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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빔비사라

기자명 법보신문

불법으로 백성 다스리며 전법 앞장선 현명한 군주

부처님의 법제자이자 외호자로 일생 보내
승단에 죽림정사 보시…왕비 출가 허락도

 

 

▲삽화=김재일 화백

 


다섯 개의 산이 주변을 둘러싼 아늑한 땅. 적절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으로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 곳. 넘쳐나는 사람들과 물품으로 항상 활기가 넘치는 도시. 바로 부처님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를 형용하는 말들이다. 전륜성왕의 땅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평화롭고 풍요로운 이 성의 왕은 빔비사라였다.


빔비사라왕은 어느 날 라자가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누각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저곳을 살피며 거리를 내려다보던 왕의 눈길이 한 수행자에게서 멈추었다.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를 뚫고 라자가하의 거리를 돌며 탁발하고 있는 그는 아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 없이 단정하고도 위엄을 갖춘 모습이었다.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저렇듯 고고하면서도 부드러운 기품이 흘러넘치는 것일까. 왕은 곁에 있던 신하에게 말했다.


“저기 가는 저 사람 좀 보거라. 참으로 아름답고, 장대하며, 청정하구나. 시선은 앞을 향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길 위를 주시하고 있다. 저 사람은 분명 고귀한 집안의 출신일 것이다. 가서 저 수행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 오너라.”


신하들이 서둘러 뒤따라가 보니 젊은 수행자는 탁발을 마친 후 라자가하성의 서쪽에 위치한 판다와산으로 들어가 한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뒤따라갔던 자들 중 일부는 남아 그를 감시하고, 일부는 성으로 돌아와 왕에게 보고했다.


“대왕이시여, 그 수행자는 빤다와 산의 앞쪽에 있는 동굴 속에 마치 사자처럼 앉아 있습니다.”
왕은 서둘러 마차를 타고 빤다와산으로 향했다. 수행자를 만난 왕은 인사를 건넨 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젊고 청춘입니다. 이제부터 인생은 시작이지요. 게다가 용모 또한 단아하고, 출신도 고귀한 왕족인 것 같군요. 나는 당신에게 어떤 재물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코끼리 무리를 선두로 하는 훌륭한 군대도 맡기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태생에 대해 궁금합니다.”
그러자 그 수행승은 대답했다.


“왕이여, 저 히말라야 기슭에 한 정직한 민족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코살라국의 주민으로 부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가계는 아딧차(태양의 후예)이고, 종족은 사캬입니다. 저는 그런 가문에서 출가했습니다. 제가 출가한 것은 결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욕망에는 재난이 있음을 보고, 이를 떠나는 것이 안락임을 알아 저는 도를 구하여 정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목적일 뿐 다른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 최강국 마가다국 왕


수행승은 왕의 매혹적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부처님과 빔비사라왕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빔비사라왕의 획기적인 제안을 뿌리친 이 수행승이야말로 이제 막 출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고타마 싯닷타, 즉 깨달음을 얻기 전의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당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왕이 왜 한낱 젊은 수행승에게 이런 어마 어마한 제안을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코살라국과 2대 대국으로서 경쟁 관계에 있던 빔비사라왕의 눈에 싯닷타의 남다른 모습은 함께 국력을 키워갈 적임자로 비추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싯닷타가 코살라국의 속국이었던 사캬족 출신이라는 점에 더욱 더 호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마가다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코살라국을 쓰러뜨리기 위해 코살라국의 종속국인 사캬족의 나라와 동맹을 맺어 그에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주고 코살라국을 협공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빔비사라왕의 눈에 싯닷타는 자신과 함께 마가다국을 발전시켜갈 더할 나위 없는 인재로 비추어졌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싯닷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설사 마가다국의 왕좌를 물려준다는 제안이었다 하더라도 이미 세속적인 욕망이 지니는 한계를 꿰뚫어본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싯닷타의 확고한 의지를 알아차린 왕은 대신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당신이 목적을 이루어 깨달음을 얻는다면 가장 먼저 나에게 법을 설하여 교화해 주십시오.”
세속적인 욕망이 아닌, 진리를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되자는 약속을 다지며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깨달음을 얻어 각자가 된 부처님은 불을 신봉하던 캇사파 3형제를 제도한 후, 이들 3형제와 그 제자 1000명을 데리고 라자가하로 가서 교외에 있는 랏티숲에 머물렀다. 지난 날 빔비사라왕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편, 사문 고타마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어 성 밖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왕은 많은 군신들을 동반하고 부처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곳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유명한 종교가로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던 캇사파 3형제가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 부처님에 대해 모르던 군신들은 수군거렸다.


