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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천년 벽화 간직한 알치곰파

기자명 법보신문

히말라야 오지가 숨겨놓은 라다크 불교미술의 최고봉

 

▲ 숨첵법당에 조성돼 있는 관세음보살입상. 화려한 장엄도 눈길을 끌지만 법의 위에 선명한 그림은 천년 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라다크의 도로사정은 산세만큼이나 험하다. 알치곰파로 향하는 길, 가파른 산 비탈길을 제법 달리는가 싶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이지? 창밖이 온통 뿌연 흙먼지다.


“잠깐 기다려야 되겠는데요.”

 

 

▲ 낙석으로 붕괴된 도로 앞에서 차가 멈췄다. 저 앞의 불도저가 길을 열어 줄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가이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우리를 안심시킨다. 창문을 빠끔히 열고 밖을 내다보니 저 앞에서 불도저 한 대가 도로 위에 잔뜩 쌓인 흙과 바위를 치우고 있다. 산비탈에서 쏟아진 낙석이 도로를 뒤덮어 버린 상태다. 가뜩이나 메마른 흙길인데 불도저가 이리 저리 오가며 바위를 굴려대니 온통 흙먼지가 일어 수십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불도저가 바위와 흙을 밀어 한쪽으로 쌓아놓으면 10여 명의 인부들이 돌을 작게 부수어 트럭에 실어 올린다. 그렇게 해서 이 많은 돌을 치우고 있다.


가이드가 불도저 기사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니 기사가 손을 흔들어 화답을 한다. ‘알겠다, 걱정 말라’는 뜻 같다. 아니나 다를까. 10여분 남짓 기다리니 불도저가 이리저리 오가며 돌을 치워서 차 한대 지나갈 만큼의 길을 만들어 준다. 그 사이를 뚫고 일행을 태운 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이런 것이 라다크 여행의 재미다. 비현실적 풍경이 수시로 눈앞에 펼쳐지고, 사람이 살 수 없을 듯한 극한의 환경에서도 행복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곳.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은 곳이 라다크다. 지금 찾아가는 알치곰파가의 보물 역시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불가능해 보이지만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에 더욱 신비롭다.

 

 

▲ 바위를 실어나르기 위해 모여있는 인부들. 돌 하나하나를 손으로 들어 올려 차에 싣고 있다. .

 


길 없는 길이 10분만에 뚝딱


알치곰파는 레에서 스리나가르 쪽으로 70km 떨어진 고산지대의 오지 마을 알치에 위치하고 있다. 라마유르곰파와 마찬가지로 린첸 잔포(Rinchen Zanpo) 스님이 10세기 말 건립했다.


린첸 잔포 스님은 티베트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티베트에서 태어난 스님은 13세에 불교에 귀의, 인도와 카슈미르로 유학해 산스크리트어와 인도의 방언들을 비롯해 당시의 다양한 학문과 수행법을 전수 받았다. 17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티베트로 돌아온 스님은 왕의 후원 하에 수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그래서 린체 잔포 스님은 ‘라마 로짜’ 우리말로 하자면 ‘위대한 역경승’이라는 수식어로 즐겨 불린다.


린첸 잔포 스님은 역경 뿐 아니라 불사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라다크를 포함, 서티베트 지역에 총 108개의 사원을 건립했다. 그 중 사료에 기록이 남아있는 사원만도 21곳에 이른다. 특히 린첸 잔포 스님은 사원과 불상 조성을 위해 직접 카슈미르로 가 32명의 예술가들을 동행해 왔다. 우리의 목적지인 알치곰파 역시 이들 카슈미르 예술가들에 의해 조성된 사원이다. 그래서 사원의 양식은 물론이며 불상과 내부의 벽화에 인도, 카슈미르풍이 오롯이 남아있다.

 

 

