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 믿어야 여래의 땅에 도달

기자명 법보신문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 온갖 법 길러내
살고 있는 이 세상 벗어나 따로 삼독 벗어날 곳은 없다

 

▲대무 2명이 조그마한 담요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 연구조사에 의하면 호현무로 추정되고 있다. 220굴 당나라 초기.

 


92.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삶일 뿐인데


信入此法 還有退者不. 信有二種. 一 若正信堅固 諦了無疑 理觀分明 乘戒兼急 如此則一生可辦 誰論退耶. 二 若依通之信 觀力浮 習重境强 遇緣卽退. 如華嚴論云 如涅槃經 聞常住二字 尙七世不墮地獄 如華嚴經云 設聞如來名及所說法 不生信解 亦能成種 必得解脫 至成佛故. 何故經言 第六住心 及從凡夫信位 猶言有退. 此意若爲和會.

 

문 : 이 법을 믿고 들어갔다가 물러나는 사람도 있습니까?
답 :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견고하고 바른 믿음으로서,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은 자세히 알아 의심이 없기에, 이치를 봄에 분명하여 계율을 지녀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한 생에 공부를 끝낼 수 있으니 어찌 누가 물러날 것을 논하겠느냐. 또 하나는 바깥 경계 신통에 대한 믿음으로서,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은 이치를 보는 힘이 들뜨고 거칠기에 경계에 집착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면 나쁜 인연을 만나 그대로 공부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이는 ‘화엄론’에서 말한 것과 같고, ‘열반경’에서 “상주라는 말만 들어도 일곱 생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같으며, ‘화엄경’에서 “설사 여래의 명호와 설법을 듣고 믿고 알지 못한다 해도 부처님이 될 씨앗이 심어져서 반드시 해탈 성불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경의 다른 곳에서 “제육주심(第六住心)과 보통 사람의 믿음에서는 아직 보리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하는가? 이 뜻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강설) “상주(常住)라는 말만 들어도 일곱 생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 말에서, ‘상주’는 ‘부처님의 세상이 영원하다는 것’을 말한다. ‘상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상주’라는 말을 들은 인연으로 ‘부처님이 될 씨앗’이 심어지기에 뒷날 반드시 해탈 성불하게 된다.


解云. 十信之中 勝解未成 未得謂得 便生慢 不近善友 不敬賢良. 爲慢怠故 久處人天 惡業便起 能成就大地獄業. 若一信不慢 常求勝友 卽無此失. 若權敎中 第六住心 可有退位 實敎中 爲稽滯者 責令進修. 如舍利弗 是示現聲聞 非實聲聞. 假作方便 皆度衆生 使令進策 如權敎中 第六住心 可說實退. 何以故. 爲權敎中 地前三賢 總未見道 所修作業 皆是有爲 所有無明 皆是折伏 功不强者 便生退還.


이를 풀이하여 보자. 십신(十信)에선 뛰어난 이해력이 없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하여 교만한 마음을 낸다. 좋은 친구와 어진 사람을 멀리하며 공경하지 않고 태만하므로 오랜 동안 인천(人天)에 거주하면서도 나쁜 업을 지으니 지옥에 갈 수 있지만, 한결같은 믿음으로 교만한 마음을 내지 않고 항상 뛰어난 도반을 찾는다면 이런 잘못은 없다. 임시방편으로 제육주심(第六住心)이 공부에서 물러날 수 있는 위치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진실한 가르침에서 공부가 막힌 사람을 질책하여 닦아 나가도록 하는 것이니, 이는 사리불이 성문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사실 성문이 아닌 것과 같다. 임시방편이란 모두 중생을 제도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이 공부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니, 이는 임시방편으로 제육주심(第六住心)이 실로 공부에서 물러날 위치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임시방편에서 십지(十地) 이전의 삼현(三賢)은 아직 참다운 도를 조금도 보지 못해 닦는 업이 모두 유위법이므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무명을 다 없애야 하는데도 공력이 약한 사람은 공부에서 문득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설) 보살이 공부하여 성불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살펴본다면 수없이 많은 단계가 있겠지만 이를 대략 정리하여 ‘능엄경’에서는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사가행(四加行)·십지(十地)로 나누어 55단계를 두고 있다. 제육주심(第六住心)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안주하는 열 가지 십주(十住) 가운데 여섯 번째를 말하는데 아직 번뇌가 남아 있는 단계이므로 공부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있게 된다. 일곱 번째는 부처님의 세상으로 가는 공부과정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게 되는 불퇴주(不退住)이다. 삼현십지(三賢十地)는 삼현십성(三賢十聖)이라고도 하는데 십신·십주·십행의 위치에 있는 수행자를 삼현이라 하고, 초지부터 십지까지의 위치에 있는 수행자를 보통 십지 보살 또는 십성(十聖)이라고 말한다.


