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보타산 보제선사·법우선사

기자명 법보신문

산·바다 어우러져 절경 빚은 관음의 고향

 

▲ 오대산, 아미산,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 불교 4대 성지로 불리는 보타산에서 가장 큰 절 보제선사 앞엔 관음보살이 방생하던 호수 해인지가 있다. 연꽃으로 둘러싸여 연화지로도 불린다.

 

 

천태 지의 대사의 가르침과 숨결이 흐르는 천태산을 떠나 버스로 4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영파(닝보)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해상 실크로드의 역사를 복원하고 있는 곳이다. 영파는 고대로부터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이름이 높았고, 7∼8세기경부터 중국 동남해안에서 가장 번성한 무역항이었기에 신라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북적대던 항구도시였다.


이 도시가 동북아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가 되기까지는 9세기 초 이곳을 해상기지로 삼아 활동해온 해상왕 장보고선단의 역할도 크게 기여했으니, 우리와도 결코 무관치 않은 곳이다. 특히 영파의 중심가인 진명로에는 고려사관(高麗使館)이 증축·복원돼 있어, 한·중 옛 사람들의 무역이 어느 정도 활발했던 곳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영파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보타산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기상악화로 1시간여 늦게 출발한 뱃길은 ‘관음의 고향’ 보타산을 쉽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거칠기 그지없었다. 강폭이 한강의 두 배쯤 되는 전탕강이 쏟아내는 황톳물 덕에 누런 파도가 위압적으로 뱃전을 때려댔다.


관음신앙 원조는 신라상인?


그렇게 누런 황톳물 파도를 헤치고 1시간여 만에 도착한 보타산. 옛 시인들이 ‘산과 호수의 으뜸은 서호에 있고, 산과 강의 명승은 계림에 있으며, 산과 바다의 절경은 보타에 있다’고 노래했을 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보타산은 이 때문에 ‘해천불교왕국’, ‘남해불교왕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우리에게는 오대산, 아미산,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 4대 불교성지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보타산이 관음성지로 불리는 데는 일본 승려 혜악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당 함통 3년(862)에 오대산의 관세음보살상을 일본으로 이운해 가는데 영파를 떠난 배가 매령산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 한 치도 나아갈 수 없었다. 이때 혜악은 ‘관음보살이 일본으로 가기 싫어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일본으로의 관음보살 이운을 포기하고 매령산 조음동에 닻을 내렸다. 당시 매령산에 살던 불자 장 씨 부인이 쌍봉산 기슭의 자택 별실로 관음보살을 이운했다가, 후일 관음원을 짓고 모셨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전설의 주인공이 일본 승려가 아니라 신라 상인들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북송 말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석교의 산록 위에 양무제가 세운 보타원이 있고, 전각 안에는 영험한 관음상이 있다. 옛날에 신라 상인이 오대산에서 관음상을 조성해 신라로 돌아가려다, 배가 암초에 걸려 이 전각 안으로 모셨더니 해상으로 왕래하는 이들이 기도하면 반드시 감응한 바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에 ‘신라초’로 불리는 암초가 있어, 그 기록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으니 훗날 보타산 관음신앙의 원조가 된 전설적 주인공이 바뀔 가능성 또한 전혀 없지 않다.


섬의 전체 면적은 대략 13㎢이고, 최고 높은 불정산 높이가 300m에 불과한 보타산의 이름은 명나라 때부터 붙여졌다. 지금은 20여개 사찰에 1000명이 안 되는 스님들이 살고 있으나, 당나라 가정 7년(1214) 관음도량으로 지정된 이후 전성기 땐 보제선사, 법우선사, 혜제선사 등 3대 사찰에 88개 암자, 그리고 128개 수행처에 3000명 이상의 스님들이 수행하던 곳이었다.


지금도 크고 작은 절 모두에서 관음보살을 봉안해 명실상부한 ‘관음의 고향’으로 불리는 보타산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풍경이 온화하면서도 아름다워 인간세상 최고의 선경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섬 주위는 금빛 모래가 이어져있고 푸른 봉우리와 빽빽한 수목에 둘러싸인 고찰들이 어우러져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 같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같은 풍경은 예부터 이어져온 관음신앙이 더해지면서 불자들에겐 꼭 한번 순례하고 관음보살에게 원을 빌어보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때문에 지금도 매년 2월19일, 6월19일, 9월19일은 관음보살의 탄신, 득도, 출가일이라 하여 온 산에서 향불연기가 피어오르며 ‘해천불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기도 하다.


보타산은 우리의 낙산사 홍련암처럼 불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찾아보고 싶은 관음신앙의 중심지이기에 옛날부터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만큼 전설 같은 인연이야기와 가피이야기도 마르지 않는다. 그 중 명나라 때 곤산 고을에서 장사하던 왕 씨 사연은 관세음보살 가피의 백미로 꼽힌다.


