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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항주 영은사·영복사

기자명 법보신문

신선의 靈이 깃든 곳서 극락에 든 ‘나’를 보다

 

▲신선의 영이 깃든 절 영은사 대웅보전은 높이가 33.6m에 달하는 웅장함을 자랑한다.

 

 

관음의 고향 보타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영파로 돌아 나오는 뱃길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전날 보타산으로 향할 때보다 더 큰 물결이 일었고, 운무 역시 쉽사리 바닷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영파에 도착한 일행을 태운 버스는 중국 남송시대 수도 항주로 향했다.


항주는 서호를 비롯해 자연경관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 부유층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또한 12세기 송나라가 금나라의 잦은 침략에 못 견뎌 하남성 개봉에서 항주로 수도를 옮긴 이후를 가리키는 남송시대에 해상무역로를 통해 아시아 각국과 활발하게 무역을 했던 곳이기에 자연스럽게 인구가 증가하고 다양한 문화가 꽃핀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를 상대로 미인계를 벌였을 만큼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서시의 고향이기도 하니 이미 오래전부터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한 풍류가 남달랐던 곳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먹고 노는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기도 했다. 때문에 20세기 문학가 루쉰은 ‘서호의 풍경에 이르면 비록 멋스러운 곳이라고 할지라도 너무 먹고 노는 놀이에 빠지면 사람의 지기를 갉아먹을 수 있다’는 충고를 남기기도 했다.


항주 최고의 명찰로 손꼽히는 영은사(靈隱寺)는 이 도시의 서북쪽에 위치한 사찰로 그 운치가 남달라 ‘신선의 영이 깃든 곳’으로 불릴 정도다. 아울러 입구에 새겨진 지척서천(咫尺西天)은 극락이 지척에 있음을 알리며 방문객에게 세간과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는 관문임을 알린다. 우리의 일주문에 해당하는 입구에서 강택민 전 국가주석이 쓴 ‘영은사(靈隱寺)’ 현판을 감상하고 산 속으로 조금 들어가면 사찰을 창건한 혜리 스님을 기리는 ‘이공지탑(理公之塔)’이 있고, 이 탑 뒤로 비래봉이 있다.

 

 

▲혜리 스님을 기리는 ‘이공지탑’.

 

 


비래봉에 330 불·보살상 새겨


비래봉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209m의 봉우리다. 인도에서 온 혜리 스님이 이곳을 들렸다가 산을 보고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시던 중천축국의 영취산이 어떻게 여기로 날아왔는가’라고 감탄하며 이름을 날 비(飛)자에 올 래(來)자를 써서 비래봉(飛來峰)으로 짓고, 맞은편에 신령이 숨어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영은사’를 지었다고 한데서 이름이 유래되고 있다.


비래봉에는 ‘제공’이라고 하는 한 스님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제공 스님은 출가자임에도 불구하고 술과 고기를 유달리 좋아하여 매일 낡은 모자에 찢어진 부채 하나를 들고 마을 사람들을 찾아 술과 고기를 얻어먹고 살았다. 그래도 신통력이 있어 마을에 일어난 문제들을 해결해주곤 했으나, 사람들은 파계행위를 일삼는 스님을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은 예의 신통력으로 인도에서 큰 산이 날아올 것을 알아차리고는 동네 사람들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산이 날아온다’는 뜬금없는 말을 믿지 않았고, 이를 본 스님은 그대로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될 것이기에 하는 수 없이 꾀를 낼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때 마을에 결혼식이 있어 스님은 신부를 납치해 달리기 시작했고, 이를 본 사람들 역시 스님을 잡기 위해 달리게 됐다. 바로 그때, 막 사람들이 달려나온 그 자리에 거대한 바위가 떨어졌고 무사히 죽을 자리에서 탈출하게 된 사람들은 이후 스님을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했다는 이야기다. 그 바위가 지금의 비래봉이다.

 

 

▲인도에서 날아온 산 비래봉에는 다시 날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불·보살상 330여기가 새겨져 있다.

 


비래봉에는 오대로부터 송, 원에 이르기까지 조각한 330여 개의 불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비래봉이 날아 온 산이기 때문에 또다시 날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석굴안과 암벽에 470존상의 불보살상을 새겼으나, 자연재해나 인위적으로 소실되고 남은 것이 330여기라고 한다. 비래봉 계곡마다 길을 따라 조성된 석불들 중 낮은 곳은 사람들의 손길로 반질반질해져 있다. 이곳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상은 남송시대에 조각됐다고 전해지는 포대화상으로 길이 9.9m에 높이가 3.3m에 달한다.


비래봉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석굴을 지나 잠시 암벽에 새겨진 불보살을 감상하다보면 영은사로 들어서는 천왕전을 만나게 된다. 이곳 역시 여느 중국 사찰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이 미륵불로 섬기는 포대화상이 인품 좋은 할아버지의 웃음기를 머금고 방문객을 맞이한다. 영은사는 인도 스님 혜리가 동진시대인 326년에 비래봉을 찾았다가 창건한 이래 17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11세기 오대 때에 최고로 번창해 18각, 72전당에 3000여 승려가 머물렀으나 청나라 때 화재로 소실돼 대부분의 전각을 잃었다가 다시 짓는 등 그 부침 또한 적지 않았다.


