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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마을 회주 용타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녹슨 쇠의 본질은 쇠 내가 활불임을 믿어라

 

▲ 용타 스님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생각해 봅시다. 불교란 무엇일까요.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오계(五戒)를 받아 열심히 삼학(三學)을 닦아서 성불(成佛)한 다음 중생을 제도하는 것. 간단히 정리하면 불교의 대의는 이렇습니다.


이곳 증심사의 본찰인 송광사는 보조 국사의 정신을 이어오는 곳입니다. 우리는 보조 스님이 한국에서 태어나신 것만으로도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보조 스님은 ‘수심결(修心訣)’ 하나만 가지고도 넉넉히 밥값은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은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안거를 떠나시면서 도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에 얼씬거리는 번뇌가 하나 있는데 이 번뇌가 얼씬거릴 때마다 집안에 꼭 도둑이 든 것 같다. 이번 철에 이 도둑을 꼭 해결하고 오겠다.”
여기서 보조 스님이 말씀하신 도둑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당시 이미 명예와 재물에 대한 욕망을 다 내려놓으신 상태였기 때문에 성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찌됐든 보조 스님은 욕망을 집안의 원수처럼 여기셨습니다. 또 수심결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째서 거기 머물러 그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긴 고통의 윤회를 면하려면 부처를 찾아야 한다. 부처는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데서 찾으랴.”
여기 계신 분들은 너무 자주 들은 소리라 별 감흥이 없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고통을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아야합니다. 그 부처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의 그 마음이 부처입니다.


여러분은 ‘부처님’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여러분이 보조 스님의 제자라면 자신부터 떠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 아내, 아들딸,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떠올라야 합니다. 늘 만나는 사람들이 떠올라야 합니다. 달마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즉심즉불(卽心卽佛). 이 마음이 부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조 스님은 여즉시불(汝卽是佛)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당신이 부처라는 뜻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그 마음이 곧 부처


보조 스님은 ‘수심결’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을 모르고 있다. 법을 멀리 성인들에게서만 구하려하고 부처 찾기를 원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구나. 만약 자기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밖에 부처가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비록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태우고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고 피를 뽑아 경전을 쓰고 밤낮으로 눕지 않고 하루 한 끼 만 먹고 팔만대장경을 종으로 외고 횡으로 외워서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보조 스님은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스스로가 부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살아있는 부처입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귀종(歸宗) 스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귀종 스님이 대답합니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지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 “지극한 말씀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귀종 스님이 다시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하겠다. 바로 너다.”


불교의 역사는 대단히 복잡합니다. 부처님 당시의 근본불교 시대가 있고 또 대승불교 시대가 있습니다. 대승불교 말미에 선불교가 출현합니다. 중국 선불교의 초조인 달마 스님 이전에는 ‘스스로가 부처’라는 말을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고 “내가 부처고 네가 부처다. 그 마음이 그대로 부처다”라는 것을 살짝 밖으로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은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중국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9년 면벽을 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혜가 스님을 만나 법을 펼치게 되는데 그 법은 ‘이것이 부처’라는 겁니다. 선불교의 종지입니다. 이것이 부처임이 확연하게 수긍이 되면 그것이 바로 선불교의 도통(道通)입니다. 깨달음입니다.


여러분, 여기 쇠몽둥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 쇠몽둥이에 녹이 슬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녹입니까, 쇠입니까. 쇱니다. 먼지가 낀 금비녀가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먼지입니까, 금입니까. 금입니다. 녹이나 먼지에 집중하는 사람은 녹과 먼지를 닦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선불교가 나오기 이전의 불교는 녹슨 쇠에서 녹을 제거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녹을 얼마나 제거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쇠 입장에서 보면 억울합니다. 녹이 조금 묻었을 뿐인데 녹 취급을 당합니다. 녹이 제거 됐을 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쇠입니다. 그러니까 본질은 쇠라는 거지요. 달마 스님은 여기에 착안을 둔 겁니다. 본래 쇠이기 때문에 녹을 제거하지 않아도 쇠는 쇠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달마 스님의 깨달음입니다. 녹은 차차 제거해갈지언정 우선 쇠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녹도 제거하고 쇠도 찾는 겁니다. 확연한 마음으로 쇠임을 받아들이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녹을 닦아 가면 됩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녹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녹이 안 좋은 것이라는 선입관은 큰 함정입니다. 녹이 불편한 것은 나의 감정이 덧칠되었기 때문입니다. 녹은 우주의 신성한 요소입니다. 녹을 제거하는 것도 내가 불편하니 다른 곳으로 가달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탐진치(貪瞋癡)도 신성한 법계의 에너지이지만 내게 붙어 있으면 내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좀 떨어져 달라는 겁니다. 그것이 불교, 특히 선불교의 사상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하실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일단 ‘나는 부처’라고 선언하세요. 삼학이 덜 닦였다 해서 본질이 부처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나는 활불(活佛)입니다. 또 일상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앞으로 ‘나’를 ‘일물(一物)’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나’라는 단어는 이기적인 주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이 ‘일물’로 표현한 것입니다.


활불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돈오(頓悟)요, 녹을 벗겨내는 것이 점수(漸修)입니다. 그래서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여러분들이 돈오에 접근하는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처임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접근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여러분의 삶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의 가족이 부처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다른 사람을 부처로 보고 존중하게 된다는 것,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행복하다” 선언이 업장소멸의 길


또 한 가지는 깨달음입니다. 부처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 펼쳐진 손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은 손입니다. 그 손을 치워버리면 허공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음을 집중해서 이를 관조하면 여러분의 마음은 곧 허공이 됩니다. 그러면 이 허공마저 치우면 어떻게 될까요. 허공을 치워보세요. 그때 무슨 느낌이 왔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자성입니다. 손을 치우고 허공을 치워도 부정할 수 없이 현존하는 그것, 바로 여러분이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처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손을 치우고 허공을 치우는 체험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녹을 닦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구나, ‘겠지’, ‘감사’ 이 세 가지만 잘 간직하면 녹은 절로 닦입니다. 누가 나에게 ‘이놈아’ 하면 화내지 말고 누가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는구나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가 찾아오면 절로 감사한 마음이 일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행복한 깨달음을 얻은 활불이 되기 위한 삼박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활불인 이 일물이 행복하다고 선언합시다. 외침이 우렁찰수록 업장번뇌의 소멸 효과가 큽니다. 그리고 웃어야 합니다. 행복한 활불이니 웃을 수밖에요. 15초 이상 큰 소리로 웃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나와 너라는 구분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생활에서 이것을 실천한다면 큰 변화가 반드시 찾아 올 것입니다. 


정리=광주·전남지사 조영훈 지사장


이 법문은 6월 16일 무등산 증심사 취백루에서 열린 ‘무등에서 길을 묻다’ 초청법회 네 번째 법석 행복마을 이사장 용타 스님의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용타 스님

1964년 청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4년부터 1983년까지 제방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했으며 1980년 동사섭 수련프로그램을 개발해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혜명을 전하고 있다. 현재 행복마을 회주로 저서로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해탈 10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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