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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결여된 선은 일고의 가치가 없어

기자명 법보신문

“이 모든 상황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하는 이 모든 일은 본질로 통한다(隨處作主 立處皆眞).” 임제록


선(禪)이 인간의 근원 탐구라면 그것은 당연히 나의 근원, 그 파동으로서의 이 현실 사회와의 불가분의 관계이어야 한다. 아니 사회에 대한 강렬한 영향력이어야 한다. 이러지 못할 때의 선, 사회생활과 연결을 갖지 못한 선은,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며 설사 선 이상의 그 어떤 것이라 해도 우리 인간사회에는 일고의 값어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선의 대사회적 연결은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정치·경제·문화 등 일체의 인간생활이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마음가짐에서 이탈되지 않을 때 인간생활은 그대로 선, 그것의 현실화인 것이다.


어떤 현실생활도 그 근저에 올바른 생각[正念]과 올바른 마음가짐[正定]만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선의 생활화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그들 생활의 밑바닥에 ‘정념의 상속(相續)’이 없다면 선에서 볼 때 그것은 모두 죽어 있는 삶(如同死人)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참된 자유와 창조적 생활, 그것의 실천은 영원히 불가능으로 남는다. 자기 부정에 의한 자(自)와 타(他)의 대긍정, 그를 통한 선적(창조) 생활이 현대와 같은 상황에 있어서는 한갓 잠꼬대일지도 모른다.


개인은 조직 속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인간이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에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낡아 빠진 말을 또 끄집어 내지 않을 수 없다. ‘참된 나’는 이렇듯 대중화, 대중화의 물결 속에 먹혀버렸다. ‘내가 시간에 의해서 부려지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내가 부린다’는 (조주 스님) 식의 인간생활의 주역으로서의 나는 불가능, 바로 그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제 아무리 거대한 메커니즘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기동(起動)의 스위치는 역시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메커니즘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도 역시 인간의 마음이다. 때문에 기계화, 조직화, 대중화의 거센 굽이에도 불구하고, 그 흐름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의 마음에 대한 중요성과 그 자각은 정비례하는 것이다.

 

▲석지현 스님
현대에 있어서 사회적, 정신적 상황은 ‘나를 찾는 길’과 전연 반대의 입장, ‘나를 잃어 가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선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수난이다. 그러나 현대의 상황이 역경적이면 그럴수록 더욱 강력하게 선이 내면에의 탐구가 또한 요구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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