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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빙하가 빚은 절경, 라마유루의 ‘문랜드’

기자명 법보신문

지상에 떨어진 달나라의 한 조각인가

 

▲라마유루 어귀에서 내려다 본 문랜드. 고갯길 정상에는 운전자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타르초가 나부끼고 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문랜드, 초승달처럼 휘어진 계곡을 따라 펼쳐진 상아빛 계곡의 풍경은 도저히 지상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뭐니뭐니해도 먹는 일 아닐까. 여행 중의 식사는 그 자체로 새로운 경험이기에 늘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식사가 늘 산해진미로 차려진 호화로운 만찬은 아니다. 가끔은 익숙하지 않은 음식들로 인해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더구나 라다크에서라면 기대감을 접어버리지는 않더라도 식탐을 버린다는 마음가짐 정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더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것과 정확히 반비례하듯 여행자의 식사는 소박하고 단촐해진다.


라다크의 중심도시 레로부터 서쪽으로 125km 떨어진 라마유루로 향하는 길, 일행은 점심식사를 위해 먼지가 폴폴 날리는 길가의 식당을 찾았다. 식당 앞 평상에 앉아 푸성귀를 다듬던 주인은 서둘러 식당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과 의자 위에 뽀얗게 앉아있던 먼지들을 수건으로 탈탈 털어내며 손님을 맞는다. 우리가 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인가보다. 별다른 메뉴랄 것도 없는 시골 음식점에서 일행은 라면과 비슷하게 생긴 국수 몇 그릇을 주문하고 호텔에서 챙겨온 도시락을 곁들여 가벼운 점심식사를 한다.


도시락에는 샌드위치 반쪽과 삶은 계란 한 개 외에도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화덕에 구운 인도식 빵 차파티와 카레 한 줌, 그리고 음료수와 비스킷 몇 조각이 차곡차곡 담겨있다. 지난 밤 묵은 호텔 식당의 주방장이 나름 신경을 써서 챙겨준 도시락이다. 점심식사 후에는 라마유루까지 약 1시간 이상을 차로 이동해야 하니 든든히 속을 채워야 한다.


구절양장 굽이길에 빈 속이 ‘울렁’

 

 

▲길가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라다키 할머니들이 일행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보낸다. 저 친절한 미소는 힘든 여정의 비타민이 되어준다.

 


라다크 지역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라마유루도 해발 354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라마유루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잘레비’라 불리는 고갯길, 산비탈을 따라 좌회전과 우회전을 수없이 반복하는 갈지자의 길을 거쳐야만 한다.


평소 차멀미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라 별스럽게 걱정이 되진 않지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음식, 그리고 파삭파삭 마른 빵과 샌드위치 등이 입안에서 빙빙 돌기만 한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마치고 라마유루를 향해 출발한다.


