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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주 유배 길에 오른 추사

기자명 법보신문

“스님과 차 마시던 옛 인연 잇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초의 스님과 추사 선생의 신의와 우정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정겹다. 스님은 추사를 위해 유배지로 차를 보냈으며, 추사는 그 차를 마시며 “병든 위가 감동했다”는 말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진은 대정리 추사가 유배되어 살았던 집. 도서출판 동아시아 제공

 

 

1840년 김홍근 상소로 관직 삭탈 의금부 압송
혹독한 고문 겪은 뒤에 제주로 귀양살이 결정


▲초의 스님이 그린 제주화북진도.
추사가 제주도 유배 길에 오른 것은 1840년 9월2일의 일이다. 한양을 출발한 지 18일 만인 9월20일 대둔사에 도착, 저녁 무렵 일지암으로 초의 스님을 찾았다. 이들은 산차(山茶)를 앞에 두고 밤을 새워 시국을 논하고 달마의 관심법과 혈맥론을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 대둔사를 떠나 유배지로 향하는 추사를 위해 완도 이진포(梨津浦)까지 따라갔던 초의 스님은 9월23일 추사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제주화북진도(濟州華北津圖)’를 그린다. 화북진은 제주의 첫 관문이다. 완도의 이진나루를 떠난 추사는 필시 거친 풍랑과 싸우며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제주 땅을 밟았으리라.


모슬포에 위치한 작은 항구인 화북진은 지금도 옛 포구의 정취를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데 ‘제주화북진도(濟州華北津圖)’는 초의의 상상력에서 나온 그림이다. 실제 초의가 화북진을 통해 제주에 들어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바람이 많고 환경이 천박해 이곳 사람들조차 ‘못살포’ 또는 ‘못슬포’라 불렀던 척박한 땅. 이곳에서 추사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유배지에서의 유일한 낙은 차를 마시는 일과 독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특히 초의가 보내 준 차는 그에게 더없는 기쁨이었으며 위안이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절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차를 재촉하는 글이 많지만 추사의 편지에는 해학과 기지가 넘친다. 특히 초의가 그린 ‘제주화북진도(濟州華北津圖)’ 화제에는 이들의 우정이 잘 드러난다. 지기(知己)를 아끼는 초의의 마음이나 대둔사를 찾았던 추사의 초췌한 모습, 추사의 처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초의의 정회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 화제(畵題)는 제법 긴 글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추사와 초의의 교유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도광 20(1840)년 9월20일 해거름에 도착한 추사, 초의가 증언한 당시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도광 20년(1840) 9월20일 해거름에 추사공이 일지암의 내 처소에 들러 머무르셨다. 공은 9월 초2일 한성을 떠나 늦게 해남에 도착하셨는데, 앞서서 공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죄 없이 태장(笞杖)을 맞은 일이 있어서 몸에 참혹한 형을 입어 안색이 초췌하였다. 이런 가운데 ‘제주 화북진에 정배(定配)한다’는 명을 받아, 길을 나선 틈에 잠깐 일지암에 도착한 것이다. 평시에 공은 나와 더불어 신의(信義)가 중후하여 서로 사모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않았는데, 갑자기 지나는 길에 머무르게 되니, 불행 중에 다행한 일이다. 산차(山茶)를 마시며 밤이 새도록 세상 돌아가는 형세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과 혈맥론‘(血脈論)’을 담론함에 앞뒤로 모든 뜻을 통달하여 빠짐없이 금방금방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몸에 형벌의 상처를 입었으나 매번 지중한 임금의 은혜를 칭송하고 백성들에게 처한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인 양 중히 여기니 참으로 군자라고 할 만하다. 하늘은 어찌하여 군자를 보호하지 않고, 땅은 어찌하여 크나큰 선비의 뜻을 길러주지 않아, 이처럼 곤경에 떨어지게 하여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가. 탄식하고 또 탄식할만한 일이로다. 이튿날 공은 적소(謫所)로 떠나니 공의 원망스러운 귀양살이에 눈물 흘리며 비로소 ‘제주화북진도’ 한 폭을 그려 이로서 나의 충정을 표한다. 도광 29년 9월23일 초의 의순은 낙관하지 않고 예를 갖춰 그리노라.