왕 씨는 장사를 하면서도 3년 동안 매일 목욕재계한 후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읽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절마다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어 ‘관음의 고향’으로 불리는 관음도량 보타산으로 가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3년 동안의 기도 인연이 닿아 보타산을 향해 길을 떠난 날, 배를 타고 떠나려는 순간 다급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마을에 불이 나서 그의 가게로 옮겨 붙게 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돌아가야 하는가.’ 그러나 잠시 마음 속 갈등을 겪은 왕 씨는 ‘보타산에 계신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고 정성을 다해 온지 3년 만에 길을 떠나는데, 어찌 가게 한 채 타서 없어진다고 뜻을 바꿀 수 있으랴’는 생각에 끝내 배에서 내리지 않고 보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타산에서 관음보살 친견을 마치고 돌아오니, 정말로 온 동네가 다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곧 불이 붙는다던 그의 가게만은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지극한 발원과 신심에 감응한 관세음보살의 가피였다. 그 후로 왕 씨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를 따라 관음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전말이다.


민중 영혼 구하는 절 보제선사

 

 

▲ 보제선사는 향객들이 사른 향 연기가 자욱하다.

 


보타산 관음보살 가피 이야기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관음의 가피를 입고자 이 작은 섬을 찾는 이들이 해마다 5백만 명에 이르고 있다.
섬 전체가 관음도량인 보타산에서 제일 큰 사찰은 보제선사(普濟禪寺)다. 일본으로 가지 않으려는 관음상이 영험하다는 전설이 생기면서 북송 때 제일 먼저 창건된 사찰로, 송조 신종 때 보타관음사로 이름 붙였다. 하지만 이 절 역시 역사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수행자들이 강제로 쫓겨 나기도 했고, 수많은 사찰이 불에 타기도 하면서 복원과 망실을 거듭하게 됐다. 그리고 청나라 강희제 때(1699) 재건을 시작해 옹정제(1731) 때 마무리하면서 ‘민중의 수많은 영혼을 구하는’, 혹은 ‘민중의 불교사찰을 보호하는’ 뜻을 담아 보제선사 현판이 걸리게 됐다.


사찰은 10개의 전각에 12루, 7당, 4문, 300여 칸의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천왕문을 들어서는 순간 저마다 10개의 향에 불을 붙여 동서남북으로 세 번씩 절하는 향객들이 피운 향연기로 눈을 뜨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이 천왕전을 지나면 원통보전, 장경루, 방장전이 있고 양측에 가람전, 나한전, 선당, 승덕당, 내서당 등이 있다. 특히 관세음보살이 방생하던 호수로 알려진 사찰 앞 해인지는 연꽃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연화지 혹은 방생지로 불린다. 이 사찰에서 해인지와 함께 특이할 만한 곳이 대웅전에 해당하는 원통보전으로 높이가 8.8m에 달하는 관음보살상 양측으로 32응신의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또한 원통보전 양측으로는 마치 불상의 협시보살을 연상케 하는 문수전이 동쪽에, 보현전이 서쪽에 세워져 있어 참배객의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순례객들의 눈길을 끄는 곳 하나가 보제선사 옆에 붙어 있는 ‘식뢰선원(息耒禪院)’이다. ‘일을 쉬고 선정에 드는 곳’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일까. 다름 아닌 채식 식당이다. 그러고 보니 선원 앞에 ‘치파오’를 입고 서 있던 젊은 여인들은 이곳이 식당임을 알려준 호객꾼(?)이었던 셈이다.


말 그대로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음식 삼매경에 빠졌던 일행은 다시 길을 잡아 순례길을 재촉했다. 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보타산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법우선사(法雨禪寺)다. 1580년 명나라 때 창건된 사찰로 처음 이름은 해조암으로 불렸으나, 원나라 때 호국진해선사로 불리다 청나라 때 중건해 현재 이름인 법우선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 법우선사 나무 그늘에서 수행중인 스님.

 


보타산 제2의 사찰인 만큼 규모도 큰 편이다. 3만3000㎡ 부지에 천왕전, 옥불전, 구룡관음전, 어비전, 방장전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구룡전으로 불리는 원통전은 청나라 강희제 때 난징에 있는 명나라 때 고궁을 그대로 옮겨 지은 것으로, 지붕에 황색 유리기와를 얹어 웅장하고 장엄하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하다. 또한 사찰 주변으로 숲을 이룬 나무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 특이한 풍경을 이룬다. 마침 바람이 불어 마치 절 이름 ‘법의 비’를 알리듯, 녹나무에서 수없이 많은 꽃술이 날려 참배객의 발길을 잡는다.

 

 

법우선사 일주문을 나서면 보타산에서 가장 긴 모래사장 ‘천보사(千步沙)’가 눈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절 문을 나서면 바로 눈앞에 보타산에서 가장 긴 모래사장 천보사(千步沙)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를 이루는 산문 안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 종소리, 염불소리가 세간의 풍경소리인 듯 청아한 음을 내는 파도소리와 어우러져 관음보살의 음성을 들려주는 듯 하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