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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겔룩파 수행도량 리종곰파

기자명 법보신문

세상의 끝인 듯 고독한 도량서 나를 돌아본다

 

▲세상에서 버려진 듯 삭막한 계곡의 끝에 둥지를 틀고 있는 리종곰파. 하얀 사원 건물 아래 있는 학교 앞으로 지난 폭우에 쓸려온 흙더미가 잔뜩 쌓여 있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시작된다. 저 길 뒤에 무엇이 있을지,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기우는 해는 지친 몸을 쉬려는 듯 산등성이에 기대고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점점 더 잦아진다.


목적지인 리종곰파까지는 30여분 정도를 더 걸어가야 한다. 비포장길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쌓여있어 얼마 전 지나간 폭우를 짐작케 하지만 아직 걸음을 늦출 정도는 아니다.


앞만 보고 걷다가 길에서 돌을 치우고 있는 대여섯 명의 라다키들을 만났다. 길가 곳곳에 쌓여있는 돌을 경운기로 실어 나르는 작업을 했나보다. 바윗덩이가 잔뜩 실려 있는 경운기 옆에는 곡괭이와 삽, 지렛대로 사용했음직한 나무막대기 몇 개가 놓여있다. 저런 허술한 장비로 저 큰 바윗돌을 치우고 있었다니 말문이 막힌다.


오늘 일과를 마친 듯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들에게 리종곰파로 가는 길의 상태를 물었다. 우리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열심히 뭔가를 설명해 준다. 길이 엉망이라는 뜻 같다. 차는 못 들어가도 경운기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곰파까지 태워달라고 부탁 해본다. 그랬더니 한 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이번엔 고개까지 휘젓는다. 안 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좀 태워주면 좋을 텐데. 섭섭한 마음이 슬며시 들지만 하는 수 없다.


그런데 그들과 헤어진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길이 사라져 버렸다. 허물어진 계곡, 큰물에 쓸려온 흔적이 역력한 바윗돌들이 길을 덮치고 계곡을 집어삼킨 것이다. 도대체 이 곳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걱정할 틈도 없이 어디에 발을 딛고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한 심정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나무도, 풀도 없고 물도, 생명도 없다. 인적도 없고 길도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대지의 뼈인 바위만 남은 모습이다. 조금 전 만난 라다키들이 손사래를 친 것은 태워주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태워줄 수 없다는, 경운기로도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마치 순식간에 다른 세상으로 공간이동을 한 듯 지독하게 고독한 계곡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다.


길은 사라지고 비는 오는데

 

 

▲끝없는 길을 걸어 마주한 리종곰파의 일주문.

 


길은 사라졌지만 좁은 계곡의 골은 안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도, 샛길도 없으니 적어도 길을 잃은 염려는 없다. 묵묵히 발끝을 살피며 전진, 전진. 도대체 이 끝에 뭐가 있다는 말인가. 세상과는 점점 멀어져, 세상의 끝으로 이어지는 듯 외로운 길. 이 삭막한 불모의 계곡 끝에서 수행자들이 구하는 지혜란 과연 무엇일까. 서너 걸음 앞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가이드에게 뭔가 묻고 싶지만 그도 힘이 드는지 말문을 닫았다.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돌덩이들을 살피며 묵묵히 걸을 수밖에.


그러기를 30분쯤 지났을까. 큰 산자락 하나를 돌아서자 일주문이 화들짝 눈앞에 나타난다. 리종곰파. 마침내 세상의 끝에 앉아있는 듯 한 도량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벌거숭이산에 기대어 벌집같이 매달려있는 사원. 일주문 코앞까지 폭우에 쓸린 흔적이 역력하지만 사원은 기적처럼 무사하다. 반갑고 대견하다.


“차 한잔 하고 가라” 노스님 당부

 

 

▲겔룩파 소속 사원인 리종곰파의 불단에는 달라이라마의 사진이 함께 봉안돼 있다.

 


때마침 빗방울이 굵어진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서는데 사원 밖에도, 안에도 사람이 없다. 저녁예불시간이라 스님들은 모두 예불에 참석한 것이다. 우리도 동참하고 싶지만 미리 허락을 받지 못해 불가능하단다. 하는 수 없이 작은 법당에 들러 참배를 한다. 아무런 조명도 없는 법당 안은 이미 어둠에 잠겨 불단에 모셔진 불상도 간신히 윤곽만 확인할 수 있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티베트 가사를 수한 노스님 한 분과 마주쳤다. 이 늦은 시간, 사원을 찾아온 이들을 보고 노스님도 놀라신 눈치다. 그래도 티끌하나 없는 맑은 표정으로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신다. 가이드가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지금 예불에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원을 둘러보는 것은 문제없어요. 다만 곧 어두워질 테니 서둘러야할 겁니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기 전에 차를 한잔 마시고 가세요. 한참 동안 걸어가려면 몸이 따뜻해야 힘이 덜 들어요.”