▲ 알치곰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숨첵법당. 인도와 카슈미르의 건축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알치곰파는 라다크의 다른 곰파들과 달리 평지에 위치해 있다. 라다크에서도 오지에 해당하는 잔스카르 지역의 길목에 위치한 알치마을은 워낙 외진 곳인데다 곰파도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덕분에 이슬람교도들이 침입해 왔을 때에도 곰파가 눈에 띄지 않아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의 화마조차 피해갔을 만큼 오지인 탓에 쉬지 않고 내달렸지만 결국 해거름이 돼서야 알치곰파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서 바라본 알치엔 사람이 사는 집보다 초르덴이 더 많아 보인다. 마을 가장자리, 인더스강변에 맞닿아있는 알치곰파는 언뜻 보아서는 여느 가정집 같아 보이지만 제법 고목의 태가 나는 나무들이 곰파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들꽃이 제 마음대로 피어있는 마당을 지나니 아름다운 법당 숨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알치곰파의 여섯 개 전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히는 숨첵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처럼 섬세하게 조각된 목조기둥의 3층 건물이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원답게 건물의 부재들은 기나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지만 구석구석 남아있는 기둥의 장식 문양들은 라다크의 그것과 매우 다를 뿐 아니라 세련미까지 갖추고 있다.
 화려한 건물 기둥에 비해 소박한 법당 출입문은 매우 작아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저절로 허리가 숙여진다. 법당 중앙에는 알치곰파를 창건한 린첸 잔포 스님을 기리는 초르덴이 세워져 있고 초르덴의 좌우 벽면에 높이 4m의 관세음보살입상과 문수보살입상, 그리고 뒤쪽에 가장 큰 5.18m의 미륵불입상이 각각 네 개의 팔을 들어 참배객을 맞이한다. 진흙을 빚어 조성한 각각의 입상들은 화려한 채색과 각종 꽃, 영락, 보관으로 장엄돼 있다. 특히 법의를 장식하고 있는 섬세한 그림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카슈미르 복장을 한 왕과 신하들의 나들이, 악사의 연주와 무희들의 춤을 감상하는 왕과 왕비의 화려한 궁전 생활, 불을 피우고 각종 공양물을 바치는 종교의식, 그리고 천상을 날아다니며 꽃을 뿌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천녀 등 당시의 문화와 생활, 그리고 그들이 생각했던 이상향의 모습들이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선명한 색체로 살아 움직이는 듯 남아 있다. 벽면에는 천불도와 불보살상, 각종 신장상 등의 그림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수백, 수천의 불보살상이다.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천년 전의 것이라 생각하니 숨첵이라는 법당 자체가 마치 하나의 공간 안에 천년의 세월을 응축해 놓은 거대한 타임캡슐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안에 모여 있는 수 많은 등장 인물들과 눈을 맞출 때 마다 그들이 들려주는 지난 천년의 이야기가 들릴 듯 해 자꾸 벽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알치곰파의 벽화는 인도를 소개하는 사진집 등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할 만큼 세련되고 정교하다. 아잔타석굴의 벽화와도 종종 비교되는 알치의 벽화들은 카슈미르와 간다라미술이 만나 서로의 장점을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 알치의 모든 법당 내부에서는 일체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대신 제법 잘 만들어진 도록과 엽서 등을 판매하고 있다. 사진을 찍는 대신 책과 엽서 등을 한 가득 구입한다. 마지막 참배객인 우리가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스님이 곰파 안내를 해주겠다며 앞장선다.

 

 

▲ 라다키 순례객들이 문 닫힌 법당 밖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라다크의 사원 대부분은 저녁 6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알치곰파도 이미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숨첵과 알치곰파의 대웅전인 튜캉을 참배하고 나오니 이미 해 그림자가 두텁게 드리워졌다. 그 사이 곰파에 도착한 라다키 순례단들로 곰파 마당이 북적인다. 저들도 험한 길을 지나오느라 예정보다 도착 시간이 늦어졌나보다. 문이 닫힌 법당을 보고 난감할 듯도 싶은데 다들 주저없이 신발을 벗더니 돌바닥에서 법당을 향해 삼배를 시작한다. 이마를 땅에 대는 오체투지의 예로 닫힌 문 안쪽에 계신 부처님을 뵙는 것이다. 라다키들은 그 순간 저 법당의 문 없는 문을 지나 부처님을 친견한다. 저 마음이 어딘들 가지 못하랴.


이들의 정성에 감동한 덕분인지, 아니면 먼 곳에서 찾아온 일행을 위한 특별 배려인지, 뒤따라오던 스님이 열쇠를 가져와 잠겨있던 법당 문을 열어준다. 순식간에 얼굴이 환해진 순례객들이 스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며  앞 다퉈 법당 안으로 밀려들어간다.


이 법당은 만주스리라캉, 우리의 문수보살전에 해당한다. 법당 가운데 사각의 기둥이 있고 각 기둥의 면에 네 방향을 상징하는 노란색, 하얀색, 빨간색, 파란색의 문수보살상이 조성돼 있다. 참배객들은 문수보살상이 조성돼 있는 가운데 기둥을 따라 오른쪽으로 법당을 돌며 보시를 하고 기도를 올린다. 불과 5분 남짓, 짧은 참배를 마치고 법당을 나서는 순례객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별같이 많은 불보살이 한자리에


알치곰파의 여섯 개 법당 중 개방되는 곳은 대웅전인 듀캉과 숨첵, 만주스리라캉, 그리고 로트사바라캉의 네 곳 뿐이다. 로트사바라캉을 제외한 세 곳의 법당을 모두 참배했으니 만주스리라캉 참배에 만족해야 하는 라다키순례객들에 비하면 우리 일행은 운이 좋은 편이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도록을 보여 달라기에 숨첵에 모셔져있는 비로자나부처님 사진을 펼쳐 보였다. 사진을 본 아주머니는 합장하더니 사진에 이마를 대고 예를 갖춘다. 갑작스런 아주머니의 행동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사진을 보여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고나니 어안이 벙벙하다. 법당 안에 들어가 불보살상을 친견한 우리 일행과 법당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한장 사진 속 부처님에게 예를 다한 저 아주머니 가운데 진짜 부처님을 만난 이는 누구일까.


어둠이 내린 곰파 구석에서 불 밝힌 기름등이 가녀린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사원 안엔 변변한 조명시설 하나 없고 인근엔 숙소나 식당도 그리 마땅치 않다. 무엇하나 편리한 것이라고는 없어 보이지만 알치곰파의 아름다움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알치곰파를 찾아오고 있다. 지금까지 알치곰파를 지켜준 것은 라다크의 거친 땅과 쉽게 건널 수 없는 인더스강의 험한 물줄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훨씬 자유로워진 지금 알치곰파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와 노력, 그리고 라다키들의 저 굳센 신심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박하다 못해 허물어지고 낡은 이 곰파 안에 이처럼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보물들이 숨겨져 있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어둠에 잠긴 곰파를 나서며 다시 한 번 돌아본다.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은 불보살님들이 오늘 밤에도 알치의 소박한 법당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법담을 나눈다. 향긋한 꽃향이 밤바람을 타고 스쳐지나간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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