若折伏有力 亦不退失 如蛇有毒 爲呪力故 毒不能起. 但於佛法中 種於信心 謙下無慢 敬順賢良 於諸惡人 心常慈忍 於諸勝己者 諮受未聞 所聞勝法 奉行無忘 所有虛妄 依敎除 於三菩提道 常勤不息. 夫爲人生之法 法合如然. 但不長惡而生 何須慮退. 華嚴疏云 深心信解 常淸淨者 信煩惱卽菩提 方爲常淨. 由稱本性而發菩提心 本來是佛 更無所進 如在虛空 退至何所.


만약 무명을 없앨 힘만 있다면 공부에서 물러나지 않으니 이는 독사가 주력 때문에 독을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다만 부처님 법에서 믿음의 씨앗을 뿌려 교만 없이 겸손하게 어질고 현명한 분을 공경하며 따르고, 온갖 나쁜 사람한테도 늘 자비로운 마음으로 인욕하며, 자기보다 뛰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아직 듣지 못한 가르침을 묻고, 수승한 법을 배운 것은 잊지 말고 받들어 행하며, 온갖 허망함은 가르침에 의지하여 없애고, 깨달음의 길에서 언제나 부지런히 쉬지 않고 정진할 뿐이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니 법이 그러하다. 단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삶일 뿐인데 어찌 공부에서 물러나려 하겠느냐. ‘화엄소’에서 “깊은 믿고 아는 것이 늘 맑고 깨끗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번뇌 그대로 깨달음’이란 사실을 믿어야 ‘늘 맑고 깨끗한 것’이 된다는 뜻이다.


본디 성품에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냄으로 말미암아 본래 부처님이니, 더 나아갈 곳이 없어 허공에 있는 것 같은데 어느 곳으로 물러나겠느냐.


강설) ‘서장’에서 대혜 스님은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다. 온갖 좋은 법을 길러낸다.’라고 하셨고, 또 ‘믿음은 지혜를 증장시키는 공덕이니 믿음으로 반드시 여래의 땅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리를 가려면 첫 걸음이 시작입니다. 십지 보살이 장애를 끊고 법을 증득하는 길도 처음 십신(十信)부터 공부에 들어간 뒤 법운지(法雲地)에 올라가서 깨달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처음 환희지(歡喜地)도 믿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운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확실하고 늠름하게 반드시 세간과 출세간의 훌륭한 장부가 되고자 하면 모름지기 믿음으로 무쇠를 부어 만든 놈이라야 공부를 해 마칠 수 있습니다. 확실치 않고 어정쩡한 믿음이라면 결코 공부를 해 마칠 수 없습니다.”[黃面老子曰 信爲道元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 又云 信能增長智功德 信能必到如來地. 欲行千里 一步爲初 十地菩薩 斷障證法門 初從十信 而入然後 登法雲地 而成正覺. 初歡喜地 因信而生歡喜故也. 若決定竪起脊梁骨 要做世出世間沒量漢 須是箇生鐵鑄就底 方了得. 若半明半暗 半信半不信 決定了不得.]


98. 탐욕에서 탐욕을 벗어나야


大莊嚴論偈云 遠離於法界 無別有貪法 是故諸佛說 貪出貪餘爾. 如佛先說 我不說有異貪之法 能出於貪 瞋癡亦爾. 此義 是經旨趣. 又 頌云 於貪起正思 於貪得解脫 故說貪出貪 瞋癡出亦爾.


‘대장엄론’ 게송에서 말하였다.


중생들이 사는 세상 벗어나서는
탐진치가 없는 세상 따로 없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시기를
탐진치는 그 자리서 없애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도 탐욕과 다른 법이 있다고 설하지 않으니, 탐욕에서 탐욕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요 성냄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이다. 이 뜻이 경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취지이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탐욕에서 바른 생각 일으킨다면
그 자리서 온갖 속박 벗어나리니
이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시기를
탐진치는 그 자리서 없애야 한다.


강설) 서산 스님의 ‘선가귀감’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어 애욕의 불꽃을 꺼야 한다.[欲脫生死 先斷貪欲 及除愛渴]”라고 하였다. 중생의 삶과 죽음은 시비와 분별로 이루어진 것이다. 뭇 삶의 시비와 분별은 ‘나’를 내세우는 탐욕스런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이 때문에 중생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육도윤회도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떻게 부처님의 거룩한 도를 증득할 수 있겠는가. 성스런 도를 성취하려면 윤회를 벗어나야 하고, 윤회를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과 애욕을 끊어야 한다.


그러나 탐욕과 애욕을 끊고자 해도 결국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탐진치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떠나서는 따로 탐욕과 애욕을 벗어날 곳은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생각 돌이켜 탐욕과 애욕에 자성이 없음을 보는 것이 바로 탐욕과 애욕을 벗어난 자리인 줄 알아야 한다. 〈계속〉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