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천태산 국청사

기자명 법보신문

천태지의 대사의 한 풀고 꿈을 이루다

 

▲ 천태지의 대사가 수나라 양제에게 유서를 남겨 불사를 마무리한 이래 1400여년 동안 천태종 발상지로 이름을 떨쳐온 국청사. 7만㎡에 달하는 면적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공간이 없어 가람은 다소 답답한 느낌을 준다.

 


‘불견사성(不見寺成) 명목위한(瞑目爲恨)’
천태지의 대사는 병약해진 몸으로 단 하루를 버티기조차 어려웠으나 차마 그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천태교학이 후대에까지 널리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선사(修禪寺) 복원을 발원하며 진행해온 불사가 건축 자금 부족으로 뜻을 채 이루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사는 고심 끝에 입적 후에라도 뜻한 바를 이루고자 붓을 들어 수양제에게 “절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니 한을 품고 눈을 감는다(不見寺成 瞑目爲恨)”는 유서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중국 절강성 천태현 국청사(國淸寺). 산동성 영암사, 남경 서하사, 호북성 옥천사와 더불어 중국 4대 명사(明寺)로 손꼽히는 국청사는 중국 천태종의 발원지다. 천태종 종문을 연 지의 대사가 진나라 선제 시대인 575년에 세간에서의 드높았던 명성을 뒤로하고 천태산으로 입산하자, 선제는 지의 대사를 위해 천태산에 사원을 짓고 수선사로 이름 지을 것을 명했다. 그리고 지금의 천태현인 당시 풍현의 농지세 일부를 떼어내 수선사 건축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조치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대사의 수행을 돕기까지 했다.


지의 대사는 그렇게 지어진 수선사에서 동구불출 10여년 동안 수행에만 전념했다. 이미 천태산 입산 전에 혜사 선사 문하에서 법화삼매를 증득하고 활연히 초선다라니를 얻어 스승의 인가를 받았을 뿐아니라, ‘대지도론’과 ‘차제선문’, ‘법화현의’를 강설하는 등 교학에서 일가를 이룬 상태였으나, 오늘날 천태종의 사상과 이론은 바로 이 10년의 수선사 정진기간에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1400년 고찰 풍모 곳곳에 남아

 

 

▲ 수나라때 조성한 높이 59.3m의 6각 9층 탑.

 


하지만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선 수나라와 지키려는 진나라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워진 세상은 지의 대사가 입산수도에 전념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진나라 5대 왕 후주가 흔들리는 민심을 수습하고자 지의 대사에게 하산해서 법을 설해 줄 것을 간청하고 나선 것이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왕의 청을 물리치던 대사 역시 더 이상 간청을 내치지 못하고 결국 하산하여 금릉에 법석을 폈다. 이후 금릉을 떠나 여산, 남악, 형주, 양주 등지를 행각하다가 진나라가 멸망하고 수나라 제1대 왕 문제 개황 15년(595)에 이르러 다시 천태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산문을 나선지 1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수선사는 옛 모습을 잃은 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황폐화 돼 있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수선사 복원을 결심하고, 옛 자리에서 아래쪽으로 터를 옮겨 사찰 복원을 시작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입적 전까지 예전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이에 대사는 수양제에게 유서를 남기게 됐고, 대사 입적 후 수나라 2대왕 양제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복원불사가 마무리 됐다. 그리고 양제가 직접 국청사라는 편액을 써서 하사함에 따라 국청사로 새롭게 산문을 열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대사는 이때 수양제에게 유서를 보내는 한편 자신을 찾아 천태산으로 입산한 제자들에게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읽게 하고, “바라제목차(계율)는 너희가 받들어야 할 것이요, 4종삼매는 너희를 분명히 이끌 바니라”라는 유훈을 남겼다. 오늘날까지 천태종의 발원지로 숭앙받는 근거이기도 하다.


국청사로 들어서는 다리 ‘풍간교’를 사이에 두고 경전 말씀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뜻의 ‘교관총지(敎觀摠持)’와 수나라 때 지어진 사찰이라는 의미가 깃든 ‘수대고찰(隋代古刹)’이란 조벽 글씨가 먼저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사찰이라고 해서 그 시절 지은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듯, 이곳 역시 수나라 때 지은 사찰이라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청나라 때 새로 지은 것들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천태산의 이름이 산의 생김새가 천제가 있는 높은 자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데서 유래하듯, 경관이 수려한 곳이라 왕희지나 이백 등 수많은 문인들이 다녀가면서 남긴 흔적이라 할 만한 옛 글씨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전체 사찰 면적이 7만㎡에 달함에도 전체적 가람배치는 다소 답답한 느낌을 준다. 지리적 여건이 여의치 않은 탓이었는지 탁 트인 공간 없이 아래로부터 위로 계단식 배열을 해 놓은 데다, 전각과 요사채로 가득 채워져 빈 공간이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절은 풍간, 한산, 습득으로 이어지는 ‘국청삼은’과 매화나무에 얽힌 옛 이야기가 더해져 보는 재미를 더하게 한다.