천왕전을 지나면 바로 높이가 북경 천안문 성루보다 10㎝ 낮은 33.6m의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중국 사찰 중에서도 흔치않게 높은 건물인 대웅보전은 중국 고건축물 예술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대웅보전 안에는 중앙 연화석좌에는 석가모니부처님상이 봉안돼 있다.


불상은 1956년 절강대학 교수와 예술인들이 합작해 당나라 때 조형물을 본 따서 만든 목불좌상으로, 법당 건축물만큼이나 커서 높이가 24.8m에 달한다. 불상 소재는 향나무 24개를 따로 조각해 붙였다고 전해지고 있고, 불상 도금에 순금 44㎏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 양 옆에는 호법신인 20제천이 기립해 있고, 뒤쪽으로는 12원각보살이 가지런히 앉아 있다. 그리고 대웅보전 앞에 송대에 세운 8각9층의 옛 탑이 큰 나무 양쪽에 서 있어 그윽한 모습을 자아낸다.
대웅보전 뒤편으론 약사전이 자리를 잡고 있고, 전각에는 약병을 든 약사여래불 좌우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보살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약사전을 나와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영은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화엄전이 나타난다. 비로자나부처님과 문수·보현보살이 좌우협시보살로 시립해 있으나, 이 또한 크기가 지나치다 싶은 것이 우리의 사찰에서 느끼는 멋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영은사에서 2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영복사에서는 중국의 사찰답지 않은 고즈넉함을 맛 볼 수 있다.

 


화엄전에서 내려와 영은학당을 지나면 나한전을 볼 수 있다. 송대에 세운 밭 전(田)자 모양의 내부는 1936년 불에 타 볼 수 없으나, 그래도 청동으로 주조한 높이 1.7m의 500나한을 보는 재미가 색다르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영은사와는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운림선사(雲林禪寺)’ 편액을 마주하게 된다.


운림선사 편액이 이곳에 걸린 사연이 재미있다. 청나라 강희제가 북고봉(北高峰)에 올라 구름이 자욱하고 안개가 덮인 곳에 절이 있는 것을 보고 ‘운림’이라 했다고 한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이후부터 참배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역사 이야기는 정사보다 야사가 재미있는 법. 운문선사 편액이 걸리게 된 야사가 사찰순례의 재미를 더한다. 강희제는 영은사의 모습에 반해 여러 차례 방문을 하게 됐고, 이에 사찰 주지가 편액의 글씨를 부탁하게 됐다. 그런데 그만 전날 밤 과음으로 인한 숙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강희제가 영(靈)자를 쓰다가 윗부분의 비 우(雨)자를 너무 크게 써서 그 아래에 구(口)자 세 개와 무(巫)자를 같이 써 넣을 공간이 없게 된 것이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강희제는 영자를 쓰지 않고 운자를 써 넣었다. 그리고 이때 옆에서 지켜보던 신하가 넌지시 림(林)자를 읊조리자 거침없이 그 글자를 써 넣고는 선종사찰이란 의미로 선사를 붙였다.

 

 

강희제는 운림선사로 불러


이에 왕의 하는 일에 가타부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주지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강희제는 태연하게 ‘이 절에 참배객이 많이 와서 향에서 나는 연기가 마치 구름과 같이 보일 정도로 번성하라는 뜻이다’는 해석을 붙였다. 때문에 주지 스님도 별 도리 없이 받아 걸어 운림선사가 됐으나, 이곳 사람들은 왕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애초에 혜리 스님이 지은 ‘영은사’로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강희제가 술에서 덜 깨어 잘못 쓰고 임기응변으로 해석했다고는 하나, 그 임기응변의 해석만큼이나 엄청난 인파가 매일 이곳을 찾아 향을 사르고 있으니 그 선견지명(?)이 보통은 아닌 듯하다.


사찰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대웅보전 앞에 이르렀을 때 예불을 시작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은 오후 4시에 예불을 시작한다. 하지만 스님들만 법당에 들어갈 수 있고 재가자들은 직접 참여할 수 없다. 또한 관광객들이 예불하는 모습을 촬영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예불 참석의 허락 여부와 관계없이 순례단은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영은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은사 저녁 예불. 재가자는 들어갈 수 없다.

 


영은사에서 나와 산 위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영복사(永福寺)가 있다. 영은사가 발 디딜 틈을 찾아야 할 만큼 많은 참배객들로 북적거렸던 반면, 불과 200m 정도 떨어진 영복사는 찾는 이들이 없어 한산하기까지 했다.


영복사는 일본에 처음으로 가야금을 전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또 산 위에 자리하고 있어 날씨가 좋을 때면 항주의 자랑인 서호도 내려다보인다고 하는데, 이 날은 보이지 않았다. 찻집과 강당이 있는 곳에서 100m가량 올라간 곳에 자리한 크지 않은 대웅전 앞마당 우측으로는 대나무 숲도 있어 우리나라 사찰에서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함도 맛볼 수 있다.


비래봉 석불을 시작으로 영은사와 영복사로 이어지는 이곳은 다소 번다함이 묻어나기도 하지만 그 형상을 보노라면 입구에서 ‘지척서천’이라 일러줬듯이, 중생의 세계가 아니라 마치 극락세계를 그려놓은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앉은 듯하다. <끝>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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