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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초록의 계곡 ‘누브라’

기자명 법보신문

카라반도 쉬어가던 중앙아시아의 길목

 

▲누브라계곡을 따라 흐르는 쇽강은 푸른 하늘을 닮아 버린 듯 푸른 빛이다. 푸른 하늘과 푸른 강, 그 사이로 펼쳐진 푸른 초원은 ‘꽃의 계곡’이라는 누브라계곡의 별명을 설명해주는 듯 아름답다.

 

 

연예인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자고났더니 유명해졌더라”이다. 그 말이 딱 맞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자고 났더니 세상이 바뀌었다.


해발 5602m 카르둥라의 정상을 지나자마자 깜빡 잠이 들었다. 이번 여정 내내 한 순간, 한 장면도 놓치지 말자며 이동하는 동안 자동차 안에서 결코 잠들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다짐을 비교적 잘 지켜왔건만 카르둥라를 넘었다는 안도감에 깜빡 잠이 든 것이다. 하지만 30여분도 채 지나지 않아 덜컹거리는 차 소리에 잠이 깬다. 그리고는 곧바로 창 밖에 펼쳐진 누브라계곡, 그 아름다운 골짜기에 그대로 눈을 빼앗긴다. 지금까지 지나온 라다크에선 볼 수 없었던 것, 바로 푸른 초지가 계곡을 따라 펼쳐져 있다.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짙푸른 풀빛은 조금 사그라졌지만 그래도 분명 푸른 초원이다. 얼마 만에 만나보는 푸른빛인가. 그동안의 추위와 메마름에 뻑뻑해진 눈이 싱그러운 푸른빛을 만나자 샤워라도 한 듯 촉촉해진다.

 

 

▲누브라계곡에서 만난 야생 야크.

 


푹신한 양탄자처럼 깔려있는 초원 중간 중간엔 검은 점들처럼 야크 때가 흩어져 있다. 땅에 닿을 듯 말 듯 한 흑갈색의 긴 털을 갖고 있는 야크는 라다크를 대표하는 야생 동물 가운데 하나다. 체구가 당당하고 멋진 이 짐승을 라다크에 도착 한 후 줄곧 찾았다. 하지만 여태껏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그 야크가 이곳 누브라계곡에서 가장 먼저 일행을 맞아 준다. 보통 키가 2m, 덩치 큰 수컷은 몸길이가 3m 이상이고 체중이 1t에 육박하는 놈들도 드물지 않다. 암수 모두 하늘로 향하는 우아하게 구부러진 큰 뿔을 갖고 있다는 점이 야크의 특징이다. 고산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한 이 멋진 동물의 다리는 짧지만 굵고 단단해 보인다. 어깨 아래쪽과 옆구리에서부터 자라나온 털은 술장식처럼 길게 늘어져 발목까지 내려온다. 꼬리에도 그만큼 긴 털이 치렁치렁하다. 혹독한 고산의 추위와 눈에도 끄떡없는 코트인 셈이다. 이렇게 무리를 이루고 있는 야생 야크는 주로 암컷과 딸린 새끼들이라고 한다. 수컷 야크는 히말라야의 고산 자락을 따라 혼자 돌아다니거나 수컷들끼리 10여 마리 정도의 무리를 이루기도 한다.

 

 

▲야크와 암소의 교배종인 조모도 흔히 볼 수 있다. 

 


야크와 비슷해 보이는 동물로 라다크에서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가축이 조모다. 조모는 암소와 야크의 교배종으로 농경사회인 라다크에서 가장 중요하고 쓸모 있는 가축이었다. 물론 오늘날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조모는 귀한 재산이며 힘 쌘 농군이다. 야생 야크의 피를 물려받은 조모는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도 쌔다. 서투른 농부가 서둘러 몰아대서는 결코 조모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길가에서 조모와 마주 칠 때도 스스로 움직여 차를 피하도록 기다리거나 천천히 뒤를 따라가 주는 여유가 필요하다.


푸른 초원에서 마주친 야크 무리


계곡을 따라 펼쳐져 있는 푸른 초원과 그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야크라니. 이곳이 정말 라다크인지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방금 넘어 온 카르둥라의 눈 덮인 겨울 풍경과는 너무 다른 풍경, 너무 빠른 장면 전환에 한동안 눈앞이 얼떨떨하다.


