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다. 옅은 초록으로 대지가 수줍다. 길을 걷자니 나도 아이인 양 설렌다. 고개 들면 황사로 대기가 무겁지만 눈높이 세상은 꽃피고 푸르다. 고맙다. 이 계절이 있어 아무튼 고맙다. 길가엔 줄지어 달린 연등이 봄바람을 맞는다. 흔들흔들 하느작하느작. 하기야 시절을 생각하면 적이 처량도 하다만 애써 반갑다. 그래 부처님오신날이다. 크고 작은 절에선 폭풍 같은 하루를 보낼 것이다. 힘들지만 그래도 즐겁다. 절집 구석구석 사람들이 들어차니 시끄러워도 꽤 힘차다. 이 폭풍이 지나면 얼른 쓸쓸해지겠지.
부처님오신날은 마야부인이 아들 고타마 싯다르타를 낳은 날이다. 경전에선 싯다르타는 도솔천에 있다가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는 하얀 코끼리를 타고 천신의 호위를 받으며 왔다. 그가 도솔천에 있을 땐 인간이 아니라 천인이었다. 전생의 부처님은 인간으로도 살고, 동물로도 살고, 천인으로도 살았다. 그도 윤회 속에 있었다. 초기 경전에서는 윤회하는 전생의 부처님을 보통은 보살이라 호칭한다.
정확히는 보살은 부처님 전생과 깨달음 직전까지 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리킨다. 초기경전에 부처님 전생이야기가 많은 까닭은 정각자의 지난 인연을 보이기 위해서다.
전생이야기는 바로 부처됨의 인연을 보이기 위한 일종의 서사(narrative)다. 시공을 초월한 숱한 인연과 숱한 만남 그리고 숱한 노력의 결과로 부처되었음을 확인시킨다. 또한 부처됨의 삶을 보인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듣기에 도솔천도 꽤 괜찮은 곳이라는데 그냥 그곳에 계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인간이 아니라 천인으로 쭉 생활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왜 굳이 오탁악세의 홍진세계로 뛰어들었을까. 보살께서 고생을 사서 하셨구나. 그렇다. 고생을 사서 하셨다. 부처님 전기를 보면 고생을 사서 하시는 결정적인 지점들이 있다. 태어남도 그렇지만 가장 극적인 순간은 깨달음 이후 전도 선언이다.
마라는 안온한 열반의 도리 알았으면 그냥 혼자 그 기쁨 맘껏 누리라고 속삭인다. 그런데 천신은 부처님이 가르침을 펼치면 분명히 깨닫는 사람이 나올 거라고 하면서 법을 설하길 권청한다. 일종의 갈림길이 부처님 앞에 있다. 결국 다시 고생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법을 설하겠노라 선언한다. 그 선언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불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 이 전도선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을 하겠다는 것. 행동을 하겠다는 것.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것. 아직은 누더기를 걸쳤고, 아직은 제자 한 명 없고, 아직은 자신을 알아보는 이 하나 없다. 허나 중생은 너무도 많고, 그들이 겪는 고통은 너무도 크다. 그러기에 맡은 역할은 너무도 무겁다. 부처님은 스스로 짐을 지고 45년 간 터벅터벅 걸었다.
부처님은 전생의 그 숱한 인연이 쌓여 정각을 이뤘다면, 정각 이후에는 자신이 다른 깨달음을 위한 인연이 되고자 했다. 좀 있으면 어머니를 죽일 것 같은 살인마 앙굴리말라 앞에 나타난 것도 실은 자신이 하나의 인연이 되고자 해서다. 다시 생각해본다.
이 시대 한국에서 불교는 하나의 인연인가. 시절이 하수상해서 불교의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지만 저들 위정자가 아니라 이 사회에 하나의 울림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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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