‘국청삼은(國淸三隱)’은 당나라 때 이 절에 머물던 풍간선사라는 도인을 비롯해 한산과 습득 등 세 사람을 이르는 말로, 국청사에 숨어 산 세 성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 만큼 국청사에 전해지는 세 사람 이야기도 적지 않다.


어느 날 국청사에서 계를 설함에 수백 명의 대중이 법당에 앉아 법문을 듣고 있음에도 한산과 습득은 마구 떠들며 법당 앞을 지나다녔다. 결국 참지 못한 한 스님이 이들을 가로막자 한산이 “법당에 들어갈 종자가 따로 있는가?”라고 물었고, 습득은 “설법을 들을 종자인들 따로 있을라구”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이에 그 스님이 “이 미친놈들아, 계를 설하는데 조용하지 못하느냐”고 나무라자, 둘이 박장대소 끝에 한산이 “마음이 청정하면 계가 온전하고 마음이 어두우면 곧 파계로세”라고 일갈했고, 습득은 “가세, 가세, 성내지 않는 것이 곧 지계인줄 모르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남기고는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며 사라졌다.


중국 산신신앙 발원지 전설도

 

 

▲ 대웅보전에 봉안된 석가모니불은 원나라때 조성한 불상이다.

 


한산과 습득은 물론 풍간 역시도 범상치 않은 인물로, 훗날 이곳에서는 이 세 사람을 일러 풍간은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으로 불렀다. 물론 이들의 생몰 연대나 행적이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아 실존인물이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국청사로 들어서는 다리 풍간교는 바로 이 아미타불의 후신으로 불린 풍간선사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국청사에는 또 수나라 때 절강 관정 대사가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매화나무가 한 그루가 있다. 14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무이기에 중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매화나무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기에도 교활한 양반집 아들에게 팔려갈 위기에 처한 미모의 매녀(梅女)가 이 절에 숨어 3년 동안 ‘법화경’ 내용 6만9777개의 글자를 흰색 단자에 수놓은 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면서 전해준 매화 씨가 자라나 향기 그윽한 나무가 됐다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매년 음력 정월 때면 매화나무에 꽃이 피고 은은한 향기가 요동해 많은 사람들이 그 명성을 듣고 먼 곳에서부터 찾아와 감상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중국의 산신신앙 역시 수나라 때 천태산 국청사에 절의 수호신으로 산왕각(山王閣)을 세우고 산신을 봉안한 이래로 이어져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등 1400여년 역사를 이어온 사찰의 나이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 바로 국청사다.


이 절에서 그나마 가장 넓은 공간에 자리잡은 대웅보전 안에는 청동으로 조성한 석가모니부처님상과 양측에 18나한 목조상이 봉안돼 있다. 이 불상은 원나라 시대에 조성한 유물이다. 그리고 그 뒤로 계단을 오르면 천태지의 대사를 기리는 비(碑)가 있고, 몇몇 전각과 함께 특별한 전각 한 동이 자리잡고 있다.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이다. 1995년 한국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불교협회 조박초 회장이 천태종의 모습을 본 후 양국 천태종 교류의 물꼬를 텄고, 그 상징으로 이곳 천태산 국청사에 천태종문을 연 천태지의 대사를 비롯해 우리나라에 천태종을 처음 개창한 고려 대각국사 의천, 오늘날 한국 천태종을 중창한 상월 스님의 상을 조성해 봉안한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을 건립한 것이다. 따라서 절강성 성지순례길에 함께 나선 한국 천태종 불자들에게는 그 어떤 곳보다 의미가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마침 국청사를 찾은 5월15일과 16일은 양국 천태종이 교류 16년을 맞아 조사상 개금을 마치고 천태종 발상지에 다시금 3조사가 밝은 빛으로 나투게 하는 날이기도 했다.
조사기념당을 등지고 사찰 입구 쪽을 내려다보면 멀리 ‘수탑’이 보인다. 수나라 때 지은 보탑으로 높이 59.3m에 6각 9층이고, 벽돌로 된 담에는 불상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돼 있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 수탑 역시 남송초기 1128년 경 중건됐고, 그마저도 상륜부분과 목첨부분이 없어진 것을 20세기 후반에 복구한 것이어서 수나라 때 탑으로 보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천태지의 대사가 수선사 복원을 발원한 이래 수양제의 도움으로 600년 경 세워진 후 1400년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온 국청사 역시 문화혁명때 손실을 입은 이후 1990년대 중국불교 재건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불학원을 설립했고, 천태지의 대사의 교학을 배우는 학인들이 늘어나면서 다시금 천태종 발원지로서의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오늘날 국청사의 모습은 곧 천태지의 대사의 한을 풀고 꿈이 이루어지도록 한 셈이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