사실, 카르둥라를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중앙아시아에 접어든 셈이다. 그리고 이곳 누브라계곡은 그 중앙아시아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동에서 서로, 또는 서에서 동으로 오가던 옛 카라반들에게 누브라계곡은 험난한 고갯길을 넘어 선 후에 비로소 만끽할 수 있는 푸른 휴식의 땅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먼 길을 지나온 상인들은 서역의 관문을 통과하기 전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카르둥라를 넘기 위해서는 체력과 장비를 꼼꼼히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꽃의 계곡’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누브라계곡은 카라반들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답다. 추위가 물러가고 여름이 되면 짧은 온기를 놓칠 새라 계곡의 식물들은 앞 다투어 새잎을 내고 꽃을 피운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쇽강 주변은 그대로 한 다발 꽃이 된다. 농부들 역시 그 틈에 코발트색 강물을 퍼 올려 비옥한 강주변에 농사를 짓는다. 그렇기에 누브라계곡은 라다크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땅으로 손꼽힌다.
고갯길을 조금 내려오니 누브라계곡의 주인공 쇽강이 눈 아래 펼쳐진다. 푸른 하늘 한 줄기가 땅으로 흘러 그대로 강이 된 듯 하늘색과 꼭 빼닮은 푸른빛이다. 하늘과 맞닿아있는 산봉우리엔 눈이 하얗지만 그 아래에는 풀 한포기 없는 라다크산맥이 맨살을 드러낸 채 강을 따라 이어진다. 그리고 그 메마른 산을 어루만지듯 흐르는 쇽강과 강을 따라 점점이 펼쳐지는 푸른 초원. 카르둥라의 고단함 따위는 이미 다 잊고 묵묵히 이 아름다움을 즐길 뿐이다.


누브라계곡 여행은 칼사르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길가를 따라 서있는 허름한 흙집 몇 채가 전부인 이곳을 지나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오른쪽 길은 쇽강을 건너 수무르를 지나 인도령 마지막 마을인 파나믹까지 이어진다. 왼쪽 길은 쇽강을 따라 데스킷과 훈데르로 이어진다. 훈데르 역시 누브라계곡에서 민간인이 갈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다. 중국과의 국경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인도의 현실이 여행객의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하지만 훈데르까지는 가보기로 한다. 그곳에는 몽골의 고비사막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곳까지 온 쌍봉낙타가 있다. 카라반들을 따라 이곳까지 이동해온 낙타 가운데 어떤 이유로 이곳에 버려졌거나 혹은 대열에서 이탈한 놈들이 이곳에서 야생 낙타로 살아온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에 낙타들의 고향인 몽골의 고비사막과 흡사하게 생긴 사막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낙타들 역시 이곳을 제2의 고향이라 여기며 정착(?)한 것은 아닐까. 비록 혼자만의 상상이지만 훈데르에 도착, 눈앞에 펼쳐진 ‘사막’을 보는 순간 그 상상은 확실한 신념으로 바뀌어 버린다. 물론 사막을, 더욱이 고비사막을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말이다.
강을 따라 만들어진 모래밭은 그 넓이가 사막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막하면 떠오르는 유장한 곡선의 모래언덕, 무엇보다도 ‘사막의 배’라 불리는 낙타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으니, 분명 사막의 한 장면과 다르지 않다.


사막 떠난 낙타의 제2 고향

 

 

▲누브라계곡의 마지막 마을 훈데르에 펼쳐진 사막에선 낙타사파리를 즐길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덩치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 동물원에서 본 낙타 외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등에 혹이 둘 달린 낙타를 만져본 것은 생전 처음이다. 장난스런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낙타의 얼굴, 커다란 눈망울에 긴 속눈썹과 말쑥하게 빗어 올린 듯 단정해 보이는 머리털이 더 없이 친근하다. 그렇게 순해 보이는 놈을 골라 올라타고는 잠시 사막 횡단의 기분을 느껴본다. 등에 달린 두 개의 혹 사이에 두툼한 양탄자를 하나 깔고 그 위에 올라앉으면 그만이다. 별다른 안장도 고삐도 없지만 어슬렁어슬렁 느리게 걷는 낙타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남아있는 야생 쌍봉낙타의 수는 약 800여 마리 뿐이란다. 이곳 훈데르에도 약 170여 마리의 쌍봉낙타가 있는데 주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낙타사파리에 활용된다.


덕분에 낙타들은 며칠씩 물과 먹이도 없이 사막의 뙤약볕 아래를 걷지 않아도 될 것이다. 관광객들의 사파리체험은 왕복 1시간이면 족하니 발바닥이 넓어서 사막의 모래를 걷기에 적합한 다리도 그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다. 사람들이 만들어준 우리가 있으니 급격히 떨어지는 사막의 밤기온으로부터 체온을 지켜줄 긴 털도,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막는데 아주 적합하게 진화한 개폐식 콧구멍도 그리 요긴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 낙타들에게 중앙아시아, 몽골의 고비사막은 그저 멀고먼 타향일 뿐이다. 어쩌면 저 낙타들은 자신들의 발바닥이 왜 크고 넓은지. 속눈썹이 왜 그토록 길며 콧구멍은 왜 자유롭게 여닫을 수 있는지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 등 위에 우뚝 솟아있는 두 개의 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그 의미를 깨닫기에 저들의 고향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익숙한 곳, 낯익은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는 우리 역시 저 낙타와 다르지 않다.


문득 사막은 외로운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조롭게 이어지는 모래 언덕 사이를 무심히 걷고 있는 낙타의 단조로운 흔들림을 따라 외로움이 타박타박 따라온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

시인의 말처럼 뒤를 돌아보니 모래위에 우리를 태운 낙타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하지만 외로움에 빠져 있기에 누브라계곡의 하늘빛은 너무 파랗고 바람은 따뜻하다. 아름다운 날, 아름다운 땅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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