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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등회 역사와 전통

기자명 법보신문
  • 집중취재
  • 입력 2011.07.26 09:23
  • 수정 2011.08.22 11:14
  • 댓글 0

연등회, 왜 문화재 지정돼야 하나
신라 거쳐 고려시대 '만개'…근대 이후 전통문화로 승화

 

삼국사기·고려사 등 문헌에
연등회 전통 고스란히 남아


불교·토속문화 결합되면서
독창적 민간 축제로 발돋움


연등회가 1000년 이상 지속된 불교행사이면서 민중축제로 존재해 왔다는 것은 이미 숱한 문헌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중국을 통해 수용된 연등회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의 전통 민속의례와 융합되면서 독창적 전통문화로 발전해 왔다는 것은 학계의 보편적인 견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문왕(?~875) 6년 봄 정월15일에 임금이 황룡사를 찾아 연등을 관람하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으며 진성여왕(?~897)도 황룡사에서 연등을 관람했다. 이는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연등회가 널리 성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다.


연등회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차원을 넘어 민중의 삶에 깊숙이 자리매김했다. 고려 태조는 훈요십조를 통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널리 장려함에 따라 매년 1월15일 혹은 2월15일과 4월8일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연등회가 평양과 개경뿐 아니라 전국의 향읍(鄕邑)에서 일제히 열렸다. 또 왕실에서도 연등회가 개최된 날에는 왕이 직접 사찰을 찾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향을 피우고 태조 왕건의 초상화 앞에서 제사를 모시는 의식을 거행했다.


당시 왕의 행렬을 묘사한 기록에 의하면 수많은 호위군사와 인가교방악관(引駕敎坊樂官, 현재의 군악대) 등과 각종 재주꾼들이 동참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의 행렬에는 인가교방악관 100여명이 좌우로 갈라서며 안국기(安國伎), 잡기(雜伎) 각각 40명이 좌우로 나뉘어 걸었다. 또 취각 군사 16명이 좌우로 갈라서되 모두 수레 앞에 나서며, 취라 군사 24명은 수레 뒤에 따른다고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왕의 행렬은 상당히 짜임새 있는 가두행렬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는 현재의 제등행렬과 매우 흡사한 형식을 담고 있는 게 학자들 설명이다.


전경욱 고려대 교수는 “기록에 나타난 안국기는 안국(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 지방)의 공연물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외국 공연단체도 연등회에 참가해 공연했음을 의미한다”며 “이는 가두행렬에서 국내외의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런 가두행렬이 현재의 제등행렬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전 교수의 설명이다.


고려시대 연등회는 불교적 성격을 넘어 민속의례적인 요소가 융합되면서 독창적인 민속신앙적 축제로 발전했다는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특히 부처님오신날이 가까워오면 민가에서 집집마다 등을 다는 연등 풍습이 생겨났다. 뜰에 등간이라는 장대를 세우고 그 끝에 꿩 깃을 끼워 장식하고 물들인 비단을 잘라 깃발을 만들어 매다는 호기라는 놀이가 성행하기도 했다.

 

 

▲한국전통등연구원이 문헌을 통해 재현한 조선시대 청계천 연등놀이.  한국전통등연구원 제공

 


당시 연등회에 만들어졌던 등의 모양도 연꽃이나 목련과 같은 꽃모양을 비롯해 수박·참외, 거북이나 학, 물고기와 같은 모양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또 등에는 풍년을 기원하거나 개인적 복을 기리는 발원문도 함께 썼다. 이는 연등회가 농경의례로서 달맞이와 같은 민속행사에다 불교의 등공양이 융합된 형태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유동식 연세대 명예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연등회는 재래의 민속과 결부된 불교행사로 예전부터 민간의 토착신앙이 융합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유 교수는 “고려시대 연등회는 형식적으로 불교 법회의 성격을 갖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통 민속신앙을 계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민속신앙으로 발전한 연등회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숭유억불로 고려시대와 달리 국가차원에서 진행된 행사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민간차원의 연등회는 더욱 성황리에 진행됐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사헌부에 하교하기를 “우리 풍속에 연등과 관등놀이를 행한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요즘 간원(諫院)에서 폐단을 말하고 없애기를 청하였다. 내 생각에 오래된 습속을 갑자기 고칠 수 없으니 지금부터 절 이외에서의 연등은 일체 금하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미 민중풍속으로 자리매김했던 연등회는 좀처럼 막을 수 없었다. 특히 조선전기 서거정과 강희맹 등 문인들의 한시에 부처님오신날의 연등행사가 종종 묘사됐으며 조선후기 당시의 풍습을 담은 세시기에도 연등의 모습은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들어 연등회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손에 등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행태가 강조됐는데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일제시대 나타난 제등행렬은 일본식 부처님오신날의 행사 중 하나인 ‘하나마쯔리’에 영향을 받아 군대식 제등행렬의 풍속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대다수 학자들은 고려시대 다채롭게 구성된 행렬이 이미  존재했고 전통적으로 길놀이 문화가 존재했다는 점에서 제등행렬이 일제시대 새롭게 나타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장 미등 스님은 “전통문화는 한순간에 없어지거나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며 “전승되는 가운데 그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반영해 변화하고 재창조되면서도 그 문화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세시풍속의 특징”이라고 밝혔다. 스님은 또 “제등행렬은 불교문화가 유입될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각종 기록에도 그 모습이 나오고 있다”며 “따라서 제등행렬은 일제시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약화됐던 옛 문화가 복원되고 전통문화로서 승화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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