 本來相在故.


‘보행기’에서 말하였다.
한 생각 한 찰나의 마음에서 일어남을 기준하므로 ‘작다’고 말하지만, 이 마음에서 법신의 온갖 부처님 법을 다 갖추고 있으니 그대로 수미산의 크기를 담을 수 있다. ‘대(大)’와 ‘소(小)’가 늘 두루 하여 ‘이(理)’와 ‘사(事)’에 걸림 없어 본디 서로 ‘상즉(相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간다. 이는 다만 범부의 한 생각 한 찰나에 생각하기 어려운 법신의 바탕을 다 갖추고 있기에 ‘본디 서로 존재함[相在]’을 일깨워 주고 있을 뿐이다.


강설) ‘이(理)’는 이치요 ‘사(事)’는 현상이다. 법신의 바탕이 이치요 그로 인해 드러나는 마음의 모습이 현상이다. 이치가 작용하여 현상이 일어나니 이치를 떠나 현상이 있을 수 없고 현상에서 그 이치가 드러나니 현상에서 이치를 분리할 수 없어 본디 서로 ‘상즉’한다. 번뇌가 일어날 때 법신의 성품에 맡겨 일어나고 사라짐에 자유자재할 수 있다면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


법신의 바탕은 예로부터 그 무엇도 없이 투명하기가 한 점 티끌도 없는 푸르른 허공 같은데, 한 생각 일어나자 온갖 망념이 다투어 일어나는 것이다. 원래 망념이 없음을 알고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짐에 그대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무심한 사람이 수행자이다.


78. 종경의 이치로 배움이 끊어진 곳


經云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以瞥有一毫起處 悉落見聞 從分別生 俱非眞實. 若不達無相卽相 則是取相凡夫 若了相卽無相 則成唯心大覺. 旣不可取相求悟 亦不可離相思眞. 不卽不離 覺性自現. 以入宗鏡中 理當絶學 百氏之說 一敎能明 萬化之端 一言可蔽.


‘금강경’에서 “존재하는 ‘온갖 모습’은 다 허망한 것이니 ‘온갖 모습’에서 ‘허망한 모습이 아닌 참모습’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하였다. 갑자기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다 보고 듣는 알음알이에 떨어져 분별이 생긴 것이니 모두 진실이 아니다. 만약 ‘무상(無相)’이 그대로 ‘상(相)’임을 통달하지 못하면 ‘상(相)’을 취한 범부이나, ‘상(相)’ 그대로 ‘무상(無相)’임을 알면 ‘오직 마음이란 큰 깨달음’을 이룬다. 이미 ‘상(相)’을 취해 깨달음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상(相)’을 떠나 참 깨달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상(相)’을 취하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아야 깨달음의 성품이 절로 드러난다. 종경의 이치로 배움이 끊어진 곳에 들어가면 수많은 가르침을 한 가르침으로 설명할 수 있고, 온갖 변화의 실마리를 한 마디로 덮을 수 있다.


강설) 야부 스님은 이 부분을 게송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모습 있다 하여 찾는다면 모두 거짓
형상없어 못 본다면 이것 또한 삿된 소견
당당하고 깊은 고요 어찌 틈이 있을 건가
한 줄기로 뻗는 섬광 온 허공이 환해지네.

[有相有求俱是妄 無形無見墮偏枯 堂堂密密何會間 一道寒光爍太虛]


이 야부송에 대하여 함허 스님은 이 부분을 “있음에 집착하고 없음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함께 삿된 소견이 되니, ‘있음’과 ‘없음’에 집착하는 것이 둘 다 없어야 한맛으로 법신이 항상 드러나리라[執有執無 俱成邪見 有無無二 一味常現]”고 하였다. 함허 스님은 “눈앞에 어떤 법도 없지만 눈이 가는 곳마다 다 여여하니 다만 이와 같이 알면 곧 부처님을 본다.[目前無法 觸目皆如 但知如是 卽爲見佛]”라고 하였다.[도서출판 법공양 신간 야부 스님 금강경 참조]


79. ‘이치’든 ‘현상’이든 모두 ‘참마음’


華嚴經云 一念 於一切處 爲一切衆生 示成正覺 是菩薩園林 法身周遍 盡虛空一切世界故. 又云 一切菩薩行 遊戱神通 皆得自在 是菩薩宮殿 善遊戱諸禪解脫三昧智慧故. 是以 正報依報 皆成佛法. 所以 淨名私記云 取妙喜來此土者 辯於淨穢無二也 彼界雖來入此土 亦不增減 本性如故. 雖來 畢竟不動 何意如此 好自思之. 故知 萬法施爲 隱顯往復 若事若理 皆不出一眞心矣.


