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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초의차를 사랑했던 신위

기자명 법보신문

초의차의 맑고 향기로움에 서로 말을 잊었네

시서화 삼절로 칭송되던
조선후기 대표적 지식인

자신의 집 ‘北禪院’ 명명
참선과 차에도 깊은 이해

 

신위는 차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했을 뿐 아니라 깊은 삼매에도 이르렀다. 그림은 신위의 ‘묵죽도 지본묵서’.

초의차를 사랑했던 자하도인 신위(申緯, 1769~1845)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초의 스님을 통해 불교를 이해했고, 초의는 그의 조언을 통해 초의차를 완성했다. 뿐만 아니라 초의가 민멸된 차문화를 중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신위와 추사의 후원으로, 차의 애호층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초의와 신위가 처음 만난 시기는 1831년경이다. 1830년 겨울, 취연(醉蓮)을 대동하고 상경한 초의는 추사 댁에 머물면서 스승 완호(玩虎, 1758~1826)의 탑명(塔銘)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추사 댁을 찾았던 초의가 처한 현실은 상경하기 전에 세운 계획과는 판이하게 달라 있었다. 이는 바로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고금도로 위리 안치된 상황이었다. 김노경이 고금도로 유배된 시기는 그해 10월2일이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간찰 모음집인 ‘주상운타(注箱雲朶)’ 후기에 당시의 상황을 “1830년 겨울에 취연과 함께 상경해 해거도인(홍현주)에게 탑명을 구하려 하였다(道光庚寅冬 與醉蓮上京 乞先師塔銘於海居道人)”고 했다. 그가 말한 겨울이란 바로 10월을 말한다. 신위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도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 번 경인(1830)년 겨울, 대둔사 승려 초의가 나의 자하산방(紫霞山房)으로 찾아와서 그의 스승인 완호의 삼여탑명에 나의 서문과 글씨를 부탁하였다. 서문은 썼지만 글씨를 다 쓰지 못했는데 내가 호해(湖海)로 귀양을 가게 되어 (탑명의) 글씨가 흩어져 없어졌고, 서문의 원고조차 잃어버린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올 신축(1841)년 봄에 초의가 편지를 보냈는데 요행히도 그 부본이 초의의 걸망 속에 들어 있어 (서문을) 찾았다는 것이다. 12년이 흘렀는데도 다시 읽으니 마치 옛 글을 얻은 것 같았다. 비로소 글씨가 완성되어 돌에 새길 수 있었으니 초의가 바라던 일을 거의 마칠 수 있었다. 먼저 시 한 편을 지어 이를 축하하고 또 소식 가득한 좋은 차에 감사한다.


(往在庚寅冬 大芚僧草衣 訪紫霞山中 以其師玩虎三如塔銘 乞余序幷書 序則成而書未成 旋余湖海竄逐 文字散亡 序稿亦失甚恨之 今年辛丑春 草衣書來 幸有其副本之在鉢囊中而搜出者十二之久而重讀之如得汲冡古書 始可以成書上石 庶畢草衣之願也 先以一詩賀之 且謝佳茗之充信也)


신위의 이 편지는 1841년 봄이 후에 쓴 것이다. 초의가 스승의 탑을 완성한 후, 이러한 전후 사정을 그에게 알리면서 차와 함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는 초의가 삼여탑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성의어린 자신의 뜻을 시 한편에 부쳐서 초의에게 보냈다는 것. 그렇다면 신위는 어찌하여 삼여탑의 서문을 잃어버리고 서문의 글씨를 완성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가 처한 현실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따라가 보려 한다. 이는 초의가 상경하여 비문을 받는 과정에서 확대되었던 경화사족들과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고, 이들이 초의를 통해 차에 대한 이해를 널리 했던 배경을 밝힐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초의가 시흥의 자하산방으로 신위를 찾아 갔을 무렵 부인과 사별한 그는 각기병이 악화되어 용경에 머물다가 막 시흥으로 돌아왔을 때라 여겨진다. 당시 외척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들의 미움을 받았다. 그가 시흥으로 돌아가 은둔했던 것은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때 그가 연경에서 돌아온 후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병조참판에 오르는 등, 정치적으로 승장구하는 듯했다. 1828년 강화유수로 임명된 후, 윤상도의 탄핵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어 관직을 사직한 후에도 정치적인 압박이 계속되었는데 이런 위기에서 구원해 준 이가 김조순이었다.

 

1831년 초의와 첫 만남
삼여탑명을 계기로 교류

초의, 손수 만든 차 전달
초의차 격조와 품격 칭송


그가 ‘호해로 귀양을 가게 되어’라는 것은 1832년 황현과 이시원의 탄핵으로 평산부로 귀양 간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초의가 1831년 자하산방으로 신위를 찾아갔을 당시 그는 여기에서 은거하며 차와 불교에 심취했다. 자신의 집을 북선원(北禪院) 다반향초실(茶半香初室)이라 할 정도로 불교와 차에 매료된 생활을 하며 지냈다는 것을 짐작하기에 족하다. 바로 이 무렵, 그가 초의를 만난 것, 인생의 무상을 느꼈던 그가 초의를 반긴 것은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첫 대면은 이미 오랜 숙연(宿緣)의 결과라 여겨진다.