스님은 “차를 꼭 마시고 가라”고 재차 당부하고 돌아선다.
리종곰파는 단순한 사원이 아니다. 라다크 지역 대표 수행처이자 교육도량이다. 사원에는 현재 20여명의 스님들이 기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10여명은 10대의 동자스님들이다. 입구에는 동자스님들을 위한 학교도 있다. 지은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이 건물이 도량의 전망을 막아서고 있어 아쉽지만 그래도 이 학교가 있어 동자스님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수행하며 라다크 불교의 미래를 책임질 동냥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공부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노스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지 나이 지긋해 보이는 거사님 한 분이 우리를 공양간으로 안내한다. 공양간이라야 커다란 화덕 하나에 냄비와 주전자 몇 개가 전부다. 창가 옆 낡은 카펫 위의 앉은뱅이 상 앞으로 우리를 안내한 거사님은 화덕 위에서 끓고 있던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따라 우리에게 차를 내어준다. 비를 맞아 덜덜 떨리던 몸이 뜨거운 차 한 잔에 봄눈처럼 녹아내린다. 미처 몰랐는데 험로를 걸어오느라 몸이 제법 긴장했나보다.


카펫 위에 털썩 주저앉아 차 한 잔을 단 숨에 마시고 나니 창밖으로 보이는 이곳의 풍경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고독하다 못해 거칠고 삭막하게만 보이는 도량이었지만 다시 돌아보니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기도 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량은 바다 속에 가라앉은 도시처럼 고요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예불중인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대지의 노랫소리처럼 사원 안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온다. 심장의 고동소리처럼 낮고도 규칙적인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이대로 이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다. 하지만 ‘여자는 절대 사원 안에 머물 수 없다’는 리종곰파의 청규가 떠올라 말도 꺼내 보지 못한다.


공양간 거사의 손은 관음의 천수

 

 

늦은 시간 사원을 방문한 일행에게 차 한잔을 권한 고마운 스님.

 


화덕 앞에 서서 우리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거사님이 주전자를 들어 보인다. 차를 더 마시겠냐는 뜻이다. 얼른 잔을 내미니 아예 커다란 보온병 가득 차를 담아와 따라준다. 잠시 말동무나 할 요량으로 말을 걸어보지만 그저 해맑은 미소만 짓는다. 영어를 못하나 싶어 가이드에게 통역을 부탁해보아도 역시나 돌아오는 것은 더 맑은 미소뿐이다. 몇 번 말을 건네던 가이드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 거사님은 말을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그란 눈으로 우리 잔을 살피다 빈 잔에 차를 채워줄 때는 더 없이 기쁜 표정이다. 춥고 지친 나그네들에게 감로 같은 차를 따라주는 이 거사님의 굴곡진 손이 지금 우리에겐 관세음보살님의 천수와도 같지 않은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아니 세상의 대화법을 배우기에 조금은 부족한 신체를 가졌는지 몰라도 이 거사님의 마음속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따뜻한 찻잔 사이로 미소만 주고받으며 생각해본다. 폭우로 도로가 유실되지 않아 자동차를 몰고 단숨에 이곳까지 왔었다면, 이 차 한잔이 이렇게 따뜻했을까. 리종곰파가 인적 없는 산속이 아닌 도심 속의 어딘가에 있었다면 저 말 못하는 거사님의 미소가 이토록 반가웠을까. 사방에 불빛도 없고, 눈 감아도 소음이라고는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함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앉아 서로의 생각 속에 잠시 귀 기울일 수 있을까.


처음의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세상의 끝에 앉아있는 듯 이 삭막한 도량에서 스님들이 찾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 그것을 구해주기 위해 스님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벼랑 끝 한 자락을 찾아 이곳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이라면 이곳 리종곰파야 말로 그것을 찾기에 가장 좋은 곳이 분명하다.


도량은 점점 더 깊은 어둠에 잠기고 우리가 다시 돌아 내려가야 할 길조차 이제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인데, 우리는 또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아무도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웃기만 하던 동그란 눈의 공양간 거사님.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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