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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면서 웃으니 여기가 극락이라”

기자명 법보신문

부산불교신도회 법계정사 주지 원오 스님

 

▲원오 스님

 

 

“사랑하는 부처님! 인간은 말한 마디에도 흔들리는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말로써 시비를 가리고자 할 것 같으면 더 큰 시비만을 불러들일 뿐 시비는 끝없이 이어진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마음으로 내가 더 괴롭게 되고 미움은 오직 용서와 사랑으로만 끝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이 나를 욕하고 비방해도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오직 태양처럼 빛나는 지혜와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만을 담아 놓겠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하늘을 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새처럼 내 가슴 가운데 미운 사람을 두지 않을 것이며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깨끗하고 향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모든 이가 꽃을 좋아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꽃을 볼 때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시끄럽고 냄새나고 미운 사람을 보면 우리는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누구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잘 해줄 때 나는 행복을 느낍니다. 나에게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걸면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끌려서, 또는 내 눈에 드는 것이 있어서 끌려갑니다. 계속 따라만 갑니다. 끝도 없이 평생을 끌려 다닙니다.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이 임박해 있을 깨닫게 됩니다. 왜 살았는지 모른 채 다음 세계를 향해 머나먼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눈물의 배웅을 받으면서 알 수 없는 세계로 떠납니다. 남 때문에 행복한 순간도 많았고 억울한 일도 참 많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울고 웃었습니다. 모든 행복과 불행이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있고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좋고 나쁨은 개인의 주관일 뿐


좋았던 사람도 때로는 미울 수가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지난 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한 여고생이 애완동물로 뱀을 키웁니다. 뱀을 목에 감고 쓰다듬는데 저는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1년 365일 국수만 삶아줘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사람은 국수든 라면이든 밀가루로 만든 것은 역겨워 할 정도 싫다고 합니다. 뱀과 국수는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분별심을 내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겠지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고 좋아서 침을 흘리고 어떤 사람은 그냥 보고 있기도 싫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좋고 나쁨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은 개인적인 판단이지 이세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기준대로 좋아하고 싫어함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향인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극락세계를 염원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 자체를 모르는데 유토피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천하태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아마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고 조용하면 지겨워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바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극락세계에 데려다 줘도 지겨워서 못산다며 나올 것이라는 역설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것은 마음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두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아름답든지 불행하든지 내가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내가 창조하고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상황은 다른 누군가가, 절대 신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다,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만들어 낸 감정일 뿐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내 행복과 불행을 내 앞 사람, 이 세상에 맡겨 놓고 꺼내어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잘해주면 행복하고 잘해주지 않으면 불행하니까요. 그러한 이를 ‘거지’라고 합니다. 상대방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걸려들지 않으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자유이고 해탈입니다. 오히려 저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하든지 내가 저 사람을 쥐락펴락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살만 하겠습니까?


우리가 불자라면 스스로 행복해야 합니다. 내 행복을 내가 만들어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끌려가면 안 됩니다. 남을 오히려 웃기고 울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끌려 다니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한 세계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도 끌려 다니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벌겠다고 발원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 뭔가 이루겠다고 합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서 성불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법문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변화한다고 느끼고 있는지요? 들은 사람이나 듣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다음은 없습니다.


어느 큰스님께 한 수행자가 “불교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내 말을 안 믿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수행자는 “맹세코 믿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한 참 실랑이를 한 끝에 큰스님이 말했습니다.
“꼭 믿을 것인가? 그렇다면 말해 주겠다. 자네가 바로 부처다.”
여러분은 이러한 진리를 확신하는지요? 기실 부처님은 우리가 다 부처라고 했습니다. 이 다음에 부처가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부처’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다음에 부처가 되겠다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입니까? 우리는 밥 먹을 때도, 밥만 먹지 않고 생각을 합니다. 목마를 때 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늘 불안과 고통이 따라 다닙니다.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돈이 많으면, 출세를 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내가 원하는 소원이 이뤄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가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런데 삼성 이건희 회장의 딸이 왜 자살을 했습니까, 부산시장이 왜 자살을 했습니까, 대법원장 출신이 왜 한강에 뛰어내렸을까요? 행복이라는 건 돈과 권력,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행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행복한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잘 못해줘도, 남편이 잘 못해줘도, 자식이 효도를 안 해도, 부모가 잘 안 주셔도 바로 여기서 그냥 행복하면 그만입니다. 조건 없이 행복해야 합니다.


남들 때문에 불행하지 말라


조건을 따지면 행복은 오지 않습니다. 내 아내가 예뻐지기를 기다렸다가 행복해야 되겠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내 남편 버릇을 고쳐서 행복해야 되겠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 행복해야 합니다. 그냥 여기서 부처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상대방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 남 탓만 할 사람입니다. 상대방과 상관없이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생각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염불을 자꾸 하면 자기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또 화두를 갖고 있으면 ‘나’라는 생각을 놓게 됩니다. ‘무엇이 자꾸 좋다, 싫다 하는가’라고 의심하는 것이 곧 화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부처로 살라고 말입니다. 부처로 사는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풀고 용서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입니다. 무조건 웃고 사십시오. 거기에 극락이 있습니다. 그것이 열반입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는 바로 극락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부산불교신도회 법계정사 주지인 원오 스님이 7월 4일 부산불교신도회관 법계정사에서 열린 ‘2011 포교전진대법회 회향법회’에서 설한 것입니다.

 


원오 스님

1967년 해인사에서 법전 스님을 은사로 수계, 사미계와 구족계를 수지하고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1985년 육군 군승 43기로 임관, 육군본부 군종감실 종무장교, 육군 계룡대 호국사 주지, 육군 군종감을 역임했다. 2008년 3월31일 전역한 뒤 해인사에서 정진했으며 현재 부산불교신도회관 법계정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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