한편 초의가 신위에게 비명을 부탁하며 자신이 만든 보림백모차를 주었는데 신위의 ‘북선원속고(北禪院續稿)’에 “초의는 그의 스승 완호대사의 삼여탑을 세우려고 해거도위(홍현주)에게 탑명을 구했으며, 나에게 서문을 지어달라고 하면서 네 개의 떡차를 주었다. (이 떡차는) 초의가 손수 만든 것으로 보림백모라고 한다(時草衣爲其師玩虎大師 建三如塔 乞銘詩於海居都尉 乞序文於余而遺以四茶餠 卽其手製 所爲寶林白芽也)”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초의는 두 번째 상경 길에 자신이 만든 차를 가져와 자신과 교유했던 이들에게 선물했음이 드러난 셈이다. 후일 초의가 신위에게 삼여탑의 서문을 받기 위해 보인 노력은 “초의가 편지를 보냈는데 금선암에서 한번 만나자 하였지만 내가 한질이 있어 우선 시 두수로 답한다“(得意洵書 要余金仙庵一會 時余有寒疾先此賦答二首)”고 한 점이나 “초의가 몸소 차와 편지를 보내 그 스승의 사리탑기를 요구하면서, 또 금선암에서 한번 만나기를 원했다. 이 때 형역으로 달려가지 못하여 시로 답을 대신한다(釋草衣有書致茶 求其師舍利塔記 且願金仙庵一會 時有亨役未赴 以詩爲答)고 한 사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초의는 신위에게 탑명의 서문과 글씨를 받으려고 차와 시를 보내는 등 상경한 목적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사실이 엿보인다.

 

 

▲ 신위는 14세 때 정조가 궁중에 불러들여 칭찬을 할 정도로 신동이었다. 31세 때 문과에 급제, 이조·병조·호조의 참판을 거쳤으며, 당시 시·서·화의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사진은 신위의 시.

 


초의와 차 그리고 시, 불교를 통해 숙연의 인연을 이었던 신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칭송되었던 인물로 조선 후기 문예를 대표했던 인물이다. 그는 문예의 종장으로 불렸던 강세황의 제자로, 품성이 호탕해 당색(黨色)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의 당색은 소론계지만 남인계인 다산과 그의 자제들, 노론계의 김조순과 추사와도 가까웠고, 특히 당색이 같았던 이유원(1814~1888), 정원용(1783~1873) 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차를 애호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스승 강세황을 통해서이다.


그가 60여 수의 다시(茶詩)를 남긴 사실을 통해서도 그의 생활에 차가 얼마나 습윤되었는지를 알기에 족하다. 한편 그는 초의가 만든 차의 세계를 이렇게 칭송하였다.


초의가 청공하려 만든 차가 나의 산방에 도착했다(製茶淸供到山房)/ (차를)조심조심 기울여서 다시 차색을 감상하니(細傾且玩瓷色)/ 투명함 가운데 차향이 가장 먼저 피어난다(透裏先聞箬葉香)/ 공하다는 걸 깨달았으니 무엇을 등질까(悟在虛空何必面)/ (차가 놓인) 상을 마주하니 담담해져 말을 잊었네(對床言說淡相忘)


초의차는 부처님께 올리는 깨끗한 예물인 차이다. 이런 차를 신위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조심조심 기울여서’라고 한 대목에서는 초의차에 대한 감사와 성의가 행간 속에 빛난다. 그뿐인가. 초의차의 격조와 품색이 맑고 담박했음은 ‘투명함’이라는 그의 표현에 함축되었다. 맑음 속에 가장 먼저 드러난 차향, 초의차를 이리 표현한 신위의 시격(詩格)은 그가 시서화 삼절로 칭송된 속내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맑고 향기로운 차를 두고 서로 말을 잊었다는 그의 경지는 차를 통해 삼매(三昧)에 들었음이 분명하다. 차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했던 그의 경지는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수록된 ‘자하시(紫霞詩)’에도 “차가 더욱 진수를 드러낼 때 속된 기운 고칠 수 있고(苦茗嚴時宜俗) 좋은 시 아름다운 곳 모두 참선에서 득의했지(好詩佳處合參禪)”에서도 드러난다.

 

▲박동춘 소장

아! 차를 통해 아름다운 이상을 꿈꿨던 사람들, 그들은 차를 통해 교유했고, 인간의 지순한 세계를 공감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 같은 차의 덕성이 변할 리 없건 만은 맑디맑은 차의 세계, 아는 이 어디에 있는가.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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