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냐라마 지도법사 붓다빠라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내 몸 통제가 수행의 시작

 

▲ 붓다빠라 스님

 

 

불교가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요. 보리밥집, 국수집처럼 불교 또한 이미지가 선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소비하고 사용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소비하고 사용하고 누린다는 것은 이것을 통해서 만족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화를 냅니다. 그런데 그 화의 생산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입니다. 또 소비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입니다. 화, 욕망 등은 생산자도 소비자도 나입니다. 그렇다면 2차 소비자는 누구입니까. 화가 나면 옆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비록 1차 소비자는 나이지만, 그로인한 2차, 3차 소비자가 계속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화에 대한 통제 수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화가 마음속에서 늘어난다면 화를 스스로 잘 소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절하게 소비하는 방법을 갖고 있지 않으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그로인해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라고 하는 존재 자체를 다루면 답이 없습니다. 존재를 대하는 태도, 그것이 문제의 해결 방법입니다. 불교에서의 수행은 화를 없애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화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프로그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자유자재입니다. 해탈입니다. 해탈, 해방, 자유, 자유로워지는 것만큼 우리의 행복지수도 올라갑니다. 인도 말로 행복이 곧 열반입니다. 물론 화 자체를 제거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를 제거하지 않아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담배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담배로부터 구속될 것이냐 자유로워질 것이냐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는 계속 납니다. 부처님께서는 화가 나는 것을 시비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당신의 삶은 자유와 행복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불교가 다루는 영역은 이렇게 존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에 별 게 있겠습니까. 물론 깨달음의 수준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꼭 순도 100% 의 깨달음만을 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상황에서 깨침이 있으면 그것도 깨달음입니다. 동네 축구 시합의 경우 공 차다가 힘들면 쉬어도 됩니다. 그러나 박지성 선수가 축구시합 도중에 쉬어 버리면 안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즐기면서 쉬어가면서 수행을 해도 괜찮습니다. 반드시 도를 깨쳐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수행은 목적이 아닙니다. 수단일 뿐입니다. 수단에 매몰되어서 힘들어하면 안 됩니다.

 

화를 잘 소비해야 자유로워져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마음의 작용을 존재로 보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행복은 참 다양합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행복도 있지만 내용적인 측면으로 들어가면 동일한 행복은 없습니다. 이를테면 50평 규모의 대형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사람이구나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동일한 50평에 살지만 사람들의 행복의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행복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행복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알기 위해서는 마음이라는 놈의 특성을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만약 물 전문가가 있다고 합시다. 이 전문가는 물의 분자 구조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전문가라고 하면 최소한 분자 구조 정도는 이해해야 됩니다. 마음에 대해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수행자, 철학자 등 다양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물 분자 구조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동일한데 마음에 대해서는 각양각색입니다.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특히 뇌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과학자들은 마음을 뇌의 차원으로 제한해 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인터넷 이야기를 하면서 자꾸 전기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기가 있어야 인터넷이 가능하듯이 뇌에서 마음이 나온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인터넷과 전기가 다르듯이 뇌는 뇌의 특성이 있고 마음은 마음의 특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뇌와 결부된 마음을 마음 차원으로 옮겨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학과 종교의 영역에서 의학이 떨어져 나올 때 얼마나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쳤습니까. 하나의 영역에서 하나가 떨어져 나올 때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불교에서 다루는 것은 뇌가 아니라 바로 마음입니다.


일단 마음은 몸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몸이 생기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몸으로부터 비롯된 마음이 몸의 상당 부분을 지배해 버립니다. 이것이 마음이 갖는 특성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놈은 또 마음으로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방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마음이 비롯된 그 몸이라는 놈부터 통제를 합니다. 마음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몸이니 몸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사띠 수행은 염(念)으로 번역합니다. 팔정도 가운데 정념(正念)입니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수행을 항상 ‘사띠’라고 소개했습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비출 조(照), 이것을 고대 인도어로 번역하면 사띠, 위빠사나로 번역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See, Watch, Understand로 번역 됩니다. ‘사띠’ 또한 몸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을 떠나서 마음을 다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좌선, 행선, 생활선, 그것이 몸을 갖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됩니다. 그런데 다른 존재와 어떤 식으로 결합을 하든 항상 마음이 모든 결정을 해버립니다.


마음이 좀 푸근할 때는 옆에서 난리를 쳐도 봐줍니다. 마음이 불편할 때는 지나가는 개만 봐도 짜증이 납니다. 아침에 예불을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할 때는 날씨가 싸늘해도 기분이 좋은데 마음이 심란하면 왜 이렇게 춥냐며 불평을 합니다. 관계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가 하면 마음에 따라서 관계도 달라집니다.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수용하거나 맺어나갈 때 마음이 건강할 때와 안정될 때, 건강하지 않을 때와 안정되지 못할 때를 비교하면 관계의 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의 에너지를 보충을 해야 건강하고 안정될 수 있습니다. 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갑니다.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갑니다. 정신 에너지가 소모되면 수행을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하면 정신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미지가 입력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사이버 공간입니다. 인터넷이 나오기 전에는 이것을 설명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까. 아니지요. 저에 대한 이미지가 여러분의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수없는 데이터가 들어오는데, 문제는 대상이 직접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들어온다는 점입니다.


정신에너지 보충이 수행


화가 나서 그 원인을 살펴보면 미운 사람의 이미지가 들어와 있습니다. 이미지는 그냥 이미지일 뿐입니다. 분노 따위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이 이미지에 기억과 경험 등을 덧칠해서 감정을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기억의 구조입니다. 경전에서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이야기합니다. 탐진치 삼독의 구조는 어떻습니까. 마음속으로 들어온 객관적인 이미지에 마음이 풀어놓는 욕망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기억의 질량은 이 삼독의 양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마음이 대상에게 끌려가면 에너지가 급속히 소모됩니다. 대신 마음이 대상을 선택하고 머무르면 에너지 소모량을 최소화 시키면서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마음은 대상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데 그 이미지에 노폐물이 묻습니다. 그 노폐물은 조금만 신경을 쓰면 이미지에 묻어 들어오지 않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또 마음이 대상에 끌려가면 자기 에너지를 급속하게 소모해서 피곤해 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대상을 선택하고 머무르면 자기 에너지 소모량을 최소화시키면서 행복한 생활이 가능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건강해지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수행을 하고 그 수행을 철저히 삶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5월27일 부산불교교육원 여래사에서 반냐라마 지도법사 붓다빠라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붓다빠라 스님 은
영축총림 통도사의 포교국장을 지냈다. 미얀마의 수행센터에서 수행한 뒤 계를 받고 김해 위빠사나 수행센터인 반냐라마를 비롯해 대구, 서울 등의 사찰에서 ‘사띠’ 수행을 대중화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인도 보드가야에 위빠사나 선원을 건립하기 위한 불사를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