“도대체 저 젊은 사문과 연로한 우루웰라 캇사파는 무슨 사이일까?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야?”
그러자 우루웰라 캇사파는 일어나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며 “부처님이야말로 저의 스승이십니다. 저는 그 제자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이 선언의 파장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당시 정치·경제·종교·문화 모든 면에서 최고를 달리며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던 라자가하에서의 이 선언은 부처님과 승가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최대의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부처님은 빔비사라왕과 군신들을 위해 “보시를 실천하고 계를 지키는 생활을 하면 하늘에 나게 된다. 여러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으니 애욕으로부터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는 내용의 설법을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고집멸도 사성제의 진리도 설하셨다. 이를 통해 왕과 군신들은 그 자리에서 청정한 법안을 얻게 되었다. 이때 왕은 부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저는 예전에 왕자였을 때, 5가지 원을 세웠습니다만, 이제 그 모두를 성취했습니다. 첫째는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저의 영토에 온전히 깨달으신 분이 오시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그 분께 예배드리는 것이었으며, 넷째는 그 분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었으며, 다섯째는 그 가르침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모든 소원을 다 이루었습니다.”


아들 배신으로 비참한 최후 맞아


왕은 너무나도 기뻤다. 예전에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처님이 라자가하를 찾아주셨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밝혀주는 진리를 설해주셨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가슴 벅차게 기뻤다. 왕은 우바새가 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부처님과 많은 수행승들이 함께 머물 수 있도록 자신의 소유인 아름다운 웰루와나, 즉 죽림(竹林)을 바쳤다. 높이 80척에 이르는 대나무가 뿜어내는 신비로운 청색 기운이 사방으로부터 매혹적인 빛을 발하는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게다가 라자가하 시내로 탁발하러 나가기에도 그리 멀지 않고, 또 지나치게 가까워 마을로부터 소음이 들리는 일도 없는 그야말로 수행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렇게 다시 시작된 부처님과 빔비사라왕의 인연은 평생 이어지게 된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보다 5살 연하였다. 15세에 즉위하고, 즉위한 16년째 되는 해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이후 37년 동안 부처님과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부처님과 불법에 대한 왕의 신뢰는 절대적인 것으로 심지어 사랑하는 왕비 케마가 출가의 뜻을 보였을 때는 마차를 준비해서 출가시켰다고 할 정도이다.


왕은 날마다 죽림에 가서 부처님께 예를 올렸으며 승가의 의식주 생활을 지원했다. 승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포살과 안거가 처음 도입된 것도 왕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왕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삼보를 공양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의 발전에 있어 왕이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온화하고도 지혜로운 왕의 성품은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더 빛을 발했고, 그 빛은 그가 다스리던 마가다국과 앙가국 국민들 모두에게 따스하게 미쳤다. 왕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왕을 따라 부처님을 찾고 의지했다. 부처님 역시 생애의 많은 시간을 죽림에서 보내시는 등 라자가하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보이셨다.


아쉽게도 부처님도 빔비사라왕도 노년에는 각각 제자와 아들의 배신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데와닷타와 아자타삿투, 이 둘은 각각 불교교단의 지도자와 마가다국의 왕이라는 지위를 탐하여 부처님과 왕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자고 모의한다. 부처님은 데와닷타의 행동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빔비사라왕은 결국 아들에 의해 유폐당하고 만다.


성 안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몸. 하지만 이때도 왕은 유폐된 방의 동쪽 창문으로 부처님이 계시는 영축산을 바라보며 예배드렸다고 한다. 이를 안 아자타삿투가 창문을 막아버리고 왕의 발을 찔러 일어서지 못하도록 했지만, 간절한 왕의 마음은 부처님께 전해졌고 세간의 모든 일을 아시는 부처님은 2대 제자 중 하나인 목갈라나를 불러 왕이 유폐되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잠시나마 그의 절망과 슬픔을 위로하게 하셨다.


▲이자랑 박사
싯닷타와 세속적 욕망을 함께 나누고 싶어 했던 빔비사라.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지만, 각자가 된 부처님과의 만남으로 그는 세속적 욕망과는 비할 수도 없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덧없는 욕망을 쫓는 어리석은 군주가 아닌, 보시와 덕으로 세상을 거느리는 현명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어느 순간이든 부처님과 함께 하고 싶었던 대왕 빔비사라. 이런 든든한 친구이자 외호자를 비참하게 잃어버린 부처님의 마음은 얼마나 침통하고 쓸쓸하셨을까 싶다.


이자랑 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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