‘화엄경’에서 “한 생각으로 모든 곳에서 온갖 중생을 위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보여 준다.”라고 한 것은, 숲 속에 앉아 있는 보살의 법신이 온 허공의 모든 세계에 두루 하기 때문이다. 또 “온갖 보살행으로 신통에서 노닐며 다 자재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보살이 자기 수행터에서 온갖 선정의 ‘해탈삼매지혜’에서 잘 노닐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중생과 세간이 모두 부처님의 법을 이룬다.


그러므로 ‘정명사기’에서 “유마 거사가 묘희의 세계를 가지고 이 땅에 오게 한 것은, 부처님의 국토와 중생의 국토가 다를 바 없음을 말해 준다. 그 세계가 중생의 국토에 왔더라도 또한 증감이 없었으니 본디 성품이 여여(如如)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비록 다른 세상에서 왔더라도 끝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으니 왜 그런가를 스스로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으면서 되풀이 온갖 법을 베푸는 것이 ‘이치’든 ‘현상’이든 모두 ‘참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강설) 의상조사 법성게 “이치와 현상은 하나로서 분별이 없어[理事冥然無分別]”라는 구절을 이 단락 내용에 맞게 풀어놓은 매월당 김시습의 글을 응용하여 인용해 본다.


이치와 현상을 설명함에 많은 방법이 있더라도, ‘참마음’과 ‘참마음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벗어나지 않는다. ‘참마음’의 이치는 언제나 오묘하게 작용하고 ‘참마음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현상’은 법 하나하나가 늘 오롯하다. 동림의 숲이 울창함에 남악의 산세가 가파른 것은 보현의 경계이며 문수의 면목이다. 덩굴을 잡고 정상에 올라가 병을 손에 들고 연꽃을 채취하는 것은 문수의 지혜이며 보현의 묘용(妙用)이다.


무엇이 인연으로 생겨날 때에 결정된 어떤 성품이 분명히 없지만 이곳에서 항상 무엇이 생겨나고 있으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겠느냐. ‘참마음’ 하나에 모든 경계를 갖고 있으니, ‘색(色)’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면서 ‘보살행’도 아니로구나.[說理說事 縱有千般 不過甚深眞性 不守自性而已. 眞性之理 妙用恒然 眞性之事 法法常融. 東林鬱密 南岳嵯峨 普賢之境 文殊面目. 攀蘿登頂 挈甁採蓮 文殊之智 普賢妙用. 緣起時 的的無性 無性處 常常緣起 還相委悉麽. 一地具足一切地 非色非心非行業]


80. 터럭 끝에 놓여 있는 마음 법문


華嚴經頌云 金剛鐵圍數無量 悉能置在一毫端 若明至大有小相 菩薩以此初發心.


‘화엄경’ 게송에서 말하였다.


금강산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도
터럭 끝에 이 모든 것 놓을 수 있네
지극히도 큰 모습에 작은 모습들
이로 보살 공부하려 첫 마음 낸다.


以大小無性 廣狹隨緣. 若能明見 至大無外之相 卽至小無內之相 皆是一毫端心地法門 名爲見道. 故云 菩薩以此初發心. 如是解者 不易凡身 生如來家 成眞佛子.


게송의 뜻은 크고 작음에 결정된 성품이 없기에 넓고 좁은 인연을 따른다는 것이다. 만약 ‘밖이 없는 지극히 큰 모습’이 그대로 ‘안이 없는 지극히 작은 모습’임을 분명히 볼 수 있다면 다 터럭 끝에 놓여있는 마음 법문이니 이를 일러 ‘견도(見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보살이 공부하려고 첫 마음 낸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아는 사람은 범부의 몸을 바꾸지 않고도 여래의 집안에 태어나 참다운 불자가 된다.


강설) 법성게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계계를 품고 있다[一微塵中含十方]”라는 구절을 이 단락 내용에 맞게 풀어놓은 매월당 김시습의 글을 응용해 티끌을 터럭으로 바꾸어 옮겨 본다. 단지 조그마한 터럭 가운데 무진법계(無盡法界)를 싸안으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과 부처님, 정토와 예토가 빠짐없이 가득하고 두루 하여 모자라거나 남을 게 없다.


그렇다면 다만 이 하나의 터럭 속에 얼마나 많은 게 있을 것이며 무량법계에 얼마나 많은 기량이 있겠느냐. 아! 크고자 하면 커지고 작고자 하면 작아지니, 하나의 터럭에서 시방세계를 생각하니 시방세계가 작고 시방세계로써 하나의 터럭과 견주니 하나의 터럭이 커지는구나. 이는 ‘참마음’이 인연으로 일어날 것이 없기 때문이며 ‘참마음’에 결정된 자기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원순 스님
[只這一星兒中 包含無盡法界 無量生佛 淨土穢土 一一充滿 一一周遍 無欠無餘. 伊麽則 只這一星兒 還有許多限量麽. 無量法界 還有許多技量麽. 咄 要大卽大 要小卽小 一塵計十方 十方爲小 以十方量一塵 一塵爲大. 無緣起故 無自性故.]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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