식당 입구 벽에 붙어있는 ‘어제는 역사, 내일은 신비, 오늘은 선물(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Today is a gift)’이라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에레나 여사의 글귀가 이곳 라다크 길가의 허름한 식당에서 우리를 배웅한다. 길가에 앉아 염주를 돌리며 담소를 나누던 라다키 할머니들도 출발하는 일행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보낸다. 왠지 오늘 하루는 선물 같은 날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라마유루로 들어가는 길, 문제의 잘레비 고갯길은 도로가 산비탈에 가로로 놓여있어 산 위로 올라가는 길인지 아니면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인지조차 헛갈릴 지경이다. 산비탈 아래에서부터 우측으로 한참 가던 차는 유턴이라도 하듯 ‘휙’ 돌아서 이번엔 좌측으로 한참을 간다. 그러다 다시 우측으로 휙! 점점 그 간격이 좁아지더니 고갯길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가파르고 잦은 회전이 이어진다. 라마유루의 별명이 ‘달나라’라고 하던데 이렇게 계속 올라가기만 하다가는 정말 달나라까지 갈 것 같다. 아니면 달나라 여행만큼이나 힘들어서 생긴 별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 참을 올라와 산정상에 다다를 때 즈음 차창 밖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곧이어 ‘라이더’들의 행렬이 줄을 짓는다. 유럽의 여행객들이 주로 선호하는 이 오토바이 여행은 델리에서 출발하는데, 여행사에 짐을 맡겨 라다크로 배송시키고 자신들은 오토바이를 이용해 델리부터 레까지, 그리고 레에서부터 라다크 곳곳을 저렇게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방식이다. 라다크의 무수한 산맥과 계곡, 수천미터의 고갯길을 오토바이 한 대에 의지해 여행을 한다니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올라온 잘레비 고갯길을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까마득하다. 길은 거대한 뱀 한 마리가 산비탈을 기어 올라온 자국처럼 굽이굽이 이어지고 계속되는 오르막에 지쳐버린 버스들이 길가 곳곳에 아무렇게나 세워진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 너머로 라다크의 바위산들이 첩첩이 둘러쳐져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낯설고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우리가 저 길을 올라왔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여기가 달나라다”라고 말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거친, 그래서 더 아름다운 풍경 앞에 잠시 할 말을 잊는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고갯길 너머 저 멀리 마침내 라마유루와 곰파가 눈에 들어왔다. 황량한 바위산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새하얀 사원이란! 구절양장 굽이 길에 뱃속마저 뒤죽박죽으로 꼬여버렸는지 점심에 먹은, 얼마 되지도 않는 빵조각들이 목구멍을 따라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찰나 저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며 멀미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천 길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는 벼랑 끄트머리에 서서 엄지발가락에 힘을 잔뜩 준 채 조심스레 계곡을 굽어본다. 그리고는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고운 상아빛 모래인가 싶지만 단단한 바위 같기도 한 라마유루 달의 계곡. 그것은 손으로 주무른 것도, 제 마음대로 구겨놓은 것도 아니다. 칼로 조각한 것도 아니고 기계로 깍은 것은 더욱 아니다. 물결치듯 자유자제로 굽어지고 주름진 바위산, 일정하게 반복되는 굴곡인가 하다가도 어느 순간 솟아오르고 다시 깊이 숨어버리는 골짜기들. 그 장엄 앞에 떠오르는 감탄사의 빈곤함과, 그것을 담아보겠다고 들이대는 사진 솜씨의 조잡함, 무엇보다도 저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감성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이곳 문랜드를 만든 주인공은 빙하로 추정된다. 거대한 빙하가 녹아내리며 호수가 되었고 그 호수가 바위산을 깎고 매만지고 다져서 마침내 지금과 같이 매끄럽고 단단한 침식바위의 계곡을 빚으며 지구상의 풍경이 아닌, 우주의 아름다움을 담아냈다.


물결치듯 주름진 바위산의 계곡

 

 

▲달의 계곡, 문랜드를 둘러싼 라마유루의 산. 그 허리춤에 라마유루곰파가 우뚝 서 있다.

 


여행자들은 그래서 이 경이로운 자연의 대작을 문랜드(Moon Land), 달나라라고 부른다. 물론 그런 별명을 붙여준 이들 가운데 진짜 달나라에 가본 이는 아마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별명에 토를 달지 않는다. 라마유루의 계곡을 보는 순간 이곳이 지구상의 한 지점이라는 생각 자체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보지도 못한 달나라가 이곳일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지구를 떠나 달 표면의 한 모퉁이에 불시착한 ‘우주 방랑객’처럼 모두들 각자의 상상 속 달나라 여행에 빠져 한동안 말이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에 전설 한 자락 없을 리 없다. 이곳 라마유루에도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며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시 이곳 라마유루 계곡은 맑은 물이 가득한 호수였고 이 호수에는 성스러운 뱀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라한이 이곳을 찾아 “이 호수가 마르고 그곳에 사원이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로부터 천년도 더 지난 11세기 티베트 밀교의 전수자인 나로파(Naropa)가 이곳 라마유루를 찾아와 여러 해 동안 동굴에서 수행한 뒤 깨달음을 얻고 산허리를 갈라지게 했다. 그러자 호수의 물이 빠지며 호수 바닥에서 죽은 사자가 발견되었다. 나로파는 사자가 발견된 자리에 ‘사자의 무덤’이라는 사원을 세웠는데 이 사원이 라마유루곰파에 세워진 최초의 사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전설의 주인공 라마유루곰파는 문랜드가 내려다 보이는 맞은편 계곡, 절벽 위에 서 있다.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사원으로 가기 위해 달의 계곡, 달나라를 떠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 보름달 한 조각이 땅에 떨어진 듯 신비로운 라마유루 문랜드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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