(道光二十年九月二十日薄暮 秋史公投泊一枝庵貧道處 公九月初二日 離於漢城 晩到海南 先時公被逮囹圄 無罪笞杖 身被刑酷 顔色憔悴 然中受命濟州華北津謫所 仰仰延路 暫到一枝庵 平時 公與我信義重厚 不忘相思相愛之道 橫路留得 幸於幸耳 山茶一盃 終夜談論俗塵之勢 達磨大師觀心論及血脈論 前後通儀 無漏速對 然而身被刑傷 每稱君恩之重 處民之苦 自苦如重 眞可謂君子耳 天何以不保君子 地何以不育宏士之志 如此困橫脫機 可歎可歎耳 翌日公發謫所 乃泣公之怨行 始寫濟州華北津圖一幅 以表貧道之衷情矣 道光二十年九月二十三日 草衣意恂 不落款 合掌摹)


초의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추사는 이미 제주도로 정배가 결정되기 전 태장(笞杖)을 당했다는 것인데, 이는 1840년 7월10일 대사헌 김홍근의 상소에서 비롯된 것. 10년 전 추사의 부친 김노경과 윤상도의 옥사를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김홍근의 상소로 인해 추사와 김명희의 관직이 삭탈되었고, 망부(亡父) 김노경의 관직도 추탈되었다. 이 해 8월 20일 예산에 낙향해 있던 추사는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추사가 죄 없이 태장을 당했다는 초의의 증언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또 ‘추사가 몸에 참혹한 형을 입어 안색이 초췌했다’는 사실은 당시 추사가 혹독한 고문으로 빈사상태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추사가 겨우 목숨을 부지해 대정리로 위리 안치될 수 있었던 것은 우의정 조인영의 상소 덕분이었다.


유배 길에 오른 추사가 전주, 남원, 나주를 거쳐 해남 대둔사에 일지암을 찾았다. 평소 서로간의 신의가 중후하여 ‘서로 사모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않았던(不忘相思相愛之道)’ 이들의 충심(衷心)은 그래도 일지암에 머물게 됨을 다행으로 여기는 초의의 마음에서 잘 드러난다. 초췌한 추사를 대하는 초의 스님의 마음은 실로 ‘불행 중 다행’이었으리라. 아! 군자는 곤란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인가. 자임(自任)의 포용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산차를 앞에 놓고 나눈 이들의 담론은 세상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요, 군은(君恩)의 중후함을 칭송하였다. 하지만 ‘하늘은 어찌하여 군자를 보호하지 않고, 땅은 어찌하여 크나큰 선비의 뜻을 길러주지 않아, 이처럼 곤경에 떨어지게 하여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가(天何以不保君子 地何以不育宏士之志 如此困橫脫機)’라고 한 초의의 회한은 추사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배 길에 초의와 상봉 山茶 마시며 밤새 담소

완도까지 추사 배웅하며 ‘제주화북진도’ 그려 선물

▲ 제주도 첫 관문인 모슬포 화북진 정경. 추사는 이 포구를 거쳐 유배지로 향했다..

 

 

한편 추사는 완도까지 따라 온 초의의 배웅을 받으며 제주로 향했는데 그가 실제 배를 탄 것은 9월27일이었다. 따라서 초의가 이 ‘제주화북진도’를 그린 곳은 완도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완도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초의는 이 그림을 그려 추사에게 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초의가 화제(畵題) 말미에 ‘낙관을 하지 않고 합장하고 그렸다’고 한 것은 이 추론을 방증할 만하다. 한편 ‘소치실록’에는 스승의 적거지를 찾았던 소치 허련의 증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축(1841)년 2월에 나는 대둔사를 경유하여 제주도로 들어갔습니다. 제주의 서쪽 100리 거리에 대정이 있었습니다. 나는 추사선생이 위리 안치된 곳으로 찾아가 유배생활하시는 선생께 절을 올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메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허련이 제주도로 추사를 찾은 것은 1841년 2월이다. 그가 대둔사를 경유했다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일지암으로 초의 스님을 찾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초의 스님은 소치 편에 추사에게 보낼 편지와 차를 챙겼으리라. 하지만 소치의 제주 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중부(仲父: 둘째아버지)가 별세했다는 부음을 받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 왔다. 이 후 소치는 세 차례나 제주도를 찾아 스승을 모셨는데 초의와 추사의 편지와 차를 전한 이는 소치였다.


▲ 박동춘 소장
한편 초의 스님 또한 추사의 적거지 제주를 찾았는데 그 시기는 1843년 봄 무렵이라 여겨진다. 초의는 제주에서 반년동안 머물다 대둔사로 돌아왔다. 1843년 8월29일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다전(茶甎)은 모두 훌륭하지만 스님과 함께 죽로의 옛 인연을 다시 잇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포장을 꺼내니 병든 위가 감동하고 또 감동했습니다(茶甎儘佳 恨不得與師重續竹爐舊緣也 泡醬頓發 病胃且感且感)”라 한 대목이 보인다. 이 편지는 초의가 제주에서 대둔사로 돌아온 후 추사에게 차와 장류를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병든 위가 감동했다는 대목에서 초의가 보낸 차가 추사에게 있어 얼마나 감동적인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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